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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Jul 06. 2019

인간 지성의 최후의 보루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공지능 경계의 소멸


인간은 분류기로 태어난다 [1]


인간은 개념을 만들어 세계를 나누고 분류한다. 인간과 동물, 남자와 여자, 몸과 마음, 선과 악을 나눈다. 신분을 나누고, 지역을 나누고, 인종을 나눈다. 이러한 개념들은 세계를 뚜렷이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념은 세계를 온전히 기술하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2]. 세계를 분류하려면 예외가 나타날 때마다 기준을 매만져야 한다.


분류기에 대한 믿음은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의 분류기로 세계를 재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웃라이어(outlier)를 가차 없이 잘라 낸다. 분류기를 좀처럼 수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우리는 근본주의자(자신이 믿는 바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자)라고 부르고, 그들의 분류기를 도그마(독단적인 신념, dogma)라고 한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 제도는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신분이 태생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인류를 지배해 온 도그마 중 하나다. 노예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 했다. 하물며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오죽했을까. 인간은 동물들의 지능과 감정을 거의 무시해 왔다. 인간의 눈에 다른 동물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과 4% 밖에 차이 나지 않는 DNA를 가진 동물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1837년, 런던 동물원에 ‘제니’라는 이름의 오랑우탄이 등장했다. 인류가 처음으로 구경할 수 있었던 대형 유인원(great ape) 제니는 유명세를 탔다. 제니를 처음 본 사람들은 외계인을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제니를 보고 ‘기분 나쁘게 사람같이 생겼다’고 했다.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대형 유인원을 처음 만난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180년 전의 일이다. 찰스 다윈도 1838년에 제니를 만나러 갔다. 그로부터 20년 후 진화생물학의 토대가 된 ‘종의 기원’이 출간됐다.


1960년, 제인 구달은 탄자니아의 침팬지 서식지로 들어 갔다. 제인 구달 이전의 인류는 야생 침팬지의 생태와 습성을 알지 못했다. 제인 구달이 도구를 사용하는 침팬지를 관찰하기 전에는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 인간뿐인 줄 알았다. 제인 구달 이전과 비교하면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희미해 졌다.


2007년 ‘침팬지의 숫자 기억력’이라는 논문[3]이 발표됐다. 연구팀이 수행한 실험에서 침팬지는 놀라운 작업기억(working memory) 능력을 보였다. 침팬지의 기억력이나 추리력에 대한 기대가 없던 사람들은 숫자를 순식간에 외워버리는 침팬지의 실험 동영상[4]을 보고 적잖이 놀란다. 침팬지가 자의식이 있다는 것도, 사회성이 있다는 것도, 정치를 한다는 것도,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하나같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발견이었다.


침팬지는 언어 없이도 초보적인 논리를 구사하고 합리적인 추론을 한다 [5]. 고대로부터 줄곧 인간만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추론은 독점적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은 인간이 그다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류는 오랫 동안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가정했지만,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그 가정을 허물고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공로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


1997년 5월, <뉴스위크>의 표지에 ‘The Brain’s Last Stand’라는 헤드라인이 실렸다. ‘인간 지성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IBM의 ‘딥 블루’가 체스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를 꺾은 사건을 전하는 기사였다.


하지만 19년이 지나서 보니 <뉴스위크>가 성급했다. 비유적으로라도 저 헤드라인을 써야 했다면, 훗날의 알파고를 위해 남겨 두어야 했다.


2016년 3월, 우리는 바둑이라는 복잡한 게임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인공지능을 목격했다. 180년 전 런던 동물원에서 제니로부터 받은 ‘기분 나쁜’ 느낌 이상의 충격이었다. 제니도 꽤 유명세를 탔지만, 알파고는 전 지구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알파고는 놀라운 성능을 가진 분류기다. 승률을 높이기 위해 바둑판 위에서 두어야 할 곳과 두지 말아야 할 곳을 분류한다. 바둑은 우주에 있는 원자보다 많은 경우의 수가 펼쳐 진다. 바둑의 전개는 매우 복잡해서 득실을 따지거나 승률을 추정하기가 어렵다. 프로 기사들도 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만, 알파고 최종 버전인 알파고 제로(AlphaGo Zero)는 프로 기사의 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다.


직관이나 창의성은 인간의 고유한 것이라고 믿어왔지만, 지금와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알파고 제로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이, 인간의 기보로부터 학습한 초기 버전의 알파고(AlphaGo Lee)도 창의적인 수법을 구사했다 [6]. 딥러닝은 인간이 직관으로 처리하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와 고양이 구분하기, 어둠 속에서 색깔 상상하기, 입술만 보고 말 알아듣기, 렘브란트 따라 그리기 같은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이제 사람보다 잘 한다. 음악과 미술에서도 우리가 예술이라 짐작할 만한 것들을 인공지능이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창의성과 예술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며, 인간의 고유한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어 직업을 잃게 될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보다 뛰어난 분류기를 마주하며, 인간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앞선다.


