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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n 06. 2018

Seven Years in Tibet

중세의 요새처럼 우뚝 솟은 곳, 가장 높고 가장 고립된 나라

 티베트에서의 7년 


영화는 1997년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감독 작품이다. 오스트리아 등반가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저서인 Seven Years in Tibet를 영상에 담았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만을 기록한 간결한 그의 글은 청량한 고원의 풍광과 풍속, 문명까지 그리며 결코 시선을 쉽게 거둘 수 없게 만든다.  


브래드 피트Brad Pitt

 

많은 이들의 연인, 브래드 피트Brad Pitt는 주인공 하인리히 하러 역으로 분했다. 제작한 지 20년도 넘은 작품이니 촬영 당시 브래드 피트의 나이가 30대 중반이다. 당시 3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주인공 하인리히 하러의 연령대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어떤 영화보다 사실에 입각한 다큐적인 요소를 지닌 진지한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는 육체적으로는 강인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유롭고 판단이 빠르며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하러의 역할에 충실하게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있는 그대로의 티베트를 사랑하는 하러를 통해서 티베트를 바라보는 나처럼, 촬영을 하는 동안 브래드 피트 자신도 모르게 티베트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덧붙인다면, 지금도 여전히 멋진 중년이지만, 브래드 피트의 아름다운 시절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개봉 즈음에 오직 브래드 피트를 보려고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당시에는 너무 진지할 수밖에 없는 많은 요소들이 황량함과 이국적인 풍광임에도 흥미를 못 느꼈다. 근래 티베트 고원을 한두  번 다녀오니 자연스럽게 티베트에 관심이 생기면서 최근 들어 두 번, 책을 읽듯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적 기술과 효과가 자제된, 실제 사실과 관련된 스토리를 왜곡시키지 않고 서사적인 소재를 배경으로, 풍부한 티베트의 풍속과 문화를 놓치지 않았으며, 변화를 담담하게 수용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마무리시킨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커 보였다. 그의 작품 중에 ‘연인’을 좋아했는데 두 작품 모두 아시아가 배경이다.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와 히틀러Adolf Hitler

   

이 영화의 원 저자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1912~2006)는 오스트리아의 등반가이다. 1938년 독일 팀과 함께 아이거 북벽을 처음으로 등정했으며(1938년 3월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단결을 이유로 오스트리아를 침략해 나치 정권을 세우고 병합했다), 1939년 독일 낭가파르바트 등반팀에 합류하지만, 등반 중인 그해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독일의 폴란드 침공)로 적국인 영국군의 포로가 된다. 1944년, 여러 번의 탈출 끝에 약 2,000킬로미터를 걸어서 티베트에 도착, 라싸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만난다. 중국의 침략으로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정치선동을 위해 미디어를 잘 이용했던 히틀러는 올림픽과 영화를 이용해 나치 정부를 선전하였으며, 이를 위해 스포츠와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죽음을 물리치고 등반에 성공한 독일 청년이 정상에 독일 국기를 꽂는 것이야말로, 독일 나치 정부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세계 정복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하인리히 하러는 많은 이들이 도전했지만 1930년대 초반까지 누구도 등정하지 못했던 아이거Eiger(3,970m) 북벽을 최초를 올랐다. 독일인이라면 이미 영웅이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인이다. 1938년 7월 24일 4명으로 이루어진 하인리히 하러가 포함된 독일 오스트리아 연합 등반대는 처음으로 아이거 북벽 등반에 성공했다. 독일 정부는 죽음을 이겨낸 독일 등반대원들을 영웅화했으며 그들이 산 정상에 꽂은 깃발은 강한 독일이었으며 세계 정복의 상징이었다. 국가를 위한 희생과 영웅이 필요한 시대, 나치 정부는 알프스를 넘어 8,000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정복이 필요했다. 그것도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낭가파르바트Naga Parbat!   

