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전화 한 통의 무거움
지난 10월 중순쯤이었다.
그날은 대학병원에 예약된 진료를 받기 위해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던 날 저녁이었다. 시어머니와 같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하고 내일은 어떤 진료를 보는지 지난 진료 후에 나아진 게 있는지 안부를 물으며 쉬고 있었다. 저녁 8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친정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있냐"
"뭐 하냐"
"엄마가 딸 목소리 듣고 싶다 해서 전화해 봤다."
평소에 특별히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화가 많은 부녀는 아니었던지라, 그 시간에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딸 목소리가 듣고 싶다던 엄마는 늘 그랬듯 아무 말이 없었고 찜찜한 마음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아빠는 '아무 일 없다.', '평소처럼 엄마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전화하는 것'이라고만 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나 보다. 아무리 대학병원이라도 저녁 8시까지 진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녁 8시가 돼서야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병원은 응급실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나는 눈치가 없었던 게 아니라 더 알고 싶지 않아 묻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간간히 전화 통화를 하며 엄마의 건강상태를 확인했지만, 늘 똑같다는 아빠의 씁쓸한 대답만 들을 뿐이었다.
나는 패륜아인가요?
매년 10월 말은 할머니의 추도식을 위해 친가친척 어른들이 같이 모인다. 친척 어른들이 한 집에 모여 추도식을 하고 하루 이틀밤을 지내며 나들이도 다니신다. 일하는 중에 친척 단체톡방에 어른들의 나들이 사진이 올라오기에 대충 훑어보고는 '즐거운 여행 되시라' 정도의 응원 메시지와 이모티콘을 가볍게 보냈다. 사진 속에 엄마아빠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사진 찍기 싫으셨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저녁때쯤 어른들이 모여 같이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친정집의 익숙한 부엌 모습을 보고 퇴근하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지 말지 정도만 잠깐 고민했었다.
다음날 어른들이 각자 헤어지시면서 카톡에 인사말을 남기셨다. 조심히 돌아가시라는 메시지만 보내려고 했는데 큰아버지의 메시지를 읽고 나니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인천동생 몸도 안 좋은데 우리들 챙기느라 고생 많았다. (중략)
그리고 ㅅㅎ,ㅇㅎ가 엄마한테 잘하는 것 밭에서 한편 마음이 흐뭇하기도 하다. (중략)
원당 제수씨(*친정엄마) 건강이 빨리 회복돼야 할 텐데 걱정이네,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 바랍니다.」
이전에도 썼듯이 치매에 갖가지 질병을 가지고 있는 엄마는 늘 기도가 필요한 건강 상태였지만,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시는 건가 싶어 그간의 카톡을 다시 살펴보고 나서야 알았다. 사진 속의 엄마가 허리보호대를 차고앉아있다는 걸.
그제야 내가 얼마나 무신경하고 무심한 딸이었는지 깨달았다. 몸이 아픈 고모를 도와 손님을 맞고 고모의 두 아들들이 고모를 살뜰히 챙겨 흐뭇했다는 말은 사촌형제들을 칭찬함과 동시에 아픈 부모를 챙기지 않는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엄마가 어떤지도 모르는 딸이라니. 비참했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아빠가 미웠다. 나는 카톡방에 아무런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소시오패스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아빠에게 엄마의 상태를 묻기보다 격하게 요동치는 내 감정을 추스르는 게 먼저였다. 내가 아빠에게 딸이기는 한 건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딸이기에 아빠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걸까.
어린 날엔 얼마나 눈치 빠르고 싹싹한 아이인지로 친척어른들의 평가를 받았다. 청소년기땐 얼마나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가는지로. 성인이 되어서는 얼마나 좋은 직장을 얻었는지로 끊임없이 평가를 받았는데. 이젠 얼마나 부모를 잘 돌보며 효도를 잘하느냐로 여전히 어른들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눈치도 싹싹하지도 못했고, 그럴듯한 대학도 못 나왔고, 대기업에 취직도 못한 데다가 이젠 아픈 부모를 모시지도 않을뿐더러 관심조차 없는 인정머리 없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형편없는 천하의 몹쓸 년이 됐다.
어쩌면 무거운 죄책감에 이렇게 나를 스스로 셀프 비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나는 딸 자격도 없는 아무 도움 안 되는 쓸모없는 자식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신은 아니잖아!
