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 Jan 12. 2023

잉글리시 페이션트

"Let me tell you about winds"

     

레이프 파인즈Ralph Fiennes,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Dame Kristin Scott Thomas, 음악감독 가브리엘 야레Gabriel Yared, 1996년 제작한 영화, 2016년 재개봉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과 회상을 대비시키면서 교차편집으로 진행한다. 영화의 배경은 1944년 가을,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이며 이탈리아의 야전 병동과 폐허로 변한 수도원이다. 회상씬은 이보다 훨씬 이전 전쟁 발발 이전의 리비아와 이집트의 국경 부근의 사하라사막이다.  


영화는  알마시와 한나의 수도원 장면과 알마시와 캐더린의 사막의 회상 장면을 교차시키면서 이끌어간다. 하지만 줄리엣 비노쉬가 열연한 현실장면은 회상장면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장치이다. 영화 속에는 세 가닥의 사랑이 흐른다. 캐나다인 간호사 한나와 영국인지만 주변인이었던 인도계 영국인 킵의 사랑과, 잉글리시 페이션트(알마시)의 회상에 등장하는 알마시와 캐더린의 사랑, 그리고 영화의 초반에 복선으로 깔린 기게스의 사랑이다.     

   

# 한나와 잉글리시 페이션트

사하라 사막에서 독일군의 포에 맞아 추락한 비행기에서 난 불로 화상 입었지만 아직은 살아있는 남자는 이탈리아 바닷가의 한 야전 병동으로 보내졌다. 그 남자의 유일한 소지품은 빼곡하게 뭔가 들어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책 한 권이다. 단지 영어를 아는 이유로 ‘잉글리시 페이션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캐나다인 간호사 한나의 환자이다.

죽어가는 그를 이동할 수 없어 택한 폐허의 수도원에 마련한 임시병동에서 영국인 환자는 한나에게 그의 지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 회상 1

캐더린을 만나기 전의 알마시
재프리와 캐더린이 탄 비행기가 오고 있다. 촬영지는 튀니지  사하라 근처의 옹그제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사막 탐험을 하고 있던 알마시와 친구 매독스 앞에 영국인 부부 제프리와 캐서린이 복엽비행기를 타고 사막에 등장하여 탐험대의 일원으로 합류한다. 그날 저녁 사막 캠프에 모닥불을 피우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시간, 캐더린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기게스 이야기를 들려둔다.  

   

캐더린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리디아(현재 튀르키예의 일부)의 칸다울레스왕은 그의 측근인 기게스에게 왕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면서 밤에 왕비의 방에 몰래 들어와 왕비의 옷 벗은 모습을 보라 요구한다. 기게스는 재난이 닥치는 것이 두려워 거절하였다. 하지만 왕의 강요로 기게스는 밤에 왕의 침실에서 왕비가 옷을 벗는 모습을 문 뒤에 숨어서 보고 문 밖으로 나가다가 왕비에게 그만 들키고 만다. 다음날 아침 분노와 모욕감에 왕비는 왕을 죽이든지, 기게스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명한다.’ 이 씬에서 교차하는 이들의 눈빛으로 말하자면 기게스는 곧 알마시요. 칸다울레스의 왕비는 캐더린이다. 캐더린의 남편 제프리는 “놈의 목을 쳐라”하면서 분위기를 돋운다.

왕비와 공모하여 왕을 죽인 기게스는 그녀와 결혼해서 왕비와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이어지는 ‘역사’에 나오는 내용을 보자면, 리디아 국민들은 칸다울레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분개하였지만 델포이의 신탁은 기게스가 리디아 왕이 되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로써 리디아헤라클레스가문(칸다울레스)에서 메름나드가문(기게스)으로 권력이 옮겨졌다. 어리석은 왕 칸다울레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 알카이오스의 후예이다. 메름나드가문의 창시자 기게스는 별다른 과오 없이 리디아의 군주로 3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30 또는 420)가 쓴 ‘역사’의 제일 첫 장 리디아 편에 쓰여있다. 기게스의 정의롭지 못한 쿠데타를 정당화한 내용이지만, 다분히 여성의 육체를 관음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 위주의 사고에서 나온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알마시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다니는 낡은 책 ‘역사’는 알마시와 캐더린을 연결하는 도구로 쓰였다.

