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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an 16. 2023

알제리 전투

# 결혼식과 장례식

배경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지중해를 직선으로 내려오면 맞닿는 곳이 알제리 땅이다. 프랑스는 19세기말 격변기에 오스만튀르크가 약해진 틈을 타 1830년에 알제리를 침공했다. 야금야금 알제리를 잠식한 프랑스는 1870년에는 완전히 병합시켰다. 모로코와 튀니지까지 보호령으로 만든 프랑스는 알제리를 행정적으로 프랑스의 소유로 만들었으며 영구적으로 제2의 프랑스로 만들 계획이었다. 알제리의 영토는 아프리카에서 제일 넓으며 자원은 말할 수 없이 풍부하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그들은 팍스 프랑스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이때의 야욕으로 인하여 프랑스는 현재까지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프랑스는 자국민 및 유럽인들을 알제리로 이주시켜 산업 전반에 걸쳐 이들을 포진시켰으며 원주민의 토지는 빼앗아 이주 유럽인들이 경영하는 와인 농장을 만들었다. 와인은 프랑스 본토인들을 위해 수출되었다. 유럽과 프랑스 이주민들을 ‘피에 누아르Pieds-Noirs’라고 불렀는데 ‘피에’는 발이니 발만 검은 사람들이란 말로 침략자, 혹은 식민지산업의 경영자가 신은 장화나 부츠 혹은 신발을 뜻하는 말이다. 즉 지배계급의 상징을 뜻하는 별명이다. 피에 누아르들은 거대 농장의 주인이 되었고 산업 일선의 경영자가 되었다. 원주민의 삶이 있던 평지에는 프랑스구역(유럽구역)을 만들어 발코니가 달린 이들의 아파트와 사무실을 만들었다. 유명인으로 이브생 로랑과 카뮈도 피에누아르였다. 피에 누아르들이 모두 풍요로운 부를 누리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 오랑 지역 출신인 이브 생 로랑의 어린 시절은 잘 모르겠지만 카뮈의 작품에서 나타난 카뮈는 찢어지게 가난한 지역인 알제 벨쿠르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평지에서 쫓겨난 알제리인들은 언덕의 카스바에 방을 달아내어 의탁했다. 우민화정책으로 인해 알제리인들에게 교육은 불필요했으며 대부분의 알제리인은 하루살이 일꾼으로 전락했다. 프랑스의 침공 이후 이주한 피에 누아르의 숫자는 1950년경에는 10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당시 1000만 명이 조금 모자란 알제리 인구의 10분의 1이니 피에누아르 1명이 알제리 사람 열 명의 노동으로 부를 누린 셈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군은 프랑스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본토의 남부에는 비시프랑스정부가 있었지만 독일의 입맛에 맞는 괴뢰정권일뿐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미 프랑스화한 알제리와 보호령인 모로코와 튀니지가 있는 북부아프리카가 있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연합군에 들어가도록 모로코와 튀니지, 알제리의 젊은이들에게 입대를 독려했다. 알제리인에게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독립하게 해 주겠다는 단꿈을 약속했다. 침공 이후 100년이 넘어가는 통치기간을 접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잡기 위해 알제리 젊은이들은 연합군에 앞다투어 입대했다. 그러나 1945년 5월 8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 시작된 수만 명을 죽인 세티프 대학살은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이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으며 누구보다 용맹한 프랑스군이었던 알제리인들은 알제리민족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영화는 유엔마저 외면한 막다른 길에 있었던 알제리인들의 독립전쟁(1954~1962)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32년간의 외로웠던 식민 지배를 1954년에서 1957년, 아니 1962년까지의 짧은 투쟁으로 대신했다.  


영화이야기    


1966년에 알제리에서 제작했으며 이탈리아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가 감독을 맡았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을 한 영화지만 프랑스에서는 1966년 베니스에서 개봉 이후 4년 동안 상영을 금지했던 영화이다. 대한민국은 2009년이 되어서야 개봉되었다. 마치 다큐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정이 배제된 담담한 전개가 퍽 이성적이다. 엔리코 모리코네의 음악은 영화의 심장소리를 듣는 것처럼 영화에 생명감을 느끼게 해 준다. 과장된 표현인가?, ‘Algiers November 1’와 The Battle of Algiers March‘, 꼭 한 번 들어보길 추천한다.      