 

낭가파르바트는 히말라야 서쪽 끝자락, 파키스탄에 위치하는 봉우리로 셰르파들이 악마의 산, 죽음의 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1990년 이전까지 등반가들의 사망률이 77퍼센트에 달하는 곳이라고 한다. 독일인들이 ‘우리산’이라고 부르는 낭가바르파트의 4500m 수직 절벽을 정복하려는 시도는, 1895년 영국 등반가가 첫 시도를 한 후, 1932년부터 독일 정부를 중심으로 꾸준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인리히 하러가 참여한 1939년 등정까지 5차례 실패했으며 많은 등반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인리히는 이 등반에서 네팔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포로가 된다.   


영화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하인리히 하러가 대원들과 낭가파르바트 정상 직 눈사태로 하산하면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 머나먼 티베트의 성도 라싸까지 가는 여정으로 대체로 하인리히 하러의 기록에 있는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일종의 로드무비이다. 두 번째 부분은 하러의 글에는 라싸의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계절의 변화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풍속 문화 등에 흥미를 갖고 다채롭게 표현했지만 영화에서는 하인리히 하러와 달라이 라마 14세와의 만남을 주로 그렸다. 이 부분은 저자의 스토리에 감독의 연출방향과 창의성이 구현된 곳이다.  

   

#01 오스트리아에서 티베트까지 


하인리히 하러는 기차역으로 배웅 나온 임신한 아내 잉그리드와 친구 호스트를 뒤로하고 인도로 출발한다. 곧 아이는 태어날 것이지만, 하인리히의 관심사는 극한적인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를 즐기며 누구도 오르지 못한 산을 정복하는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한 그는 오스트리아인이지만 독일 나치 정부의 후원으로 아이거 북벽 등정에도 성공했다. 전쟁이나 정치에 관심은 없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나치당원이 되었으며 아이거 북벽보다 더 사나울 수 있는 낭가파르바트 봉을 정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치 정부의 목적과 하인리히의 욕망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기차역에서 잉그리드와 어긋나는 하인리히, 둘의 인연은 여기까지
목적지 낭가파르바트


등반대는 1939년 7월 29일 해발 6800m 제4캠프 라키오 빙하 밑 가파른 얼음폭포, “애는 벌써 한 달쯤 되었겠지” 가슴 깊은 곳에서 토해내듯이 나오는 독백이다. 4 캠프를 지나 무사히 8월 4일에는 5 캠프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정상을 앞에 두고 눈사태로 등반대는 철수를 결정한다. 미련을 못 버리고 저만치 뒤처져 철수하는 하인리히 하러에게 기다리던 셰르파는 어린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건네준다. 하러와 달라이 라마와의 인연은 이미 1939년부터 시작된다.  

   

정상을 앞두고 철수하는 등반대원들
1939년에 라싸에 와서 1940년 2월 대관식을 올린다. 대관식때 받은 선물, 어린 소년 달라이 라마의 오르골
철수하는 길에 건네받은 어린 달라이 라마의 사진, 티베트인들에게는 부적이다.


베이스캠프로 철수한 하러와 등반대원 일행은 영국군에게 순식간에 체포당한다. “우리 영국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소, 우린 적국이며 이곳 네팔은 현재 우리 영국령이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호송차를 타고 영국군 포로 수용소인 데라툰캠프까지


1939년 10월부터 시작된 하러의 데라툰 포로수용소 탈출은 1942년 다섯 번째 시도에서 드디어 성공한다. 같이 탈출했지만 각자 따로 행동했던 등반대원 아우프슈나이터 페터와 인도 북부에서 운명처럼 재회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조국이 아니라 티베트로 향한다. 티베트까지는 68킬로미터, 티베트를 향하면서 하러가 하는 독백은 티베트를 물리적으로 가장 잘 설명해준다.  

   

“티베트, 아시아 한가운데 중세의 요새처럼 우뚝 솟은 곳 “가장 높고 가장 고립된 나라”   

 

드디어 아름다운 티베트 국경마을, 그러나 주민들과 관리들은 이들에게 적대감을 보이며 외국인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마을의 행정관은 사무소의 벽에 크게 걸려 있는 달라이 라마의 글을 읽어준다. “우리 13대 달라이 라마의 예언서요, 언젠가 우리 티베트는 외국인의 침략을 받게 될지니 미리 예방하지 않았다간 우리 모든 승려와 사원들은 외세의 지배 아래 놓일 것이며 달라이 라마까지 외국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들을 반기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오.” 애쓴 보람도 없이 두 사람은 그 즉시 쫓겨났다. 국경까지 안내인들이 40킬로미터나 기꺼이 따라왔다. 총까지 휴대한 채.    