비참한 감정으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화요일이 지났다.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를 내 아무렇지 않은 척 아빠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다음날도 여전히 아빠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불안했다. 혹시 내가 내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아님 연락하지 않는 나에게 화가 나서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몇 번의 부재중 끝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겨우 아빠와 연락이 닿았지만, "지금 병원이야. 나중에 통화해."라는 짧은 대답만 들을 뿐이었다. 하지만 해가 서쪽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아빠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겨우 연락된 아빠에게 병원은 왜 다녀왔냐, 엄마는 어디를 어떻게 다쳤냐, 얼마나 됐고 지금은 어떤 상태냐.. 계속해서 질문하는 나에게 아빠는 "친척들 있는 카톡방 못 봤니? 엄마 상태가 어떤 지 너 몰라? 작년에 강서방한테 다 말했는데 못 들었냐. 왜 자꾸 묻냐."라고 타박했다. 그렇잖아도 서러운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나는 참지 못하고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통화해도 아무 말이 없지. 아빠는 엄마가 어떤지 물어도 괜찮다고만 하지. 내가 신이야? 내가 의사야??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엄마상태를 눈으로만 보고 목소리만 듣고 다 알아. 내가 딸이잖아.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주는데? 왜 나를 자꾸 나쁜 딸로 만들어? 말을 안 해줄 생각이었으면 끝까지 모르게 하던가. 내가 왜 남편이나 친척들 카톡방에서 엄마 상태를 들어야 하는 건데!"
서럽게 울며 소리치는 통에 회사 문 앞 공원에 있던 사람들도, 담배 피우러 나온 사람들도 다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렸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하냐. 그러니 내가 엄마한테 전화 자주 하라고 항상 이야기했잖아. 넌 딸이라는 게 왜 그렇게 무심하냐? 너 엄마가 치매인 건 알고 있는 거니?"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아빠의 말에 더 대화를 했다가는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아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이후로 아빠에게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그 주말 친정집에 가기 위해 모든 약속을 뒤로하고 일정을 비웠지만 차마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던 그때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넌 그렇게 전화를 끊고 왜 여태 연락도 없냐. 이따 집에 와라."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주말 꽉 막힌 도로 2시간이 넘도록 더디 움직이는 비좁은 차 안에서 멀미가 날 것 같았지만 더 천천히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연약한 모습도 아빠의 얼굴도 볼 자신이 없었다.
힘들게 도착한 친정집에서 만난 엄마는 혼자 힘으로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부축하면 천천히 이동은 가능했지만 화장실에서 스스로 옷을 내릴 수도 용변처리를 할 수도 없었다. 소파에 누워서 한참을 자다가 잠깐 일어나 용변을 보고 소파에 잠시 앉아있다 또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팔이며 다리며 시퍼런 멍이 잔뜩 들어 있었고 손과 발은 퉁퉁 부어있었다. 피부는 뱀 이 벗어놓은 허물껍질 마냥 말라있었다. 산송장이란 말은 이런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었을까.
넘어져서 척추뼈가 골절되었고, 뇌경색이 왔었다 했다. 지난 3주 사이에 두 번의 응급실을 다녀왔고 MRI를 찍고 혈액검사를 했다. 단기간에 여러 일들이 몰아치면서 무엇이 먼저 일어난 사고였는지 응급실에 간 날이 언제였는지 조차 아빠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왜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아빠는 “너한테 말한다고 해결책이 있니. 너도 애들 챙겨야 하고 회사도 가야 하는데 바로 뛰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마음만 심란하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말이 맞았다. 사실 모르지 않았다. 아빠가 내게 아무 말하지 않는 이유를. 그저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아빠에게 의지도 도움도 되지 못하는 무능력한 딸이라는 것이 괴로웠다. 아빠 말처럼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없었다.
"다음 주 금요일에 휴가 낼 수 있냐? 그날 엄마 병원 가는 날이다. 같이 갈 수 있음 같이 가고."
처음이었다. 아빠가 나에게 이런 요청을 한 적은. 아빤 늘 병원을 언제 가는지 조차 미리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저 '얼마 전에 병원에 갔다가 치료받고 왔어.'라는 후기를 들을 뿐이었다.
연초 엄마의 입원 때를 제외하고도 애들이 아파서, 애들 방학이라서, 부모 참석일정이 있어서 유치원, 초등학생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의 일정으로 나에게 남은 연차는 1.25일. 올해 마지막 남은 연차를 친정에서 보내기로 하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시어머니 건강이 어떤지 안부를 묻고 있던 그때 친정 엄마는 더 심각한 상태였다. 왜 나는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더 빨리 친정을 찾아오지 못했을까.
엄마가 어떤지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알지 못한 채 난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공부를 시킬지, 어떤 학원을 보낼지, 무엇을 먹일지, 무엇을 입힐지, 요즘 어떤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숙제는 잘했는지, 애들 병원은 다녀왔는지, 아이의 불안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주말엔 아이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오늘 등하원 스케줄엔 문제가 없는지, 냉장고에 떨어진 재료는 없는지, 어디가 더 싼 지…….
그저 내 삶을 살아내기에 바빴다. 연초 엄마가 입원했을 때에 비해 조금 나아졌다고 난 금방 무심해졌다.
말없이 운전하는 남편 옆에서 숨죽여 울었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끄으으윽’ 소리가 났다. 뒷자리에서 “엄마.. 왜 그래??”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우는 이유가 단지 엄마가 아파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무심하고 무능력하고 한심하고 부끄러워서라고. 아빠에게 미안하지만 또 고마워서라고. 그럼에도 앞으로도 도저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