영화는 알제의 카스바에서 대부분 촬영했으며 카스바 아래의 시장까지 촬영당시 그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 알제 카스바는 이슬람의 아랍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했을 당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넓게 자리 잡은 성채이며 주거 생활구역이었다. 외관은 담백하지만 내부는 화려한 이슬람 양식으로 꾸며진 카스바는 술탄이나 총독이 거주했다. 프랑스 침공 이후 서민들은 평지의 프랑스(유럽) 구역에서 쫓겨나 언덕의 카스바로 모여들었다. 가난과 함께 더욱 오밀조밀한 골목으로 나뉜 카스바는 알제리 독립운동의 산실이며 은신처이자 전쟁의 한복판이 되었다. 카메라는 뉴스를 찍는 것처럼 사람들을 훑고 지나간다. 카스바로 들어선 앵글은 완만한 계단 위를 달려 집 안채의 남루함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늘이 커튼처럼 내려와 있으며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발코니가 있는 카스바는 이들의 안식처이다.

 

카스바 아래동네에 위치한 시장
카스바의 골목

    

 #인트로

고문실에서 알제리의 한 늙은 반군이 고문 끝에 민족해방전선의 마지막 지도자인 알리의 은신처를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에게 불고 난 후 괴로워한다. 매튜(장 마틴) 대령이 이끄는 공수부대에 포위당한 알리는 쥐구멍 같은 은신처에서 한길만을 생각하고 달렸던 지난 독립운동 과정을 회상한다.    

 

 # 1954년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1호 성명을 발표하며 알제리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는 식민통치에 대항한다. 목표는 독립과 이슬람 교리에 입각한 알제리인의 존엄 회복, 종교와 인종을 막론한 기본 자유의 존중이다. 유혈사태를 막고자 우리는 프랑스에 알제리 자결권 협상을 제의한다. 알제리 동포여, 조국과 자유를 되찾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동포여, 단결하라! 무장하라!"


 그러나 100년 가까이 무력하게 살아온 그들의 습성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다. 누구라고 다를 수 있을까, 거리의 불량배로 살아가는 알리(브라힘 하쟈드)는 경찰의 지목대상이다. 잡범으로 감방에 들어간 알리는 알제리 독립을 외치며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정치범을 목격한다. 높은 감방의 좁은 창문은 단두대 처형장을 향해 나있다. 사형수 때문이었을까, 5개월 후 감방에서 나온 알리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자파와 만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더불어 지도부는 알제리인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오늘부로 우리가 동포의 신체적, 도덕적 안녕에 대한 책임을 진다. 이에 마약과 술의 판매 및 음용을 금하고 매춘과 그 알선 행위 일체를 금지하는 바이다. 위반자는 처벌될 것이며 상습범은 사형에 처한다."  

 

카스바 골목에서 술에 취한 한 노인이 개떼처럼 몰러든 동네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며,  만연해있던 마약상과 매춘도 점차 근절이 된다.


#1956년

전쟁 중에도 사랑은 진행된다.  “식은 생략합니다”.로 시작하는 결혼식은 민족해방전선 대표가 보는 앞에서 서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이들이 방에서 나와 손을 모으고 축복을 해 주는데 자신들의 발코니와 지붕으로 올라가서 미소와 손뼉으로 기쁨을 표현하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다. 마무드와 파티하의 결혼식은 영화에서 감동받았던 아름다운 장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끝나기 전에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바로 신랑 마무드의 장례식이다. 알제의 트인 바다가 비친다.


발코니와 지붕에 나와 축복해주는 주민들/마무드와 파티하의 결혼식, 내가 뽑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민족해방전선의 습격사건이 잦아지면서 프랑스는 아랍지구를 봉쇄한다.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철조망을 드리웠다. 주민들이 24시간 검색을 당하는 곳이다. 프랑스구역에서 한 노인이 앉아서 일을 하고 있다. 피에 누아르들이 한 사람씩 발코니로 나오더니 궂은일을 하면서 길에 앉아있는 노인을 마치 징그런 벌레를 본 것처럼 소리 지르며 지목한다. 겁에 질린 노인은 도망가다가 출동한 경찰에게 잡혀간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피에 누아르와 알제리 원주민들 간의 간극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피에 누아르들의 외침 "도망간다, 잡아" , 할아버지는 결국 출동한 경찰에게 잡혀간다

  

통행금지 시각, 프랑스 경찰은 카스바의 중심에 폭탄장치를 설치한다. 이들이 나오자마자 터지는 폭탄은 카스바 중심부를 날려버렸다. 잔해 속에서 나오는 시체와 중상자들을 본 군중들은 울분을 삼키지 못하고 시위에 나선다. 프랑스경찰이 원하는 바였다. 그러나 민족해방전선 대표인 자파(야세프 사디)는 시위대와 선두에 서 있는 알리를 잡아 선다. “이대로라면 개죽음이야”, “민족해방전선이 복수한다고요!”     

