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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Oct 19. 2015

비트겐슈타인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서평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 심오하고 아름답다. 


논리철학논고는 7절로 구성되며, 마지막 7절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철학논고를 끝맺는 이 문장은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1~6절에서 논증한 명제를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논리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역할을 두 가지로 보았는데, 그중 하나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적인 명제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보여야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일컬어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일부 철학자들의 반대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논증을 ‘철학서’를 통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작업의 결과물이 <논리철학논고>의 1~6절이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7절을 ‘통째로’ 할애하여 자신의 작업을 지워 버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논고를 선언적인 명제가 아니라, 하나의 훈련 과정으로 보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절의 바로 앞을 보자.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나며 7절의 문장은 심미적인 지위마저 확보하게 된다.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출처: https://instagram.com/mooooonmi/


철학은 형이상학을 중요하게 다룬다. 형이상학은 우리가 보는 세계를 어떻게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 고대와 중세에는 이 세계를 가능하게 한 설계도를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탐구했다. 플라톤은 이데아, 중세 신학자들은 신이 그 설계도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설계도의 작성자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 오컴에 의해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인식론적 질문이 철학의 주요 논제로 등장한다. 


조중걸의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는 인식론 관점에서 풀이한 서양철학사이다. 플라톤 이래 사유된 인식론의 경향을 되짚어 비트겐슈타인에까지 이른다.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에 달린 주석이라는 말이 있던가.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에 달린 주석이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의 철학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인식론의 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철학사를 패턴으로 읽어낸다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 가능했던 시대가 있었고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 인식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대와 인식의 한계로 괴로워 한 시대가 반복된다. 시대에 따라 독단에 의해 행복하든지 경험과 사실에 의해 허무주의에 빠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난다. 이러한 패턴으로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성취다. 

플라톤은 수학적으로 완벽하고 정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상정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고 우리 세계는 천상 세계의 유비적 세계라고 주장했다. 당대의 소피스트들은 최초의 유명론자이자 실증주의자로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부정한다. 플라톤은 세계를 구축했고 소피스트들은 해체했다. 

중세에 들어서면 실재론은 더욱 견고한 총체적 세계를 구축한다. 신의 존재에 처음 의문을 제시한 철학자는 유명론자 오컴이었다. 보편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 유명론이다. 중세 철학자들은 세계를 구축했고 유명론자들은 해체했다. 

데카르트는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구축함으로써 유명론에 의해 해체된 세계에 대한 총체성을 다시 확보한다. 이러한 세계의 통합은 뉴튼의 과학적 성과에 의해 더욱 견고해 진다. 그러나 로크의 경험론은 데카르트의 통합적 세계를 다시 해체한다. 우리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경험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것이 경험론이다. 로크의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르는데, 흄의 철학은 과학적 법칙에서도 보편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에 의해 모든 형이상학적 신념이 붕괴되고, 교조적 신앙과 과학적 지식도 붕괴되었다. 

칸트는 보편적인 지식을 구원하려고 했다. 종합적 선험지식을 가정함으로써 보편적 지식이 가능해 진다고 했다. 하지만 칸트가 가정한 선험적인 인식의 틀은 에른스트 마흐와 같은 경험비판론자들에 의해 깨지고 만다.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등장한다. 다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언어가 세계를 기술한다고 했다. 우리는 언어의 새장에 갇힌 것이며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것은 오직 언어뿐이라고 했다. 우리 인식은 언어에 의해 한정된다. 그리고 언어로 표현된 세계는 경험에 의해서 '참'으로 검증될 수 있다고 봤다. 세계를 기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경험에 의해 검증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가치를 낮추어 보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형이상학, 윤리학, 신학의 명제들이 말해질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무의미하거나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행위로 '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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