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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Dec 11. 2015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영원한 영혼의 목소리를 그리는 끝자리 섬놈 기다림

'그리운 벗에게'로 시작하는 이 글은, 10년 전 나의 결혼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의 친구분께서 보내오신 편지글이다. 나는 이 글을 타이핑해서 보관하고 있다가 생각날 때 한 번씩 꺼내어 읽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언젠가 잘 정리해 두고 싶었던 아버지의 젊은 날을 엿볼 수 있는 이 글이 너무 고마워서, 이토록 멋진 글로 젊은 날을 회상하는 친구분의 마음 속에 아버지가 최고의 벗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서.



그리운 벗에게


먼저 아들 정원이 장가보냄에 축하부터 보내네.

며느리를 맞는 설렘과 기쁨이 여간 아니겠군 그래.

난 세 아들만 두었는데 아직 한 녀석도 장가보내지 못해 부럽기만 하군.

자넨 조용하면서도 남달리 멋진 사람이라 며느리에게 잘 하고 인기 높은 시아비가 될 것이 눈앞에 벌써 선하군. 더욱 화기애애하고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 될걸세.


오늘따라 전주의 일이 새삼 새롭네. 우린 간혹 그때를 생각하며 자네의 얼굴을 떠올리고,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나하고 그립곤 하다네. 그리고 어떤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그 고운 여인을 마음속에 그리며 보고 싶기도 하고 말일세. 함께 진도에 오지 않으려면 이 편지를 받은 즉시 아들 결혼식 날 찍은 자네 가족들만의 사진 한 장 부쳐주게나. 별지에 낱낱이 이름과 관계를 부기하여 말일세.


대학시절 내 마음 속에 진정한 벗으로 자리한 사람은 봉환이, 창호 그리고 자네였다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건만, 그 시절 나에게 따뜻하고 깊은 사랑의 우정을 보내준 벗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 자신이 늘 부끄럽기만 하네. 마치 죄인만 같은 기분, 무엇이 이리 멀고 걸림돌인지 자신조차 알 수가 없네. 그게 삶이라고 한다해도 말일세. 그러다 이처럼 자네의 몇 마디 직접 쓴 편지가 그날의 우정을 앞에 세워놓고 마네 그려.


자넨 사실 내 가슴 깊은 자리에 특별한 우정이라네. 내가 결혼할 여인을 처음 자네 앞에 데리고 가 보여주고 바쁜 틈에 따뜻한 대접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자네는 내게 영원한 클라리넷 벗이 아닌가.


대학시절 난 너무 가난해서 못 다닐 학교를 억지스럽게 다니느라 6년 동안 튜터 생활로 숙식을 해결하고, B학점을 유지해서 수업료를 면제 받아야 하며, 그나마 교회에 일요일을 바쳐야 하는 처지, 사실 눈코 뜰 새가 없었다네. 하거늘 의대 페스티발 포크댄스연습에 참가할 여유가 어디 있었겠나. 6년 동안 단 한번도 페스티발에 참가한 적이 없었네. 극장비와 빵값이 없어 여성들과의 데이트도 모두 포기했었지.


당시 광주에서 유일한 의대 심포니악단은 전 광주 지성들에게 꿈과 사랑과 낭만의 최고봉, 그 속에서 자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혼의 선율 클라리넷 연주자가 아니었던가. 피아노가 서양음악의 기본이라면 바이올린 현악은 화려함과 기교의 극치 그러나 난 왠지 자신도 모르게 관악의 음색과 선율들에 더 큰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중 특히 자네가 추켜든 클라의 선율들에 흠뻑 젖고 말았지. 비록 음악에 대해선 백치이나 지금도 수많은 작곡자들의 악곡 중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가장 사랑함도 어쩔 수 없다네. 그의 장송곡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도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과 영혼의 감각은 더욱 눈부시고, 그가 남달리 클라리넷 협주곡을 많이 작곡한 영혼의 밑자락을 생각하곤 한다네. 그리고 그러한 실존적 영혼의 음률이 자네에게 전이되어 새로운 세계로 나에게 늘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네. 그러한 세계가 내 가슴에선 더러 역리역설(逆理逆說)적 변증환치(辨證換置) 초월(超越)의 실존적 광시곡(狂詩曲)처럼 느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고 말일세. 자기중심 자존자만의 매너리즘에 젖어 있던 서유럽 사회에 동유럽 집시 헝가리 촌놈이 휩쓸어버린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처럼 말일세. 우리 모두가 주어진 현실 눈앞에만 급급하고 있던 당시 대학시절, 자넨 내게 이미 조용한 침묵의 미소로 남다른 그러한 세계를 홀로 달리고 있었다.