르네상스 이후 Candaules왕과 기게스Gyges의 이야기는 화가들의 재료가 되어 관음 취미가 발달한 귀족들을 위하여 많이 그려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 회상 2

사막 탐사를 떠나는 대원들, 동굴탐험을 마치고 모래폭품을 만난다. 촬영지는 튀니지  사하라 근처의 옹그제멜
"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게요" 모래폭풍으로 뒤덮힌 차 안


제프리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떠나고 탐험대는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을 발견(실존 인물인 라즐로 알마시가 발견한)한다. 모래폭풍으로 사막에서 발이 묶인다.

    

“바람에 대한 얘기를 해줄게요”   

“모로코 남부에서는 아제지Aajej란 회오리바람이 있는데 펠라힌 사람들은 그 바람을 칼로 막죠. 튀니스에는 기블리Ghibli란 바람이 있죠. 그 바람은 구르고 또 굴러서 고약한 바람이 된다더군요. 그리고 하르마탄Harmattan이라는 붉은 바람은 뱃사람들이 암흑의 바다라 불렀죠. 바람에 불어오는 붉은 모래가 영국 남해안까지 날아가 어찌나 심하게 쏟아지는지 피처럼 보였대요.”

“거짓말, 영국 남부 해안에 집이 있는데 피처럼 쏟아지는 바람을 본 적이 없어요.”

“헤로도토스 당신 친구가 그렇게 썼어요”

“내 친구요?”

“당신 친구가”

사이뭄Simoom이란 바람이 있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악마로 여겨 전쟁을 선포하고 출정했대요. 갑옷을 입고서, 칼을 높이 쳐들고.”   

  

탐험대가 동굴탐사에 성공하고 모래폭풍으로 차 안에 갇혔을 때 나눈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이처럼 속삭이듯이 재미있게 해주는 남자가 있다니, 아니 이야기를 해준 알마시보다 이런 글을 쓴 헤로도토스가 더 멋있게 보이지 않나,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생각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매우 두꺼워서 이것만 읽고 있을 수가 없어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보는 책이다. 완독 하지 않았으니 이 부분이 어디쯤에서 나오는지 아직은(곧 찾아내겠지만) 알 수가 없다. 극 중에서 알마시가 말하니 더욱 로맨틱해 보일 수도 있다.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이어주는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다시 보아도 더 좋은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 회상 3

불안한 사랑은 갈등을 유발한다. 캐서린은 알마시에게 이별을 이야기하지만 알마시는 캐더린에 대한 생각에 힘든 시간을 겪는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에서의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친구 매독스는 먼저 영국으로 돌아가고 알마시도 철수하기 위해 사막에서 제프리를 기다린다. 알마시가 제프리의 비행기를 발견한 순간 제프리의 비행기는 쏜살같이 알마시를 향해 오고 있었다. 평소 제프리의 험한 비행을 봐 왔던 터라 설마 한 순간 제프리의 비행기는 알마시를 덮쳤다. 제프리는 즉사하고 타고 있던 캐더린은 움직일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 알마시와 캐더린의 사랑을 이미 알고 있는 제프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은 물론 캐더린과 알마시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극적으로 피해 살아난 알마시는 오열하며 그들이 탐사했던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로 데리고 간다.


