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찬란함에 빚을 지다 - 박건웅의 <제시이야기>

by 안선희

<제시이야기>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이야기가 있다. 육아와 독립운동.

언뜻 보기에 쉽게 연결 점을 찾을 수 없지만 제시의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로 두 이야기는 하나의 대서사가 된다. 양우조, 최선화 부부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시대적 희생을 감수하였다. 하지만 개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상의 행복을 영유하였다. 물론 육아와 독립운동 모두 커다란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힘들고 어려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딸 제시의 존재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했다.

아이의 작은 몸집과 존재감은 그토록 반비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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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작아 바구니에 쏙 들어있는 제시의 모습은 표지에서부터 눈에 띈다.

표지에는 짐을 짊어지고 피난을 떠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나 제시의 가족을 제외하면 모두 얼굴이 텅 비어있다. 이처럼 얼굴이 표현되지 않는 기법은 박건웅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상상력을 자극하여 극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곤 하는데 <제시이야기>의 흑백 표지 속 텅 빈 얼굴들에서는 혼란의 시대에 영혼까지 아득했을 소시민들의 저린 마음이 묻어 나온다.

인파들 가운데에 보이는 제시의 부모는 다부지게 다문 입술과 직시하는 시선으로 독립운동의 소신과 염원을 보여준다.

그들의 품에 안겨 있는 바구니 속 아기 제시는 중일 전쟁의 혼란한 시대에 어떤 유년을 보내게 될까.



현주는 분홍색 꽃을 한 아름 들고 90세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방문한다. 항상 신문과 TV 등을 통해 날씨를 재차 확인하고 자식들에게 알려주는 할머니는 제시의 엄마 최선화다. 백발의 노인이 된 최선화가 제시를 양육하며 쓴 ‘제시의 일기’를 제시의 딸 현주에게 보여주며 만화는 시작된다.

일기의 내용이 서술되기 전에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로 시작되는 도입부 또한 사실을 기반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김현주 씨의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시이야기>의 원문은 1999년 김현주 씨가 할머니 최선화의 일기를 엮어 출판했던 <제시의 일기>로 개인의 기록이 곧 역사의 중요한 기록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만화는 그러한 기록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예술이자 매체이다. 최선화가 노인에서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의 일러스트를 기점으로 일기의 내용이 시작이 되는데 이는 텍스트만으로는 느끼기 어려운 입체감을 선사한다. 또한 작가가 직접 취재를 다녀와 그린 임시정부의 모습과 배경들은 상상만으로는 부족한 사실성을 충족시켜주는 만화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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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이야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양우조, 최선화 부부가 중국에서 딸 제시를 낳아 양육하는 1938년부터 1946년까지의 8년의 시간을 기록한 육아일기이다.

최근의 육아일기는 TV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보여 지며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즐거운 모습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실상 육아는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의 예쁜 모습 뒤로 부모들의 수고로움은 말하기 입이 아플 정도이다. 한 생명을 어엿한 자아로 키워내는 것은 가장 숭고한 일이기에 그 어려움은 당연히 겪어내야 할 과정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숭고한 행동인 독립운동이 제시의 육아일기 배경으로 등장한다.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은 격렬하게 회오리쳤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타지에서의 독립운동을 선택했던 300여 명의 임시정부 식구들은 계속 이동하고 이동하여 타국의 땅 안에서조차 피난을 다녀야 했다. 제시를 출산한 후 며칠 되지 않아 시작된 기차, 버스, 목선을 이용한 피난의 날들을 마치 물 위를 부위 하는 부평초와 같았다고 표현한 구절은 그 힘겨운 순간들을 짐작하게 한다.

내 나라 내 집을 두고 타국의 물길에 몸을 맡기고 떠다녀야 하는 것은 외로움과 견뎌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난길의 고난 속에서도 중국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생각하는 구절에서 미국 MIT 공대를 졸업한 기업인 양우조와 이화여전을 나와 교사로 활동했던 최선화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독립운동에 임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독립운동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스스로와의 지루한 싸움이다.

마치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기나긴 물결 위에서 표류를 끝내고 땅을 밟기 위해 끝없이 노를 젓는 것과 같다. 막막하지만 모두의 책임감과 희생의 끝에는 ‘독립’이라는 글자가 있기를 바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바쳤다. 경이롭게도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 딸이고, 커가는 아이들의 부모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독립운동이라는 배를 타고 구불구불 끝도 없는 강물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책의 첫 페이지 일러스트에 담겨있다. 굽이치는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태극기를 단 작은 배는 수많은 여울을 건너 고요한 물결의 끝 독립된 조국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작품마다 기법을 달리하는 작가는 <제시이야기>에서는 동글한 그림체와 도톰한 펜 선을 사용하여 동화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일러스트 또한 아기자기하게 표현되었지만 그 속에 그려진 공습과 일장기는 귀여운 아기 제시가 작은 소리에도 놀라 피난을 가야 한다고 소리치는 장면과 겹쳐져 보인다.