달라이 라마의 예언서에는 영국의 침략으로 잠시 몽골로 피신했던 달라이 라마 13세의 고뇌가 담겨있다.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영국은 인도를 전진기지 삼아 1903년과 1904년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으로 중앙아시아에 신경이 약화된 틈을 타 라싸로 침입, 섭정과 강제 조약을 맺고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아름다운 티베트 고원의 풍광속으로 들어온 두 사람
국경을 넘어 처음 만난 마을
마을 행정관이 제13대 달라이라마의 예언서를 읽어준다.


국경에서 안내인을 따돌린 두 사람의 지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하인리히 하러는 아우프슈나이터 페터(David Thewlis 분)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한다. “이제 3살 반이 됐을 거요.” 낭가파르바트 등반 원정을 떠날 때 잉그리드의 뱃속에 있었던 하인리히의 아들 이야기이다. 이제야 조금씩 가까워진 두 사람이 등반을 시작한 시점에서 벌써 3년 반 가까이 지난 것이다. 아내의 임신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하인리히의 기록에는 아픈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아들 롤프의 존재가 계속 등장한다. 하인리히 하러를 지켜준 존재는 바로 얼굴도 모르는 그의 아이이다.     

보낼 수 없는 편지도 마음에 기록한다.    

 

“아들에게

우리 서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내 마음속엔 항상 네가 있구나.

하루 온종일 여긴 현대 문명과 차단된 온통 눈 덮인 산이 있는 곳, 꿈속이 아니고선 상상도 못 할 그런 곳이란다. 이곳 티베트 사람들은 먼 길을 걸어 성소까지 다다르면 자신들의 죄가 정화되고 힘들게 닿을수록 더 정화된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길 헤맨 햇수가 네 나이랑 같구나. 고원을 가로질러 겨울이 오면 남으로 이주하는 야생 당나귀들, 그리곤 다시 봄이 오는 들녘, 정지된 시간 속에 나 역시 변하고 내 목적지는 어디며 나도 저들처럼 정화가 될까?

후회스러운 일들도 많지만 어서 이 여정을 끝내고 너와 나 사이에 존재했던 서먹한 감정들을 걷어내고 싶구나.

사랑을 보내며 하인리히 하러가“  

  

도둑 강도 떼를 만나고 동상에 걸리고, 죽은 말고기를 잡아먹는 등 굶주림과 견딜 수 없는 추위를 극복하고 순례자들 틈에 끼어 라싸로 들어간다. 도착하자마자 포탈라궁 주변 가판대 포장지로 사용하는 신문더미에 ‘연합군 진주, 독일군 궤멸’ 했다는 제목이 보인다.  

   

연합군 진주


하인리히 하러는 라싸 입성의 감동을 이렇게 써 내려갔다.

“굶주림과 추위 도적들까지 피해 금단의 도시 라싸에 왔다.

어렵사리 오기도 했지만, 외국인은 절대 안 된다는 그 금기령이 우릴 끌어당겼다. 우린 우리 처지도 잊고 티베트의 기운을 느꼈고 달라이 라마를 느꼈다. 우리 말고 그 누가 이곳을 뚫고 들어왔던가?”  

  

20세기 초에 일어난 영국의 침략 때문인지, 티베트의 성도 라싸는 외국인의 방문이 금지된 곳이다.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1896년부터 1908년에 걸쳐 세 번이나 티베트 고원을 오갔던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1865~1952)조차도 성도 라싸에는 결코 들어가지 못했다.    

