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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스누피 Aug 03. 2023

어른들의 싸움

[부모로 살기] 어른 싸움에 등 터지는 아이들

부모의 싸움.


주말 아침. 그날은 남편과 아이들이 교회에서 가는 캠프를 떠나는 날이었다. 처음 가보는 1박 프로그램에 아이들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큰 아이가 계란에 밥을 비벼 먹고 싶다기에 먹기 좋게 비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고 있던 아이에게 와서 밥을 먹으라 했다. 책을 보느라고 대답도 움직이지도 않는 아이에게 경고를 했고, 몇 번의 경고에도 응답하지 않자 밥을 과감히 치워버렸다. 그제야 아이는 울며 불며 먹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여러 번 경고했던 터라 훈육이 필요한 행동이었고, 더군다나 수틀리면 바로 울며 소리 지르는 태도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에게 단호하게 행동했고, 스스로 진정하고 엄마에게 공손하게 말할 것을 계속해서 주문했다. 아이는 쉽게 진정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나도 감정적으로는 화가 났지만 최대한 진정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요산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남편은 아이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기도 하다가 혼내기도 하다가 화제를 돌려 농담을 주고받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나름 상황을 정리하려 노력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영 탐탁지 않았다. 나도 다 계획이 있었으니까.


대화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날 것 같은 이 상황에 화가 났고 기다리던 나는 결국 폭발했다. 아이를 다시 불러내어 내 말을 따르지 않고 버티는 아이에게 더욱 화를 쏟아냈다.


지켜보던 남편은 나와 아이를 향해 폭력적인 언행으로 우리의 상황을 종료시키려 했고, 난 그런 남편의 태도에 더욱 분노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만큼은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던 나의 결심이 무너져 내렸다. 이로써 어릴 때 내가 느꼈던 불안과 공포를 아이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것 같아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고 슬펐다. 동시에 남편이 미치도록 미웠고 용서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려다주며 나는 두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엄마 아빠가 싸운 것은 너희 때문이 아니라고. 그냥 엄마 아빠가 의견이 너무 달랐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의견이 다르면 그렇게 서로에게 폭력적으로 말해도 된다고 말한 꼴이니까.) 아이들은 너무 쉽게 "괜찮아, 난 엄마가 좋아"라며 용서해 주었지만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쉽게 잊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부모의 싸움에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아이들이니까. 이 싸움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자신들의 밑바닥을 드러낸 부모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들은 바로 내 아이니까.


어른들의 싸움


가정 밖에서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선생님 VS 부모, 부모 VS 부모, 아이가 없는 사람 VS 부모, 자영업자 VS 부모, 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어른들이 대립한다.  


안타까운 일로 젊은 선생님이 죽었다는 뉴스를 접한 날 종일 마음이 아렸다. 학교가 이대로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데에 누구보다 동의했다. 학교의 주인은 학부모가 아니니까. 학교가 학교다워지기 위해 변화가 필요했고, 그런 변화의 목소리를 함께 지지했다. 학생과 학부모가 선생님을 존중하고, 선생님도 학생을 존중하는 학교. 사람 VS 사람으로서 서로의 권한과 영역을 배려하고 지켜줄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고가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돌아가는 양상이 심상치가 않아 보인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이야기하고, 학부모민원창구를 차단하자 하고, 체벌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댓글들 속에서 기사의 내용 속에서 학부모와 학생들, 발달장애아동들에게 까지 이어지는 대한 날 선 시선들이 느껴진다.


모든 선생님들이 아동학대범이 아니듯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이 진상은 아니다. 하지만 여론은 문제의 본질을 이야기하기보다, 문제의 당사자들을 일반화시켜 혐오감을 조장하고 찍어 누르기에 급급한 것 같다. 이게 과연 바른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을까. 또 다른 사회적 부작용과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을지 심히 염려스럽다.


교사의 학대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사람들은 아동과 학생인권을 들먹여 교사들을 찍어 누르려고 한다. 학부모 갑질 문제가 올라오면 다시 아동과 학생인권을 운운하며 학부모들을 찍어 누른다. 이 모든 다툼 속에서 정작 중심에 있는 아이들은 배제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렇게 어른들이 두더지 게임하듯 문제를 해결을 하는 동안 정작 얻어맞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다. 이해와 관용이 아닌 혐오와 배척을 선택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이 땅의 아이들은 과연 바르게 배우고 자랄 수 있을지 의심된다. 난 아이들에게 혐오로 갈라진 세상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땅처럼 이념갈등으로 좌우, 흑백으로만 나눠진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 몹시 씁쓸하다. 우리에게 정녕 회색지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학교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고, 아이들이 없이는 학교가 존재할 수 없다. 학교의 목적은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있다는 것을 부디 어른들의 욕심과 갈등으로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른들은 아이들의 선생이자 보호자다.


어제 영화 엘리멘탈을 관람했다. 이야기 속엔 두 유형의 부모가 나온다. 혐오와 배척을 가르치는 부모와 이해와 포용을 가르치는 부모. 두 부모 모두 자신의 아이를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택한 방식은 혐오와 배척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이 아이들을 위한 최선인지.

서로를 향해 활을 겨누기 전에 전쟁의 한가운데서 움츠리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아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그런 어른으로 자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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