누가 그 작은 입에서 피난과 공습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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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날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쬐는 대신에 일본의 공습으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방공호와 들판으로 달려야 했다. 이 강렬한 공포의 경험은 수 십 년이 흘러도 잊어지지 않아 노인이 되어서도 매일 날씨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자식들에게 전해주는 최선화의 습관을 만들었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픈 시대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기억해서 똑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기록의 힘이고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박건웅의 만화는 항상 진실된 역사를 기록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 그것은 커다란 역사 안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사연들이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다. 이렇게 역사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사람’에는 아이들도 포함된다.


말 못 하는 빗개(보초)소년은 <홍이 이야기>에, 간첩 누명을 쓴 아버지를 두어 동네 아이들에 의해 나무에 묶여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는 <그해 봄>에, 그리고 <노근리 이야기>에는 미군의 총에 죽거나 부모의 손에 수장당해야 했던 아이들까지 슬프지만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는 어떠한 절망적인 역사의 순간에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란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던져준다. 그래서 작품으로 복원된 아이들의 그 해맑은 모습이 처참한 역사로 인해 희생되는 순간들을 눈물로 정독해야 했다.

하지만 <제시 이야기>의 제시는 다른 작품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읽힌다.



태어나자마자 공습을 피해 다녀야 했던 제시는 그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아이의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으로 위로한다.

하늘이 까맣게 보일 정도로 쏟아지는 공습으로 인해 매일이 죽음의 공포로 가득하다. 당장 오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두려움일 것이다. 하지만 갓난쟁이 제시는 그저 젖을 빨고, 잠을 자고, 심지어 웃으며 태평하게 놀기도 한다. 제시의 부모는 이런 제시의 모습에서 밀려드는 공포를 이겨냈다. 이토록 순수한 존재인 사랑스러운 아이를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에서 자라도록 하기 위해 버텨낸다. 어쩌면 이 일기는 그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죽음이 아닌 삶으로 나아가는 딸의 모습을 기록한 것인지도 모른다.

공습이 계속되어 몸이 지쳐가면서도 정신과 마음은 더욱 견고해져 독립을 향한 열망이 강해지는 부부의 모습은 제시가 건강하게 커나가는 모습과 함께 영롱하게 빛난다. 물론 자신들의 선택으로 제시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지 부모로서의 고민을 하는 순간도 있지만 이내 독립이라는 목표를 다잡는다. 지금의 어려움이 제시의 미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포악한 침략과 잔인한 전쟁이 없었다면 아기 제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들판으로 내달리는 대신에 아름다운 햇살을 쬐며 들판을 거느렸을 것이다. 죄 없는 아이들의 인생이 어른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망가져가는 안타까움을 작가는 제시의 해맑은 미소로 표현한다. 이전 작품 속의 아이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은 그 해사한 미소가 너무도 강렬하게 고맙다. 아이의 찬란한 웃음을 보며 부부와 임시정부 사람들,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힘을 냈을 것이다. 그 힘은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고 지금의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기 제시의 찬란한 미소에 빚을 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시이야기>는 일기라는 가장 개인적인 기록이다.

하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개인의 역사가 모여 역사를 이룬다. 책의 말미에 보이는 양우조의 유언에도 이와 동일한 구절이 보인다.


전체 동포의 위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개인의 일도 잊지 말아라.
개인은 전체의 일분자요, 일분자가 모여 대체가 되는 법이다.

사람과 역사는 각각이 될 수 없는 존재로 사람이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가 사람을 만드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다. 잔혹한 역사 속 수많은 희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개인의 기록과 기억은 중요하다.

그렇기에 제시의 일기는 그 어떤 역사책 보다 소중하고 진귀한 기록이다.



1945년 그토록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땅에 들어서는 제시의 따뜻한 미소로 일기의 내용은 마무리가 된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현주는 엄마 제시의 병실에 분홍색 꽃다발을 들고 방문한다. 중년이 된 제시는 병실을 가득 채운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안에는 예전 같은 공습은 없다. 평온함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작품의 시작과 끝에 현주의 손에 들려 등장하는 두 개의 분홍색 꽃다발이 지금의 우리가 제시와 제시의 가족, 그리고 그 시대를 버텨낸 이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감사의 인사라 하고 싶다. 덕분에 따뜻한 햇살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지금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라는 약속의 꽃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