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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May 15. 2020

펜듈럼 이펙트

현관에 들어서자 익숙한 노란 빛이 쏟아졌다. 타일위에 뒤꿈치가 거실을 향해 반듯하게 놓인 신발 세 켤레가 숨을 멈춘 듯 앉아 있었다. 삼선이 닳은 아내의 슬리퍼와 그의 크록스다. 움직임을 멈추자 불은 바로 꺼졌다. 정적과 어둠이 감싼 집안으로 관호는 천천히 들어서 거실의 불을 켰다. 깨끗이 정리된 주방과 거실. 티브이 리모컨과 사각 티슈까지, 말끔히 청소된 집안에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대로다. 일곱 시 삼십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 시간에 같은 집에 토착했지만 관호는 집안에 거대한 부재를 느꼈다. 바로 아내 선경이 없는 것이다.


오늘 오전, 류머티즘을 앓고 있던 어머니의 통증이 견딜 수 없이 심해졌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아닌 아내에게서였다. 정신없이 바쁘다는 그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아내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아내는 아마 통증과 불안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전화에 오전 내내 시달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마 미국에 사는 누나, 직장 생활을 하는 형수보단 아내가 편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생각에 막내 며느리는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는 프리랜서로 외주일을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동료 몇과 작업실을 얻긴 했지만 그녀는 거의 집에서 일을 했다. ‘방해하지 않는 것이 돕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관호는 집에 오면 아내의 작업도구가 있는 옷방의 문을 닫고 서재에서 게임을 세팅하고 헤드폰을 꼈다. 일이 밀려 작업하는 아내를 배려해 주말엔 야구 동호회에 나가곤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결혼 후 균형을 잘 잡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퇴근길, 저녁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사면서 텅 빈 집에서 신나게 게임할 생각에 손가락 끝이 근질거렸다. 헤드폰을 끼지 않고 사운드를 스피커에 연결할 것이다. 그러나 온기 없는 집에서 게임화면은 그저 겉돌 뿐이었고, 사운드바의 소리는 심장을 울리며 공기를 흔들었지만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도 바로 소음으로 인한 항의 인터폰이 오는 바람에 심하게 맥이 빠져 버렸다.


시간은 8시를 넘어 있었고, 그는 자신이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갑고 눅눅한 식빵이 입에 들어왔을 때 그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스물 일곱평의 아파트를 채운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아내가 있어야 했다. 그의 삶은 아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샌드위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는 소파에 놓여있는 아내의 갈색 가디건을 집었다. 집에서 늘 걸쳐입는 싸구려 합성섬유 재질의 가디건은 심하게 보풀이 일었고, 드문드문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로 바래있었다. 우울한 기분이 든 그는 가디건에 얼굴을 묻었다. 세제 냄새에 섞인 반찬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옅게 풍겼다. 물건을 깔끔하게 관리하는 아내였지만 낡아서 얇고 늘어진 니트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좀 자주 사입지 좋은 걸로. 짜증이 몰려왔지만 대기업도 아니고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그들의 형편이, 자신의 월급이 비참해졌다. 갑자기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여자가 되었다.


좋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클라이언트에게 굽신대며 마감에 맞춰 그래도 실력이 어디가나, 그녀는 ‘명작’을 납품하고 만다. 그러나 간악하고 천박한 시장의 논리에 밀려 몇 번이나 가당치도 않은 수정을 해서 보내야 한다. 가난한 예술가의 슬픈 운명이다. 그녀의 마음을 나같은 공대생이 알기나 할까. 그녀도 하고 싶은 작업이 있었을 텐데, 그걸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결혼 후 5년 내내 아내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무간지옥에라도 가야할 나쁜 놈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 아... 오늘 아내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다. 아이 문제로 아내는 오늘도 어머니에게 고통받고 있겠지. 그 순간만 조용히 넘기면 되는 거라고 아내를 다독였지만, 사실 결혼 후 집안 일은 거의 아내가 전담하고 있다. 어머니의 모든 말이 ‘명령’ 내지 ‘요구’로 들릴 것이라는 걸,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일은 알아서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한 건 그 후에 몰려올 어머니의 서러움과 욱한 정서적 토로들을 감당하기 귀찮아서였다. 사실 결혼 후 어머니를 더 자주 만나는 건 아내였는데. 이것부터가 잘못되었구나, 왜 내 부모님을 아내가.


