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잭슨 'Stranger in Moscow'
-정박사가 노어를 어찌나 잘하는지!
학과장의 말에 유영은 아랫입술 속 점막을 지긋이 깨물었다. 억울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나름의 진화를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방에겐 입술을 깨문 모습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 속으로 억울함을 삼키는 법, 지독한 약자의 생존방식.
3월, 봄의 문턱에 들어선 모스크바는 여전히 춥고 서늘했다.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을 벗어나자 용을 물리치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모습을 담은 붉은 모스크바의 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국비 유학생으로 6년 전 처음 이곳을 들어섰을 때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 달랐다.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을 물리쳐 여인을 구하듯, 러시아 유학은 암흑 같은 한국에 갖힌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원받은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성 게오르기우스와의 다음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홀로 잘 살아갔겠지. 여인의 무탈한 이야기에 이런 설화들은 관심이 없는 법이니까.
-정말 열심히 했나봐. 통번역을 그렇게 잘하고.
학과장은 덧붙였다. 무탈하고 착실한 결과가 학과장 앞에서 이렇게 난처해져야 할 일인가. 점막에 피가 맺히도록 꽉 깨물고 있던 턱에서 힘을 뺐다. 말을 하려다 맑 유영은 입을 다물었다. 학회 내내 두루뭉술하게 웃으며 그녀의 옆에서 땀을 흘리고 있던 그였다. 학회장을 벗어나자 피곤에 지친 얼굴이 되어 이중으로 접힌 턱에 힘을 주었다. 차는 한국 대기업의 로고가 큼직하게 그려진 호텔 주차장을 벗어났다. 이국적인 풍경 안에 붉은 기업 로고가 이질적으로 겉돌았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평균의 맛으로 희석시키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시큼하고 묵직한 흑빵과 채소로 만든 만두 느낌의 피로시키, 비트가 든 보르시치 수프같은 현지음식도 한국의 대기업을 거치면 편의점 맛이 났다.
세미나와 학회 일정에 지친 탓인지 학과장은 오후 자유시간을 숙소에서 쉬겠다고 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 공항에 가야 했다. 유영은 오후엔 시내를 둘러보고 올 생각이었다.
“그래, 자넨 러시아어를 잘 하니까.”
생각이란건 조금도 없이 그저 입끝에서 흘러나온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통번역을 엉망으로 해버릴걸 그랬다. 아무말이나 내뱉을 수 있는 학과장 앞에서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더 깊이 삭이고 창밖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아래 대기가 묵직해 보였다.
아라바트 거리로 나와 지하철을 타고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이 풍경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 뒤편에 웅크리고 있을 기숙사가 떠올랐다. 오후 5시가 넘으면 치안 문제로 외출이나 산책을 할 수가 없었다. 일과를 마친 유영은 좁은 방안에서 간단한 요가를 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눈 앞에 보이는 벽지의 얼룩은 거꾸로 봐도 그저 다른 모양의 얼룩일 뿐이었다. 모스크바에서나 서울에서나 자신은 그저 벽지의 얼룩같은 존재였다. 거꾸로 서서 머리를 비우고 눈앞의 얼룩에 집중했다. 작은 달걀만한 얼룩은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 그저 벽면 장식처럼 느껴졌다. 모스크바의 불안한 학생에서 서울의 불안정한 시간강사로 자리바꿈하며 유영은 가끔 그 얼룩을 생각했다. 벽면 가운데 분명히 있지만 익숙해져 존재감이 사라진 얼룩. 벽지와 같은 속도로 빛에 바래버리겠지만 얼룩은 어쩔 수 없는 얼룩으로 남을 것이다.
관광객이 북적대는 아바라트 거리엔 기념품샵이 많았다. 쇼윈도에 진열된 마드료시카 인형은 러시아 전통 문양에서 유명한 인물, 연예인, 그리고 낯익은 한국 아이돌까지 다양했다. 그 안을 점점 작아지는 인형안의 인형들은 아무리 작아져도 그 안은 비어있다. 사는 일은 그 안을 채우기 위한 발버둥일지 모른다.
“오늘 저녁은 힘들 것 같아. 과외 시간을 옮길 수가 없어.”
아직 러시아에 있는 동기 기하의 문자였다. 한인자녀들을 대상으로 과외를 하고 있는 그의 논문 작업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국비유학생이었지만 물가가 비싼 모스크바에선 경제적인 문제가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두려움이 무엇인지 유영은 알고 있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안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는 이들이 적은 이곳에서 자신의 시간을 유예하고 싶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볼에 차가운 물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예상했던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상했고 각오해도 일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일은 언제나 당황스럽다. 점점 빠르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굴과 머리를 적시고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비의 동력으로 사람들은 거리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유영은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햇빛의 은총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준비한 우산을 펴고 스쳐가는 사람들 속을 그녀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지 않고 세찬 빗속에서 뛰지 않는 그녀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 완전히 혼자인 이방인처럼 보였다. 비를 머금으면 더 진해질 낯선 얼룩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바라트의 거리에서 얼룩처럼 서성이는 모스크바의 이방인.
Stranger in Moscow
마이클 잭슨
I was wandering in the rain
나는 빗속에서 서성이고 있었어요
Mask of life, feelin' insane
삶의 가식에 지쳐, 미치는 것 같아요.
Swift and sudden fall from grace
은총으로부터 순식간에 갑작스럽게 몰락했고
Sunny days seem far away
햇빛 비치던 나날들은 멀어져가는 것 같아요
Kremlin's shadow belittlin' me
날 하찮게 만드는 크레믈린의 그림자
Stalin's tomb won't let me be
스탈린의 무덤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을 테죠.
On and on and on it came
자꾸 이런 생각이 드네요
Wish the rain would just let me
이 비가 그냥 날 내버려두었으면....
How does it feel (How does it feel)
기분이 어때요(*3)
When you're alone
당신이 혼자일 때
And you're cold inside
당신의 내면이 차가울 때 말이에요
Here abandoned in my fame
여기 나의 명성이 버려진 채로 있고
Armageddon of the brain
머릿속에 엄청난 충돌이 있네요
KGB was doggin' me
KGB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죠
Take my name and just let me be
내 이름을 가져가고 나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둬요
Then a begger boy called my name
그 다음엔 한 거지 소년이 내 이름을 불렀죠
Happy days will drown the pain
기쁜 날들이 오면 고통은 잊혀지겠죠
On and on and on it came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And again, and again, and again...
그리고 또 다시, 또 다시, 또 다시
Take my name and just let me be
내 이름을 가져가버리고 날 좀 내버려 둬요!
How does it feel (How does it feel)
기분이 어때요(*7)
When you're alone
당신이 혼자일 때
And you're cold inside
그리고 당신의 내면이 차가울 때 말이에요
How does it feel (How does it feel)
기분이 어때요(*7)
When you're alone
당신이 혼자일 때
And you're cold inside
그리고 당신의 내면이 차가울 때 말이에요
Like stranger in Moscow
모스크바의 이방인처럼
We're talkin' danger
우린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어요(또는 우린 위험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We're talkin' danger, baby
우린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대
Like stranger in Moscow
모스크바의 이방인처럼
I'm livin' lonely
난 외롭게 살고 있어요
I'm livin' lonely, baby
난 외롭게 살고 있어요, 그대여
Stranger in Moscow
모스크바의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