봉환인 예과 시절 기타학원에 다녔지. 도중에 음악을 그만두고 말았지만. 비록 재질은 없었지만 나도 그 무엇이든 하나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었겠나. 그러나 그런 호사를 누릴 수가 없었어. 초등학교부터 중학시절까진 그림을 가장 잘 그렸어. 아무도 나를 따를 사람이 없었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서서 포기하고 만거야. 그림과 음악으로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은 어느 순간 <글>이라는 것으로 꿈의 날개를 펴기 시작하고, 대학시절 최영주처럼 직접 글을 쓰진 못했지만 문인들의 실존에 점점 빨려들기 시작한 걸세. 많은 문학적 실존들 중 내게 가장 큰 울림의 세계를 안겨준 실존이 다름 아닌 의사이자 단편과 극작가인 안톤 체홉이었어.


내 고향 남쪽 바닷가왕국을 폭풍해일이 불현듯 휩쓸어버린 6세 때 홀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홀로 선 텅 빈 바닷가에서부터 나의 꿈이라면 오직, 작고 초라한 끝자리 쓸쓸하고 텅 빈 섬 그 나 자신 하나를 탈출하는 것이 전부였었네. 그리고 끝내 섬을 탈출하여 뭍에 올라선 1965년 첫 봄 교정에서 나는 비로소 섬을 다시 보았어. 섬을 버리고 탈출하고서야 말일세. 유럽의 한 시인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현대문명사회와 현대인의 모든 병리현상은 저마다 그 자신의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데 있다.”고. 김성의 정신과 은사님께서 이르신 대로 병든 자가 어찌 병자를 고칠 수 있겠는가. “왼쪽으로 가시오!”라고 소리치다 그만 장님이 큰 연못에 빠져 죽고만 은사님의 예화가 기억나지 않는가? 삼민주의 혁명가로 더 잘 알려진 의사 손문 선생께서 <의사>를 이렇게 정의하더군. “보통의사들은 몸의 병을 고치고 좀더 나은 의사는 마음의 병을 치유한다.”그러나 정작 그보다 나은 의사는 병든 사회 속으로 뛰어든다.“고 말일세. 의사의 길이라는 게 시인이나 혁명가의 길과 추호도 다를 바 없고, 그동안 내가 꿈꾸며 줄달음친 꿈과 사랑과 길의 실상과 허상이 일시에 뒤바뀌는 현실, 세상과 삶과 지성과 낭만 그 모든 것들의 끝자리 고향 섬 그 작고 초라하고 하찮은 자신이 진정한 나요 영원한 자존임을 다시 보았을 때 사실 나는 밤마다 한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지. 그리고 그 새로운 길에서 19세기 후반 소용돌이치는 러시아 사회 속의 의사이자 작가인 안톤 체홉을 만난 것일세.


흑해연안 항구도시 타간로그 유년시절 그곳의 대부호이자 명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체홉은 마치 나의 유년처럼 행복의 극치였었네. 그러다 철길이 열리고 아버지가 파산하여 어린 체홉만을 이웃에 남기고 모든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야반도주한 후부터 체홉의 불행은 시작되었어. 타간로그에서 학교를 마치고 모스크바 가족에게로 돌아가자 온 가족이 빈민가 뒷골목 단간 셋방살이로 이리 저리 쫓기고 굶주리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어. 그러자 체홉은 짤막하고 재미있는 웃음거리 얘기들을 써서 잡지사에 보내는 원고료로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하며 의과대학을 가까스로 마친 걸세. 그러자 가족들은 주림과 헐벗음의 추위에서 벗어날 기쁨에 들뜬거야. 반면 이미 필명 <체혼테>로 잘 알려지고 그 문학적 재질을 더 사랑하는 벗들은 청진기를 버리고 펜만을 들라 빗발쳤어. “두 마리 토끼를 좇다 다 망치겠느냐.”고 말일세. 그토록 가족들이 바라는 청진기와 벗들이 빗발치는 펜 ‘두 마리 토끼’ 앞에서 체홉은 정말 고독했었네. 그리고 자신의 진실을 벗들에게 이렇게 편지로 답했지. "그대들은 나더러 두 마리 토끼라 하나 내게는 결코 두 마리 토끼가 아닐세. 굳이 둘이라 한다면 두 연인일세.“라고. 그 체홉의 진실이 바로 나의 진실이었어.


