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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an 05. 2023

CASABLANCA

“운명이 작업을 시작했군.”


<프롤로그>

마지막으로 카사블랑카를 본 것은 카사블랑카에서 알제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영화 한 편 보고 나면 닿을 거리다. 비행기 운행 소음으로 이어폰을 해도 잘 들리지는 않지만 여러 번 대충 지나가면서 본 영화는 대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흑백으로 나오는 두 사람의 매끈한 얼굴만 나와도 신이 났다. 촬영장소는 아니지만 카사블랑카는 영화의 시간적 배경과 지리적 도시이름을 차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영화로 인해 확대생산된 긍정적인 이미지는 말할 수없이 크다. 카사블랑카에 가면 릭의 카페가 영화 매니아들을 지금도 끌어모은다.

아무리 고전이지만 신선하기는커녕 진부한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리마스터한 영화를 재개봉했다고 한다. OTT 채널을 들어가 보니 포스터까지 새롭다. 그러나 영화의 개요에는 ‘중동에 위치한 모로코’라고 쓰여있다. 이런 어이없는 설명이 있을까, 모로코는 중동의 서쪽인 마그레브 지역이며 북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 대한민국을 인도차이나에 있다고 하는 격이다.  


리마스터한 영화는 1942년 개봉한 영화처럼 화면을 꽉 채운 아프리카 지도와 살짝 거친 음악이 짜잔~, 하면서 무대가 열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영상은 흑백임에도 선명하여 몰입도를 높인다. 카사블랑카를 처음 봤을 때가 언제인지 모를 만큼 고전이지만 글을 쓰기 위해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다시 보니 무심코 지나갔던 장면들이 새롭게 부각된다. 깨끗해진 화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슬러 올라온 나이에서 느끼는 감동은 또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예전에는 안 들렸던 대사들이 목걸이에 꿰인 보석처럼 잘 들린다. 강해 보이지만 상처를 많이 받아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는 ‘릭’으로 분한 험프리 보가트는 극 중에서 여자는 물론, 남자라도 매료될 만큼 섬세하고 쿨한 매력을 발산한다. 연극무대의 연기처럼 다소 과장되어 보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기는 그녀 외에 다른 배우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작 카사블랑카라는 지리적 시대적 배경은 그 시절에 찍은 영화들이 그렇듯이 여러 개의 무대로 꾸며진 스튜디오처럼 보였다. 카사블랑카는 많은 돈을 투자한 것도, 당시 유행하던 필름 누아르도 아니다. 전쟁과 사랑, 그리고 이별과 재회라는 전형적이고 뻔한 판에 박힌 영화의 공식만을 이용하여 만든 영화가 80여 년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리마스터한 영화는 먼지를 말끔하게 털어냈을 뿐 아니라 매끈하게 다듬어 흠을 찾을 수 없는 공예품을 보는 느낌이다.




<영화의 배경>

이 영화는 당시의 상황과 시간적 배경을 알고 나면 훨씬 재미있어진다. 위태로운 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6월 13일은 독일이 프랑스로 진군하여 5주 만에 파리를 점령한 날이다. 영화에서 그날은 두 연인이 운명적으로 헤어진 날이다. 약 4주 후 7월 11일에 독일은 그들의 괴뢰정권인 비시Vichy프랑스 정부(필리프 페탱을 원수로 한)를 세웠으며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1944년 9월까지 존재했다. 비시정부는 프랑스 남쪽 오베르뉴지방의 비시Vichy를 임시수도로 정하였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영국에 꾸려졌다. 비시정부는 그나마 독일에 대한 협력은 소극적인 편이어서 덕분에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비시정부의 태도는 독일의 분노를 불러와 비시정부의 임시수도가 있는 남부 프랑스에 보복을 가하고 모든 권한을 빼앗았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유럽은 개죽음을 피해 멀리 떨어진 미국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유일한 희망의 땅인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리스본이 유일한 통로였다. 출국비자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비시정부의 행정이 미치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였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마르세이유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알제리 오랑에 도착한다. 오랑에서 출국비자를 구할 수 있는 카사블랑카로 가기 위해 열차나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또는 걸어서 이동한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비시프랑스 정부의 세력권이었다. 즉 독일군이 강압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비시정부에 압박을 가할 수는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보장된 자유는 아니지만 숨통을 틔울 수 있는 비시정부 프랑스령인 북아프리카로 프랑스인을 비롯한 유럽 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고 비자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대부분 끝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비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비시정부와 연결된 거간꾼들은 돈이 많은 고객을 상대로 활개를 치던 시기였다. 출국비자를 얻을 수 있는 카사블랑카는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다음 영화에서 캡처/위의 이미지 포함


# Rick’s Cafe Americain

 떠들썩한 카사블랑카에 있는 릭의 카페의 모습이다. 모로코 스타일의 흰색 아치와 기둥으로 꾸며진 내부에는 비자를 얻으려는 사람과 배를 타고 밀항하려는 사람과 거간꾼들이 얽혀있다.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부호들이 와서 돈자랑을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 다이아몬드는 한낱 돌덩어리에 불과하며 현금이 최고인 곳이다. 요주의 인물을 살피기 위해 독일군도, 비시정부의 경찰도 들락거리는 것은 물론이다.  

비시 프랑스 정부의 르노 서장은 독일군과 거간꾼, 난민과 레지스탕스를 아우르며 한몫 단단히 챙길 줄 하는 비시정부의 공무원이다. 릭에게 반 나치 인사인 빅터 라즐로가 출국비자 두 개를 구하기 위해 나타날 거라는 귀띔을 한다. 독일군 소령이 나타나고 릭을 주목하고 있는 독일군 소령의 질문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릭의 카페, 릭과 연주자 샘/ 다음영화에서 캡처


# 재회

릭의 카페에 빅터 라즐로엘사가 등장한다. 피아노 연주를 하던 샘이 알아본다. 샘을 알아본 엘사는 옛 노래를 주문한다. “Play it, Sam. Play "As Time Goes By” 영화를 관통하며 흐르는 "As Time Goes By”는 이들의 사랑을 상징한다. 듣고 싶지 않은 음악을 듣고 사무실에서 나온 릭과 엘사의 눈이 마주친다.