그나마 쉽게 출입이 가능한 여자들을 시켜 사람이 많은 카페와 카바레, 공항에 폭탄테러를 성공시킨다. 수많은 유럽인들이 희생되었다. 적어도 하루에 42건의 습격이 계속되었다.


프랑스쪽의  카스바 폭파사건, 잔해 사이에서 죽은 아이를 찾아낸다.
경찰은 민족해방전선 반군들의 주요 테러 대상이다.

     

#1957년  

프랑스에서 알제의 치안 유지를 위해 공수부대를 데리고 매튜 필립 대령이 알제로 들어온다. 피에 누아르의 열렬한 환영이 이어진다. 알제리인들은 총파업에 동참한다. 가게가 문을 닫고 알제의 공장이 멈춘다. 노동자가 없으니 알제의 산업은 마비상태다. 4일째 총파업, 프랑스는 파업을 빌미 삼아 공수 부대의 샴페인 작전을 시작한다. 카스바에 들이닥쳐 노동자를 징발하고 이송한다. 파업이 이어지자 무력으로 가게의 문을 열게 한다. 매튜는 알제리를 촌충에 비교한다. 한 번 몸 안에 번식하면 절대 없어지지 않는 기생충으로 몸을 잘라도 머리가 남아있으면 또 자라난다. 그러므로 우두머리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면서 피라미드 구조의 우두머리를 하나씩 제거해 간다. 3월, 시내의 아파트에서 지도자인 벤 미디를 체포했으나 그는 감방에서 자살한다. 언론의 고문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매튜대령은 자신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답한다.


“난 미치광이도 파시스트도 아닙니다. 고문? 그건 우리 명령에 없소. 우리는 심문을 합니다. 반군은 우릴 몰아내려고 하고 우리는 남으려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프랑스가 이곳에 남아야 한다면 문제는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군인이고 군인의 목적은 승리입니다.”


프랑스군은 여차하면 카스바에 난입하여 주민들을 소거하고 지목된 이들은 주민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당한다. 드디어 샴페인 작전이 완성되어 가는 것처럼 민족해방전선의 피라미드가 와해된 듯 보인다. 자파도 잡혀가고 남아있는 우두머리는 이제 알리 한 명뿐이다.      


#알리의 죽음

30초 회유의 시간이 끝나고 샴페인 작전의 완수를 알리는 폭음이 카스바를 뒤흔든다. 결혼식 장면처럼 지붕에서 발코니에서 주민들은 알리의 죽음을 지켜본다. 결혼식을 올렸던 마무드도 알리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눈물바람의 파티하, 이거야말로 장례식 장면이 아니던가.


“촌충의 머리를 제거했군, 본래 선량한 사람들이야. 130년 동안 잘 지내왔는데”     


마지막 지도자 알리의 눈빛


#1960

찢은 이불과 넝마에 알제리 국기를 그린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군인들은 총과 탱크를 동원하여 민중을 향해서 총격을 가한다.   

   

 “원하는 게 뭡니까?”

 “독립을 달라, 우리의 자존심을 돌려달라”     


이날 시작된 민중들의 항쟁은 이후 2년간 계속되었다.   


에필로그        

화면은 흔들리고 포커스는 지쳐간다. 영화는 종군기자의 카메라앵글에 다름 아니다. 출연자는 공수부대 대령 매튜를 연기한 프랑스 배우  마틴과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주민들이 대거 출연했다. 영화를 1962년에 독립하고 1966년에 제작했으니 그야말로 리얼다큐 영화다. 프랑스의 알제리 우민화 정책은 1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알제리를 무력한 민중들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민족해방전선의 노력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불량배, 매춘, 마약쟁이, 사기꾼, 술주정뱅이들로 가득한 카스바를 변화시켰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에는 그냥 아리다. 프랑스가 촌충이라고 경멸했던 민족해방전선의 우두머리들이 사라진 날, 알제리인들은 모두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960년 시작된 대규모의 민중봉기는 1962년까지 계속되어 그들은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정말로 힘들다네.

 혁명을 지탱하기란 더 힘들고, 그리고 가장 힘든 건

 혁명에 성공하는 거지”


영화에서 민족해방전선 지도자가 혼잣말처럼 했던 말을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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