 

#02 라싸

     

티베트 정부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던 차롱(Mako 분)의 배려로 섭정의 허락을 받아 라싸에 머무를 수 있게 된 하인리히 하러와 아우프슈나이터 페터는 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젊은 정부 비서관 나왕(B.D.wong 분)은 이들에게 호감을 보이며 양복을 선물한다. 라싸에서 유일하게 양복을 만들 수 있는 재단사 페마를 만나면서 점차 라싸의 생활에 적응해간다. 페마가 원하는 스타일을 물으니 하러는 당시 유행하던 바지통은 넓은, 울로 만든 따뜻한 트위드 양복을 주문한다. 아마도 트렌디한 감독 장 자크 아노의 기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화가 통하는 매력적인 페마에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와, 아이거 북벽을 올랐을 때의 사진들을 보여주니 페마는 라마(스승) 같은 대답으로 응수한다. 두 사람과 페마와의 만남은 건조할 수 있는 서사적인 스토리에 사랑스럽고 인간적인 재미를 만들어준 장면이다. 감독은 페마의 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산을 오르는 건 바보나 하죠! 이런 걸 보면 우리 두 나라의 인식이 얼마나 다른가 알 수 있죠, 당신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하고 우린 그런 자아를 버리려고 하니까요, 그게 바로 이 나라 사람들의 보편적 사고죠”   

 

페마에게 자신의 스크랩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하인리히 하러, 그녀의 입에서는 선답이 나온다.


하러는 매력적인 페마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이지만 페마는 말없이 표현하는 은근한 매력의 아우프슈나이터 페터와 사랑에 빠진다. 스케이트장에서 페터와 페마가 스케이트를 타는 동안 허탈한 하러는 승려 한 분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쳐준다. 포탈라궁에서 망원경으로 스케이트장의 하러를 포착한 달라이 라마,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이 라마는 하인리히 하러와 망원경 안에서 조우한 것이다.


실제로 하루의 대부분을 공부를 하거나 기도하면서 보냈고 자유시간이 적은 달라이 라마는 수업이 끝나면 선물로 받은 망원경으로 포탈라궁의 옥상에서 신하들과 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취미였으며 교도소에서 누가 석방되고 구금되는지 확인하였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의 망원경에 잡힌 스케이트장, 승려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는 하인리히
하인리히와 달라이 라마의 수업, 아마도 노블링카 궁이 아닐까


두 사람은 라싸에서 도시의 지적도를 그리기도 하고, 배수관 공사도 맡는 등 라싸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하러는 달라이 라마를 접견한다. 영화를 좋아하며 다른 세계에 관심이 많은 달라이 라마의 요청에 의해 영화관을 짓기도 한다.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파면 나오는 벌레들을 옮겨 주기 위해 삽 하나에 세 사람이 붙어 일을 하는 인부들에게서 경외심마저 느낀다.

“우린 산 생물체는 뭐든 전생의 어머니라고 생각해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믿음이죠.” 

소년 달라이 라마의 말은 티베트의 민중이며 곧 티베트이다. 달라이 라마는 하인리히 하러에게서 서양의 문물과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베이징의 당 간부회의에서 마오쩌뚱이 선출되었으며 마오의 첫 번째 임무는 구 영토 회복에 두고 있으며 티베트가 옛 중국의 신성한 땅이라며 합병을 천명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티베트 정부는 중국 공사 전원을 나라 밖으로 추방한다.

이어 중국군은 달라이 라마의 고향 암도를 침략, 마을과 사원을 불태우고 승려들까지 죽인다.     

티베트 정부는 무기를 정비하고 침략에 대비하지만 백만 대군을 가지고 있는 중국군을 생각하면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인리히는 전쟁의 공포에 떠는 힘없는 타자를 보면서 전쟁 속에 있었던 예전의 과거를 술회한다.  

“티베트인들이 모여 놀던 넓은 땅이 중국 장성 3명을 맞기 위한 비행기 활주로로 변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이들의 볼품없는 군대가 기동연습을 하고 있다. 털도 없는 군복을 걸친 채, “평화의 상징이던 이 나라가 헛되이 전쟁에 몰두하다니, 내 순박한 친구 차롱의 얼굴에도 전쟁의 두려움이 깊이 배어 있다. 언젠가 내 조국에도 울려 퍼졌던 그 공허한 메아리, 뼈아픈 과거였다. 신념을 좇아 한 때 당원 활동을 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포악한 중국과 하나 다를 게 없다.”    


