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왜 조건이 되었을까? — 자격 없는 존재의 싸움》
우리는 ‘기회’와 ‘조건’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곤 한다. 하지만 이 두 단어를 천천히 뜯어보면, 그 안엔 우리가 싸워온 세계의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을 알아보기 전, 우리는 기회와 조건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격이라는 말 안에서 기회와 조건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먼저, 기회’는 한자로 機(기)와 會(회)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機(기)는 ‘베틀’이나 ‘기계’의 틀을 뜻한다. 나무(木) 아래 실타래(幾)를 엮는 구조에서, 움직일 수 있는 틀, 즉 작동의 준비’를 의미한다. 會(회)는 ‘모이다’, ‘만나다’는 뜻이다.
즉, 기회는 ‘움직일 수 있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다.
하지만 여기에 담긴 진실은 냉정하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기회는 애초에 도달하지 않는다. ‘기회’는 기계가 준비된 사람, 움직일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회(모임)’였던 것이다.
즉, 조건은 어떤 사건이 성립되기 위한 분기점이자, 그 사건을 짊어질 ‘사람의 자격’을 의미한다. “조건이란, 누가 그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대한 판단 기준이다.”
그러니 조건 없는 기회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조건은 언제나, 누가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를 가려내기 위해 존재했다.
이토록 구조화된 단어들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기회의 주체가 되어본 적이 있었는가?”
기회의 주체가 되기 위해, 나는 늘 무언가를 먼저 갖춰야만 했다. 지원서를 쓰기 전, 부모 연락처를 채워 넣어야 했고, 공모전을 시작하기 전, 나는 이미 누군가보다 뒤처진 출발선에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회는 늘 이중 구조였다.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으면 해’라는 말로 주어졌고, 나에게는 ‘할 수 있으면 해봐’라는 도전처럼 주어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왜 자격증이 없죠?”
“이거 부모님 동의가 꼭 필요합니다.”
“주간 수업인데 일하고 있으면 들을 수 있나요?”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은 항상 사회가 설정한 조건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나는 그 조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보를 몰랐고, 시간 여유도 없었고, 가장 결정적으로 뒤를 봐주는 어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기회보다 빠르게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기회를 향해 손을 뻗기 전, 그 기회가 나를 거부할 이유부터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회란 살아 있음으로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치를 전제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사회는 말한다.
“네가 이 기회를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 먼저 보여줘.”
그 말은 다시 이렇게 번역된다.
“넌 아직 존재로서 충분하지 않아.”
그렇다면 우리는 기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허락받기 위한 통로로서 기회를 감당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기회를 원한 것이 아니라, 버려지지 않기 위해 기회를 움켜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기회는 늘 불안과의 거래였다. “이번 기회마저 놓치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몰라.” 라는 절박감, 기회는 희망이 아니라 생존의 장치였고, 조건은 자격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시험지였다.
나는 그 안에서 가끔 상상했다. 조건 없는 기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말이다.
부모 동의서가 필요 없는 신청서, 가정환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장학금, 설명회가 주간이 아니라, 야간에도 열리는 지원 제도,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작은 전시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 리베카 솔닛, 『희망은 누구의 것인가』
그건 거창한 배려가 아니었다. 그저 존재가 조건이 되지 않는 세상, 혹은 조건 없이 존재를 허용하는 문장 하나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적어도 한 번쯤은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진짜 기회 아닐까?
누구의 기준에 들지 않아도,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아도,
그냥 ‘살아 있는 나’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런 세상이 있다면, 기회는 더 이상 누군가의 특권도, 불안을 견딘 자의 보상도 아닐 것이다. 그건 그저 존엄한 존재에게 건네는 당연한 환대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상상한다, 누군가의 배경을 묻지 않고, 누구의 사정을 따지지 않으며, 그저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세상을.
그 세계에선 ‘조건’은 점점 사라지고, 기회는 문턱이 아니라 초대장이 된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왜 당신은 항상 뭔가를 증명하려 하나요?”
그 물음은 너무나 가볍게 던져졌지만, 나는 그 가벼움 때문에 더 무거워졌다.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가 나에겐 사치였기 때문이다. 증명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으니까. 나는 늘 무언가를 준비하고, 적고, 설명하고, 정리했다. 자격증 공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 생계 계획서. 어쩌면 내가 가장 많이 써온 문장은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저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왜 이 기회를 간절히 원하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조건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 속에, 나는 존재했다. 아니, 존재하려 애썼다.
기회는 늘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늘 숨 가쁘게 따라가야 했다. 하지만 따라가는 사이, 그 기회는 이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조금 더 견딜 수 있었더라면..”
하지만 이건 단지 ‘조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기회를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던 싸움이었다. 어떤 날은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 하루가 내 모든 가능성을 지운 것처럼 느껴졌다. 존재한다는 것이 죄책감이 되었고, 쉬는 것이 두려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처럼 살았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싸워왔던 것은 ‘기회를 잡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존재할 자격을 증명해야만 했던 투쟁’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인데, 사회는 끊임없이 물었다.
“너는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
“네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지?”
“그 자격을, 네가 가졌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래?”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늘 존재 자체가 미심쩍은 사람이 되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되묻는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한 번이라도 자격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기회는 정말,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었을까? 우리는 언제 한 번이라도 “당신이니까요”라는 이유만으로 선택받은 적이 있었을까? 누군가에겐 너무도 당연했던 그 한 번의 기회가, 우리에겐 수없이 버티고 증명해도 허락되지 않는 세계였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처음 ‘보호아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던 순간. 아직 그 단어가 어떤 뜻인지도 모를 때, 나는 한 장의 서류 앞에 앉아, 입을 열어야 했다
“아빠는 죽었습니다."
"엄마는 모릅니다.”
그 말을 내 입으로 해야 했다. 그 말이 있어야만, 나는 누군가의 보호 아래 놓일 수 있었다. 그 한 문장이 나의 자격이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아픔’을 증명해야 한다는 걸. 기회는 나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기회를 받기 위해, 나의 결핍을 스스로 고백해야만 했다. 그 시작이, 내 존재의 서류였다. 이름, 주민번호, 가족관계, 그리고 부재의 증명.
그래서 말한다. 기회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기회는 태도의 문제도 아니다.
기회는, 누가 시작선에 서 있었는가, 누구에게 구조가 작동했는가, 그 차이에서 발생한 결과였다.
우리에겐 기회란 선물이나 권리가 아니라, 증명해야 겨우 허락받는 임시 허가증이었다. 기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네가 충분히 준비되었음을 먼저 보여줘.
그래야 한 번쯤 들어줄 수 있어.”
우리는 기회를 바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장치 하나쯤은 있었으면 했다. 그게 때로는 장학금이었고, 때로는 면접의 한 질문이었고, 때로는 ‘기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억 한 줄이었다.
기회는 말한다. “증명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묻는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기회를 증명했고, 존재하기 위해 조건을 감당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것이 끝난 후 남겨진 단어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자립.
누군가는 이것을 축복이라 부르지만, 우리에게 자립은 종료의 통지서였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라는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