머리가 복잡했다. 공적으론 끊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가끔 피우는 담배를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내가 그렇게 싫어하는데. ‘당신 선택이니 존중은 하지만, 함께 살아야 할 사람으로서 싫다고 말할 권리는 충분하잖아.’ 그래, 이토록 교양있는 아내였다. 이젠 정말 끊어야 할 것 같다. 아내를 속상하게 하는 것은 이 순간부터 그 무엇이든 하기 싫어 졌다.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갑자기 아내가 그의 곁을 영영 떠날지도 모르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울렁대며 눈 밑이 시큰해졌다. 눈을 세차게 비비고 라이터와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뻑뻑하고 차가운 샌드위치를 마저 먹기 위해선 따뜻한 차가 필요했다. 전기주전자에 스위치를 올렸다. 싱크대의 상하부장을 열 번 이상 뒤져 보았지만 차를 찾을 수 없었다. 성난 소리를 내며 주전자의 물이 끓어 오를 땐 그의 분노도 잠시 함께 치밀어 올랐다. 보물찾기 하듯 신경질적으로 싱크대 문을 열었다 닫은 그는 식탁위에 놓인 티백을 보고 일순간 힘이 빠졌다. 자신에게 화가 났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정갈하고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늘 해주는 것만 받아먹던 자신이 부끄럽고 아내에게 미안해졌다. 함께 일을 했지만 집에 있다는 이유로 공통 공간의 일을 모두 아내에게 미뤄왔다. 홍차 티백이 담긴 잔에 물을 부으며 그는 허전했던 마음이 훈훈해 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조금은 괜찮은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런 사소한 문제들을 되짚어 반성하는 남자들이 주변에 있던가. 적어도 그의 주위엔 없다. 뿌듯한 자부심에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혼자 저녁을 해결하며 아내를 기다리는 자신이 대견했다.


적당히 우러난 차는 맛있었다. 고요한 공간에서 혼자 차를 마시는 저녁이라니. 연두색 포장지에 금박이 둘러진 고급스런 티백의 포장지를 바라봤다. 영국 브랜드의 유명한 홍차다. 역시, 홍차는 영국산인가. 그런데 아내는 이 홍차를 언제 산거지? 선물 받은 것인가.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불꽃이 일었다. 아내의 전남친, 그러니까 그와 사귀기 전에 만난 남자가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는 것에 생각이 가 닿았다. 그 남자는 일러스트와 출판을 공부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스마트폰의 구글 화면에 그의 신상 몇 개를 입력하자 아찔할 만큼 많은 정보들이 쏟아졌다. 유명한 그림책 출판사 대표인 그는 해외 수상 기록도 다채로웠다. 인터뷰 기사 속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중후하고 여유있는 눈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언급한 글로 보아 이미 결혼도 한 듯 싶었다. 불같은 질투가 일었다. 이 홍차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는 티백 종이를 한껏 구겨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식탁 의자에 주저앉은 그의 눈에 깔끔하게 접혀 있는 뽀얀 행주가 눈에 들어왔다. 밤마다 주방을 정리하며 행주를 삶던 아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청결한 비누 냄새를 품고 솟아오르던 훈김 속에 발그레한 얼굴로 서 있던 아내. 그는 다시 부끄러워졌다. 그녀의 과거나 더듬는 자신의 모습이 자존심 상했다. 역시 함께 있어야 해. 더 잘해주고 위해주고, 더욱 사랑해서 이런 생각을 아예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소파에 놓인 아내의 가디건에 얼굴을 묻었다.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는 조악한 합성섬유는 그의 눈에서 굴러 떨어진 한방울의 눈물을 또르르 그대로 흘려보냈다. 오늘도 함께 갈걸 그랬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나 올 것이다. 아내 없이 이런 서글픈 밤을 보내야 하다니. 그는 갑자기 스카치테이프 한 장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전봇대의 광고 전단지처럼 초라하고 아슬아슬하고, 더없이 외로워졌다. 이제 무엇이든 함께 할 것이다.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그의 외로움과 비참과 반성, 그리고 고결한 결심이 고요한 집안에 뜨겁게 흐르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번호키 소리가 빠른 리듬을 타고 울려 퍼지며 현관문이 열렸다. 아내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내는 식탁에 아무렇게나 놓인 먹다만 샌드위치와 찻잔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내 앞으로 다가갔다. 아내는 짧게 고개를 젓고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괜찮으셔. 그래서 일찍 올 수 있었어. 아들 밥 굶을까 걱정되시는지 빨리 가라고 계속 등을 떠미시더라고.”

아내는 깊은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갈색 가디건을 걸치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쳐다보던 그는 시계를 한번 보고 서둘러 서재로 들어갔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헤드폰을 집어 들며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밥 줘.... 다 차리면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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