죽어가는 캐더린을 안고 오열하는 알마시, 촬영지는 튀니지 미데스 협곡이다.
죽어가는 그녀를 안고 동굴로 향하는 두 사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물과 음식, 랜턴과 책을 두고 간다. 3일 동안 걸어가 3시간 만에 차로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3일을 걸어서 간 영국군 주둔지에서는 그를 독일 스파이로 생각하고 기차에 실어 이송한다. 기차에서 탈출한 그는 독일군에게 탐험지도를 넘기고 매독스가 쿠프라 오아시스에 남기고 간 영국비행기에 독일군에게 얻은 연료를 넣어 캐더린의 동굴로 돌아온다.  

 

이미 죽은 캐더린 옆에는 그를 기다리며 써 놓은 편지가 헤로도토스의 책과 함께 놓여있었다.      

알마시가 보여준 소유와 집착의 사랑과, 존재 자체의 사랑을 보여준 캐더린, 사막에서 시작된 사랑의 절절함은 바람의 궁전인 주황빛 사막 속에 묻어버렸다.  

부감으로 촬영한 알마시와 캐더린의 아름다운 마지막 비행은 영화의 첫 장면과 연결된다.

 

동굴, 이미 죽은 캐더린

 

    

무슨 곡이에요? “헝가리안 민요예요” 무슨 뜻이죠?  “제렐렘szerelem, 사랑이죠”

 “한 헝가리안 백작이 있는데 그는 방랑자였고 바보였소. 몇 년간 뭔가를 찾아서 헤매고 다니다가 신비한 영국 여인과 사랑에 빠져 버렸지”        

   


영화의 재발견, 두 가지     

영화의 인트로에는 아잔처럼 울려 퍼지는 음악과 한 몸처럼, 바위에 붉은색의 채색안료로 수영을 하는 사람을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서예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벽화 안의 고대인들은 춤을 추는 것처럼 헤엄을 친다. 영화의 내용에도 동굴 벽화인 '헤엄치는 사람들'을 캐더린이 그리는 장면이 슬쩍 지나가며 그녀의 그림은 알마시와 그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그림은 알마시가 죽을 때까지 그의 분신 같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책 안에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2시간 40분의 긴 영화가 끝나는 엔딩장면의 끝에는 ‘이 영화는 다수의 인물은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었으며 영화에 등장하는 사막이나 동굴도 실존하는 곳’이라는 내용이 올라간다.

두 번이나 본 영화에서 엔딩장면의 내용은 2016년 가을 재개봉할 때 넣은 내용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게는 강력한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인트로 장면도 잡아내지 못했다. 좋은 영화는 여러 번 보는 묘미가 여기에 있다.  

    

붉은색의 벽화는 리비아와 가까운 이집트 사하라의 길프 케비르 고원의 동굴에서 발견한 암벽화이다. 붉은색은 산화철이 많이 포함된 사하라에서 구하기 쉬운 안료다. 서있는 사람도 있지만 수영하는 사람을 묘사한 암벽화는 이 부근이 고대인들이 살았을 때는 바다였거나 바다가 가까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사하라는 원래 큰 바다였으므로.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베두윈족이 접근하기를 꺼렸던 이 동굴은 1933년 10월 실제로 헝가리 사람 라즐로 알마시가 발견했다. 알마시는 헝가리 사막 탐험가로 극 중 이름과 같은 라즐로 알마시 백작(1895~1951)의 모델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으로 복무했던 파일럿이며 사막을 탐험하던 경험으로 사막에 적합한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1930년 초 길프 케비르 고원의 정상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여 Zerzura Oasis라고 이름을 붙였다. 길프 케비르는 이집트 사하라 사막으로 리비아와의 접경 지역이다. 그는 동굴을 답사하고 지도를 그렸으며 동굴 안의 그림도 복사했다.


몇몇을 제외하고 19세기와 20세기 탐험가들이 대부분 식민제국을 이루려는 욕망을 가진 정부의 앞잡이였다고 말하는 것은 피해의식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 막대한 탐험비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탐욕과 탐험은 양날의 칼이다. 영화 때문인가, 순수하게 사막을 즐기며 사랑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행보에는 의심의 눈초리가 안 생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CASABLANC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