청진기와 펜을 함께 든 체홉은 “한 번 가면 살아선 돌아올 수 없다.”고 모두가 만류하는 당시 철길 없는 시베리아 강제노역수들의 사지(死地) 사할린 섬까지 홀로 걸어 나서 노숙해 가며 6개월을 걸었네. 그리고 그 죄인 아닌 죄인들과 함께 기거하며 그들의 삶과 죽음의 모든 실상들 신상명부를 작성하여 뱃길로 망망대해를 항해하여 홍콩에서 철길로 모스크바에 돌아온 거야. 그리고 당장 그 신상명부를 모스크바 지성들의 광장에 뿌리고 다시 말없이 홀로 조용히 모스크바를 떠나버렸어. 모두가 세상 모든 것의 중심과 지성들의 광장이라 하는 그곳을 말일세. 그의 진실 속의 중심은 이미, 제정러시아시대 시인 푸쉬긴과 같은 황제와 귀족들의 가장무도회장 겨울궁전 밖 머나먼 가장자리였었어. 곧 여전히 농노들이 흙바람 속에 묵묵히 땀 흘리는 시골 메리호보, 그곳에 사재를 털어 학교와 병원을 짓고, 청진기와 펜으로 자신을 다했어. 의사인 자신이 폐결핵에 걸렸으나 절박한 현실 앞에 한순간도 휴식할 틈을 스스로 허락지 않고 각혈하면서도 수많은 단편과 희곡들을 완성하고 농노들을 치유하며 그 말똥말똥한 눈망울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유년 타간로그 바닷가 갈매기의 날개를 달아주었어, 끝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자신의 유년 타간로그 바닷가 갈매기의 날개를 달아주었어. 끝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강제로 휴양지 얄타에 요양한지 수년 만에 44세로 모두의 곁을 조용히 떠났네. 인류문학사는 그를 “19세기 후반 러시아 실천적 현실주의 작가를 대표하며ㅡ 현대휴머니즘의 창을 열어 놓은 ”라 입을 모은다네. 그의 문학적 특징은 어떤 고난의 무거움도 가볍게 다루고 어떤 슬픔의 비극도 한판 넘치는 웃음잔치 희극으로 전환하는 (The short comedy sketches) 데 있었네. 그 자리는 사실 늙은 말년의 톨스토이에게 놀라운 각성과 자기변신을 안겨주기까지 했어.


그 체홉의 실존이 지배하는 나! 당시 1960년대 우리 모두가 젖어 있던 아메리칸 드림이 내겐 허상이었네. 그 티켓을 시궁창에 던져버리기에 충분했어. 다정한 벗들과 히히닥거리며 오르던 빛고을의 높고 푸른 산이 스스로 내려서는 “무등(無等)”임을 비로소 본 난 그 중턱 갈대밭에서 다정한 벗들을 뒤로 하고 홀로 산을 따라 우짖는 본향 수많은 초록빛 섬들이 둥둥둥 북치고 가는 넓고 푸른 남쪽바다 해원, 옅은 개여울 갈대밭 질펀한 곳으로 항로를 돌이키게 된 걸세. 그 시골 섬들의 돌팔이가 초대의 꿈과 길. 수술 칼날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 6년 동안 무의촌봉사 때마다 치과의사들에게 달라붙어 발치술을 다 익히고, 최후보루인 태아의 생명을 긁어내는 D/C까지 다 익혔네. 내가 가야 할 길의 현실 앞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마른 가죽에 불과했어. 비록 지금은 또 달라졌지만.


이런 나의 독백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아직 봉환이나 창호에게도 하지 않았고 자네에게 처음 내뱉는 일, 왠지 나 자신을 알 수가 없네. 아마도 무언인가 무언의 침묵 속에 통하는 바가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 시절 이미 큰 침묵으로 굳어진 나에게 벗은 조용히 자네만의 특유한 가슴으로 영혼의 목소리를 안겨주지 않았는가. 자네가 목포 해역사에 근무하고 내가 목포 노동병원에 파견되었을 때 말일세. 음악에 대해선 백치인 나에게 중고 클라리넷을 하나 안겨주며 해보라 했지. “너는 될거야.” 하고 말일세. 우정을 넘어선 그날의 그 가슴은 내게 변함없이 영원하네.


병원의 밤마다 나의 방에서 이불을 흠뻑 둘러쓰고 거듭되던 거위소리가 맑은 갈대 입바람 소리를 낼 때 그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네. 그리고 병원선을 타고 바다와 무수한 섬들을 찾아 나설 때마다 어찌 그대와 동행하지 않았겠나. 그 바다와 무수한 섬들은 바로 나의 꿈길! 악보도 볼 줄 모르는 놈, 더듬더듬 귀와 손으로 찾아 익힌 소년시절의 동요들이 고작이지만 그 기쁨은 나의 꿈길 영혼을 온통 사로잡고 말았어. 멀고 작은 외딴 섬들에게 진료를 마치고 그 앞바다에 정박하고 새우는 밤, 달과 별빛들이 바다수면을 비단 폭으로 다리미질할 때 난 갑판에 나와 섬을 향해 낮에 만났던 내 유년의 소년소녀들을 부르곤 했어. 뭍을 그리는 괴죄죄한 차림 그러나 맑은 꿈들, 하얀 병원선이 노래를 싣고 다가설 때 우르르 바닷가로 뛰어나오는 그 꿈들이 그 밤을 어찌 잠들겠는가. 배가 떠난 뒤에도 스크류 포말선의 여적이 한없이 꼬리를 무는 가슴 앞바다에 말일세.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겨울엔 겨울엔~


그토록 무수한 날 달그림자 섬 아이들과 밤을 샐 때 갯바람 파도소리는 영원한 사랑과 꿈의 시정(詩情)이었어.