“난 독일군이 회색 옷과 당신의 파란 옷도 기억하오.”릭은 독일군이 파리에 진주한 날, 두 사람이 헤어진 날을 색으로 기억한다. 상처를 입은 냉소적인 릭에게 회색은 ‘암울’이었으며, 파란색은 그녀의 냉정과 차가움이다.

      

# 회상

재회한 후 엘사에게 냉소를 보였던 릭은 빅터 라즐로와 엘사가 나간 텅 빈 바에서 술을 마시며 ‘As Time Goes By.’를 샘에게 연주해 달라고 한다. 그녀와 파리에서 듣던 노래였던 곡은 엘사와 헤어진 후 샘에게 연주를 못하게 했었다.  

음악과 술에 기대 릭은 엘사와 매일 만났던 파리에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을 회상한다. 릭은 사랑하는 엘사를 바라보며 “Here’s looking at you kid”라고 말한다.‘이렇게 너를 보고 있잖아’를 의미하는 말을 한국에서는 번역이 아닌 창작으로 유명해졌다. “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멋있지만 이 말을 하면서 사랑을 속삭이지는 못할 것 같다. 이 말은 “사랑해”의 릭 버전이다.

파리의 릭의 가게에서 샘의 노래 ‘As Time Goes By’가 흐른다. 릭은 엘사에게 “Here’s looking at you kid”라고 속삭인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밖에서는 대포소리가 들리고, 거리에서는 게슈타포가 내일 파리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파리를 떠나야 하는 두 사람은 마르세유행 기차를 타기 위해 4시 45분에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파리에서 반 나치운동 지원했던 릭은 파리를 꼭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비가 내리는 파리 역, 피난 가는 사람들의 행렬, 릭에게 엘사의 이별 편지가 전달된다.   


# 애증과 갈등

릭은‘비 오는 역에서 멍청한 남자의 진심을 내동댕이 친 이유’를 엘사에게 다그친다. “누구 때문에 날 버린 거지?, 라즐로였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

“시련을 견딜 수 없어 떠났소? 항상 도망 다녀야 하니까. 난 이젠 정착했소. 술집 위층에 있을 뿐이지만, 당신을 기다리겠소.” 다시 만난 사랑에 괴로워하는 릭은 엘사를 증오하고 애걸한다.   

        

# 여전히 사랑

라즐로와 엘사가 들어와 샘과 가까운 자리에 앉으면서 샘에게 ‘As Time Goes By’를 청한다. 노래는 엘사의 마음을 대변한다.  

엘사는 릭에게 빅터 라즐로의 통행증을 달라고 한다. 왜 결혼한 것을 숨겼냐는 릭의 질문에 엘사는 나치가 찾는 거물인 빅터 라즐로와의 이야기를 한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도 빅터 라즐로의 결혼을 숨길 정도로 정체를 숨겨야 했다. 동지들까지 모두 위험해지므로 “그가 살아 있다는 건 언제 알았소?”“우리가 파리를 떠나기 직전 친구가 찾아와서 전해 줬어요. 파리 근교에 숨어 있으며 날 필요로 했어요.”

총알처럼 쏟아내는 릭의 질문에 “난 이제 저항할 수 없어요. 당신을 사랑해요”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의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잉그리드 버그만/  다음영화에서 캡처


# 이제는 이별

“운명이 작업을 시작했군.”

서로 사랑하지만 라즐로와 엘사를 떠나보내기로 마음을 굳힌 릭은, 르노 서장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을 비행기를 태운다.

안개가 자욱한 공항의 비행기 앞에서 눈물 흘리며 “우리 관계는요”라고 묻는 엘사를 바라보며 “파리의 추억으로 남겠지.”이렇게 내가 보고 있잖아 “Here’s looking at you kid.”라며 위로한다. 영화 속에서 4번 등장하는 릭이 엘사를 바라보며 하는 사랑의 밀어이다. 마지막 대사는 떠밀리듯 비행기를 탄 엘사의 폭풍오열을 상상하게 만든다. 보는 이도 울컥하는 마지막 이별대사다.


르노 대위는 비시프랑스 정부를 은유하는 비시 와인병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공항에서에 릭, 르노서장의 도움으로 두 사람을 떠나 보낸다./  다음영화에서 캡처


<에필로그>

영화는 릭(Humphrey Bogart)과 엘사 런드(Ingrid Bergman)를 큰 기둥으로 하여 세 개(카페 연주자인 샘(Dooley Wilson)과 엘사의 남편 빅터 라즐로(Paul Henreid), 카사블랑카의 르노서장(Claude Rains))의 작은 기둥, 즉 크고 작은 다섯 개의 기둥이 카사블랑카라는 공간 위에 서 있는 그림이다.

음악은 영화에서-샘의 연주와 여자 가수 등의 연주-장면을 전환시키는 장치이며 특히 샘이 부르는 ‘As Time Goes By’는 두 사람의 사랑이 현실이 될 때 연주된다.

“운명이 작업을 시작했군.” 릭이 빅터 라즐로와 엘사를 떠나보내기로 결심을 굳힌 듯한 느낌의 혼잣말이다. 다시 만난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대사다.



And when two lovers woo

They still say ‘I love you’

On that you can rely

No matter what the future brings

As time goes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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