포탈라 궁으로 안내된 중국 장군 3명은 며칠 동안 만들어놓은 만다라를 짓밟고 소년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 “말씀에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큰 힘이 생명에 있다 했죠. 이를 생각하면 누구도 살생할 수 없죠. 여러분이 명심하실 건 그게 우리 국민의 본성이란 겁니다. 폭력을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나약한 국민이라 오해는 하지 마시길.” 암도를 침략한 중국을 나무란 것이다. 달라이 라마를 뒤로하고 중국 장성의 입에서는 “종교는 아편이야”라는 마오쩌뚱의 어록이 튀어나온다.

이 말은 18세기 사드나 노발리스 등의 작품에서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으며 19세기 마르크스가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마오쩌뚱이 사용했다.    

 

며칠 동안 공들여 만든 만다라, 짓밟고 지나가는 중국장성들
중국장군 3명이 떠난 후,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라싸주민들의 집을 가리키면서 기도하는 달라이 라마


하인리히는 산에 대한 열정에 대해 말하면서 달라이 라마에 대한 애정도 드러낼 만큼 둘 사이는 돈독해졌다.

 “절대적 순수 그게 좋다고 할까요?, 산을 타면 마음이 맑아지고 혼란스러운 생각이 없어지고 집중이 돼요. 그러다가 갑자기 빛이 강렬해지고 절대적인 소리를 느끼면 마음속은 깊고 강한 존재로 가득 차죠. 그런 걸 느낀 때가 또 한 번 있죠. 당신 앞에서”    



8만의 중국군이 창진우 장군의 지휘 하에 덴코 국경을 침공하자, 티베트 군은 11일 만에 항복하고 만다. 라싸까지의 침략은 불 보듯 뻔하다. 전 세계가 한국전쟁에 매달렸던 1950년 10월 중국군은 티베트에 전면 침공을 개시했다.        

오르골에서 연주되는 드뷔시의 월광곡을 들으며 달라이 라마와 하인리히의 우려는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다가오는 위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위험한 라싸를 떠나야한다며 걱정하는 하인리히를 향한 말이지만 달라이 라마 자신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기도 한다.  

“옛말에 해결된 문제라면 걱정이 없고, 해결 못한 문제는 걱정을 말라했소, 그러니 걱정 말아요.”  

   

이별을 앞에 두고 한 나라의 왕이 된 14대 쿤둔은 사랑하는 스승이며 아버지였으며 친구였던 하인리히에게 흰색 하닥을 목에 걸어주며 이별의 축복을 해준다.     

“어딜 가더라도 행복이 따르며 무슨 일을 하건 쉬이 풀리기를 빌며,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결합하길”    


포탈라궁 옥상에서,이별을 축복하기 위해 하닥을 준비한 달라이 라마
하인리히를 축복하는 14대 달라이 라마


성년을 맞은 14대 달라이 라마와 오랜 시간을 같이 한, 드뷔시의 월광곡을 연주했던 오르골은 떠나는 하인리히 하러의 손에 쥐어진다. 오르골은 달라이 라마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오스트리아로 건너간 그것은 하인리히 하러의 아들 롤프의 한 시절과 같이할 것이다.    


  

하인리히는 1951년 3월 티베트를 떠났다. 1939년에 조국을 떠났으니 10년도 더 지난 시간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아우프슈나이터 페터와 동경하던 티베트 땅을 밟은 지 거의 7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친구 아우프슈나이터 페터는 가능한 한 티베트의 키롱에서 머물며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 나왔다고 한다. 하인리히는 고락을 같이 했으며 13년 동안을 아시아에서 보낸 그의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티베트와의 이별이 나보다 더 가슴 아프게 느껴졌던 것 같다. 히말라야와 금단의 도시를 그만큼 철저하게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하인리히가 떠난 후의 라싸의 포탈라궁 주변풍경


영화의 엔딩 자막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친다.

“중국 점령 시 백만의 티베트인이 죽었고 6,000여 곳의 사원이 파괴되었다. 1959년, 인도로 피신한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의 해결책을 찾고 있다. 1989년 노벨상을 수상한 후 하인리히 하러와는 아직도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친구 하인리히 하러는 2006년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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