그 6개월을 마치고 광주에 돌아와 순천 수녀님들의 가롤로병원에 몇 개월간 파견되었던 췹레지던트 때 애창곡집을 사놓고 더듬더듬 악보를 익히고 <트로이메라이>를 사랑하는 수녀님과 병원 잔디밭에 함께 앉아 연주할 수 있었을 때의 기쁨도 잊을 수 없다네. 목포출신의 그 요한나 수녀님은 내게 자신을 사랑하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영혼이 된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었어. 광주에 돌아온 그 마지막 겨울 시 외곽의 온통 설원이 된 들녘을 소년과 소녀가 되어 풍풍 무릎까지 빠지고 넘어지며 함께 걷던 길... 내가 결혼 후 청평까지 찾아와 나의 아내와 함께 북한강물을 거슬러 강촌을 지나고 춘천까지 걷고, 돌아와 김치 담가 주고, “어찌 집주인을 내쫓을 수 있느냐, 괜찮다”며 비좁은 셋방에서 함께 자기를 주저치 않던 <트로이메라이 수녀님>은 그 후 피정시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어린 수녀님을 구하고 동해바다 푸른 파도에서 영혼의 목소리가 되고 말았네.


고향 섬의 날들에 자네의 선물 크라리넷-내가 음치라 스스로 “촐래”라 하는-은 별이 빛나는 밤이나 바람불고 비가 내리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이나 모두가 잠은 밤에는 하늘 우러러 얼마나 울었는지... 수녀님이 내게 선물한 자신이 종신허원 때 받은 십자묵주만을 가슴에 품던 날, 클라리넷은 그만 소리를 멈추고 말았네. 누군가가 쓰던 것을 다시 하나 구했으나 그도 몇 해를 버티지 못했어. 아내는 처제가 사용하던 피아노를 선물 받아 들여 놓는 가난한 시골의사가 어찌 새 촐래를 바라겠나. 그리움의 서툰 악곡들만 구름처럼 피어날 뿐 이제 나의 촐래는 두 번 다시 내 품에 안길 여망이 없으니. 그대 벗의 우정과 그 무수한 영혼의 목소리 악곡들이 날로 더 깊어질 수밖에.


빈 낚싯대 하나로 직접 나의 작은 낚싯배로 230여 보배섬 무리와 제주바다까지 누비던 날의 나의 자유(自由)와 자유(自遊)가 어쩌면 영원한 우정 그대의 클라 선율 詩情 狂詩曲일지도 모르네. 헤밍웨이의 빈 대끝 그 통쾌한 너털웃음 -The winner take nothing- 말일세.


그동안 한 4년쯤 청진기와 수술칼날을 버리고 흰옷을 벗었더니 가족의 삶이 꼴이 아니어서 불가불 다시 흰옷을 걸쳤네. 금년 11월 10일에. 이 끝자리 섬 읍도 내겐 너무 크고 벅차서 남쪽으로 더 내려선 시골장터도 이젠 쓸쓸한 작은 마을 <十日市>라는 곳에, 내 이름을 지우고 <한국의원>이란 명패로 말일세. 저 230여 물새들의 끝자리 섬 <鳥島> 바다비원으로나 아니면 적도바다 선상 콩고강 거슬러 중앙아프리카 자이레, 이 지상에서 가장 드넓은 열대초원 사바나의 검은 피부들 자리라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만... 이토록 황혼녘 바다 노을만 더욱 붉게 타네.


사랑하는 벗이여!

바다가 그립지 않은가? 섬이 보고 싶지 않은가?

개여울 갈대 빗자루로 나의 작은 뜨락을 쓸어 놓겠네.

불현듯 가슴이 답답할 때 반려와 함께 달려오게나.

영원한 파도소리 갯바람 물새들의 노래 바다비원의 시가(詩歌)를 가슴 가득 안겨주겠네.

올 때는 나와 나의 반려를 위해 벗의 영원한 사랑 클라리넷을 잊지 말게나. 이 지상을 떠나기 전 그 어떤 누구보다 벗 그대의 몇 곡 연주를 듣고 싶다네.


2005.12.5. 밤

영원한 영혼의 목소리를 그리는 끝자리 섬놈 OO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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