경계의 소멸


뉴튼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만물의 법칙을 알아냈다고 믿었다. 우주가 태엽 시계처럼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이후로 인류는 원자처럼 작은 세계의 실험 결과를 양자역학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인간의 이성에게 익숙한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원자가 입자로도 보이고 파동으로도 보인다는 것, 원자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초창기의 인공지능 연구는 인간의 지식을 컴퓨터에 주입하고 논리적 추론을 가르치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는 논리와 추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세계는 논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논리에 구속된다. 고대로부터 이성적 사고의 수단으로 여겼던 논리는 인간의 세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최근 원자 물리 분야의 대표적인 학회에서 흥미로운 학술 발표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원생 십여 명이 5년 동안 수행한 최적화 결과보다 2시간 학습한 딥러닝의 결과가 더 좋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딥러닝은 물리를 모른다. 물리 없이 원자 세계를 기술하는 다른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물리학자들은 딥러닝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모른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학자들이 여럿 있는 학회에서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굳게 믿어 온 경계가 흐트러지면 혼란을 겪는다. 과학적 태도는 경계의 모호함을 견디는 것이다. 도그마를 들이대며 세상 모든 일을 칼질하듯 재단하지 않고 잘 모르는 것은 회색 지대에 남겨 두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침묵 속에서 지나쳐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다.


인간 지성의 최후의 보루


인공지능은 통계 모델을 활용하고 스스로 학습하기 시작하면서 한 단계 도약했다. 기계학습 방식의 인공지능은 자신의 경험이나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하여 최적의 분류기로 성장한다. 기계학습 방식의 대표 선수인 딥러닝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스스로 학습한다. 딥러닝을 필두로 한 인공지능이 예상보다 빠르게 인간의 능력을 따라잡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인공지능과 달리, 세계를 분류하되 분류할 수 없음을 안다. 우리는 하나의 분류기가 임의적이고 일시적인 것임을 안다.


객관성은 허구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상상의 질서’라 부른 것에 해당된다. 또한 토마셀로가 ‘생각의 기원에서 ‘어느 누구의 관점도 아닌 관점’이라 부른 것에 해당된다. 객관성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는 각자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들의 중첩이다.


애초에 절대적 기준이라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시간과 공간,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 지능과 지능이 아닌 것을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없다. 경계를 자유롭게 허물고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지성의 최후의 보루’가 아닐까.


또다시 경계를 허물기 위해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Deepmind) 팀은 길 찾기 인공지능 학습 과정에서 뇌 속의 GPS라 불리는 ‘격자 세포 (grid cell)’ 기능을 하는 신경망 모듈을 발견했다 [7]. 운동 방향과 속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추정하는 신경망 구조의 말단에서였다. 쥐의 뇌에서 처음 발견되어 2014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안겨 준 격자 세포가 인공지능의 신경망 학습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다.


포유류 뇌의 내후각피질에 있는 격자 세포는 ‘동물적인 방향 감각’을 제공한다. 격자 세포는 주변의 공간을 육각형 패턴으로 인식한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뇌에서 만들어 공간 표상에 활용하는 것이다.


포유류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격자 세포가 인공지능 학습 과정에서 창발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는 알파고 제로가 바둑을 스스로 학습하는 과정에서 바둑의 정석이 나타난 것과 같다. 딥러닝은 정말로 놀라운 일을 해낸다.


딥마인드는 격자 세포 신경망을 강화학습과 접목하여 길 찾기 인공지능의 성능을 극적으로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격자 세포가 뇌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아 보기 위한 신경과학 실험들을 인공지능 환경에서 수행했다. 이 연구는 포유류의 격자 세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신경과학적인 질문에 인공지능 기술로 접근한 중요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학습 중인 신경망에서 격자 세포를 발견하고 동작 원리를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은 딥마인드 신경과학팀이 신경망 연구를 함께 수행했기 때문이다.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허사비스는 신경과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논문에서 격자 세포를 다뤘다. 허사비스는 딥마인드 창업 후에도 뇌에 관한 호기심을 버리지 않았고, 딥마인드에 신경과학팀을 두어 인공지능 연구와 별도로 신경과학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모호함을 견디고 복잡한 현상을 빠르게 판단하는지, 인간의 뇌가 어떻게 모호함 속에서도 확신을 갖게 되는지, 그러한 착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인간의 뇌가 회색 지대에 놓인 현상들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또한 모른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뇌에 대해서 얼마나 더 모르는지조차 모른다.


신경세포의 연결 구조에서 출발한 딥러닝은 사실상 신경과학과는 별개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따라잡았을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신경과학 모의 실험에 활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뇌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며 뇌의 신비를 함께 풀면 좋겠다. 언젠가는 ‘최후의 보루’를 또다시 허물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참고문헌

[1] Jeremy Lent, ‘The Patterning Instinct: a cultural history of humanity’s search for meaning’, 2017

[2] 양병찬, ‘성의 재정의’, http://m.ibric.org/trend/news/subread.php?id=256503

[3] Sana Inoue, Tetsuro Matsuzawa, ‘Working memory of numerals in chimpanzees’, Current Biology, 2007

[4] https://langint.pri.kyoto-u.ac.jp/ai/en/publication/SanaInoue/Inoue2007.html

[5] 토마셀로, ‘생각의 기원, 이데아, 2017

[6] 이정원, ‘알파고는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올랐다’, https://brunch.co.kr/@madlymissyou/18

[7] A. Banino, et al. “Vector-Based Navigation Using Grid-like Representations in Artificial Agents”, 2018


패스트캠퍼스 매거진 COMER 1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패스트캠퍼스 매거진 COMER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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