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생과 존 사이: 나는 살아 있었지만, 존재한 적은 있었을까?》

by 마엘
“모든 생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모든 존은 생의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속해왔던 공간은 늘 ‘생’과 ‘존’이 분리된 장소였다. ‘생존’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나누어 보면, 생(살아 있음)과 존(존재함) 사이의 묘한 간극이 드러난다.


자립준비청년에게 있어 ‘생존’은 단순히 숨을 쉬는 일이 아니다.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세계,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계 두 극단의 단어가 서로 붙어, 하나의 단어가 되어버린 모순. 그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생. 그런 식의 생존은 ‘지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의지로 버텨온 삶이었다.


나는 살아 있었지만, 존재한 적은 있었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살아있음과 존재에 대한 것을 먼저 나누어봐야겠다.


‘생(生)’은 한자 그대로 ‘나다’, ‘피어나다’는 뜻이다. 씨앗에서 싹이 틔는 일, 숨이 붙어 있는 상태, 무언가가 자라나는 과정을 포함한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삶을 부여받는다.” (《맹자》, 告子章句 上)

여기서의 ‘삶’은 단순한 ‘기능적 생존’을 의미한다. 살아 있다는 것, 숨이 쉬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반면 ‘존(存)’은 ‘존재할 존(存)’으로, 단순히 ‘있다’는 뜻이 아니다. ‘存’은 ‘손 수(手)’와 ‘재물 존(� 아래 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무언가를 붙들고 간직하다”, 즉 “가치 있게 여겨져야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존재’는 단순히 살아 있는 것과는 다르다. 살아 있으되, 누군가의 인식 안에 들지 않는다면, 이름 없이 호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한 적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말했다.

“의식은 타인의 인정을 통해 존재를 획득한다.”


즉, 존재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내가 나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내가 한 사람으로 인식될 때,

그제야 존재가 시작된다.


그러니, 자립준비청년의 삶은 생과 존의 결합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존을 위한 생, 또는 생을 유지하기 위한 존이었다. 그 뒤에는 어떤 단어가 늘 따라붙는다.


“생계”


누군가에겐 부모가 책임지는 하나의 현실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끝나지 않는 데일리 과제였다. 학기가 끝나면 과제는 사라지지만, 우리의 생계는 계속된다. 그리고 그 생계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조부모, 삼촌, 이모… 내 가족의 생계도, 때로는 나의 몫이었다.


그 몫 안에서, 나는 수없이 ‘존을 위한 생’을 살아왔다. 존재해야만 했다. 존재한다는 건 숨 쉬는 일이 아니었다.‘쓸모 있는 존재’로 보이기 위한 수단, 살아남기 위한 장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삶이었다. 그래서일까 아주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 하나의 웃픈 현실을 나누고자 한다.


대학교 1학년, 처음 대학이라는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 내게 가장 당황스러웠던 시간은, 다름 아닌 공강 시간이었다. 그것은 20년 인생 최초로 주어진 ‘나만의 시간’이었다. 언제나 누군가의 기준에 따라 움직였던 나에게 ‘비어 있는 시간’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 소중한 시간에 뭘 해야 하지?’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도 되는 걸까?’
‘지금 무언가 하지 않으면, 나는 무가치해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공강 시간마다 열심히 무언가를 했다. 과제, 자격증 공부, 계획 정리, 스터디 준비, 믿음생활에 이르기까지 항상 뭔가에 몰두했다. 그 덕분에, 내 동기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항상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애.”

그런데 나만 알고 있었다. 그 열심은 사실, 무너질까 봐 두려운 ‘존재의 증명’이었다는 걸.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즐기거나, 쉰다거나, 멈춰도 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건 곧 사치였다. 존재를 허락받지 못한 존재에겐, 멈춤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생존’의 실체였다.

살아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멈추지 않아야 했던 삶.

그렇다면 그때의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살아 있었지만, 존재한 적은 있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을 때,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싶었다.”

김애란,『두근두근 내 인생


그러니까 결국, 살아 있음과 존재함 사이의 간극을 메워내는 일은 단순한 ‘생활력’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돈을 더 벌어서 가난에서 탈출하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전에 받지 못한 대우를 받는 식의 1차원적인 승리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훨씬 더 조용하고 내밀한 싸움이며, 존엄을 회복하는 일에 가깝다.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식되어야만 비로소 존재로 여겨졌고, 우리는 종종 그 시선을 얻기 위해 ‘생’을 갈아 넣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존재는 외부의 인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방식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는 것.

더 벌기보다, 더 견디기보다 조금은 나에게도 귀 기울이는 일.
그 작고 묵직한 방향 전환이 바로, ‘존’이 ‘생’을 품기 시작하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그 간극에서 오래 살았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식된 적 없었던 날들. 말을 해도 듣는 이 없고, 나를 소개해도 되묻는 사람 없는 그 시간은 마치 ‘투명한 생존’ 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다. 나 스스로 그 간극을 조금씩 메워가는 첫 시도는, ‘나의 시간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일’이었다는 것을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살아간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문장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생존에서 존재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시킨 일이 아니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누구에게 내보이지 않아도, 내가 좋아서 적는 문장 하나. 생존, 생계, 부양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간. 그런 순간이 쌓일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며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장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자립을 시작하는 친구들 or 자립의 여정을 함께 걷고 있는 동지들에게

“생과 존이 분리된 삶이 아니라, 때로는 모순적일지라도 그 둘이 하나로 이어지는 삶의 중심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가치를 스스로 아는 존재로 전환되기를. 그 전환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이 작동하기를. 그리고 그 여정의 곁엔, 언제나 선배들이 조용히 함께할 것입니다. 자립’이라는 단어를 각자의 삶 안에서 새롭게 정의하며 살아가는 삶, 넘어질 때면 잠시 기대어도 괜찮은, 그런 나무 한 그루가 되어주는 삶. 그것이 아마도, 우리가 걸어온 1세대 자립의 마지막 역할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작고도 단단한 다짐일 것입니다. 1세대의 삶은 2세대, 3세대의 가능성 때문에 더 치열해집니다. 이 각축장에서 우리는 오늘도 생이 아닌, ‘존’을 결심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언제 ‘존재하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었을까. 누군가에게, 혹은 사회 안에서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대우받은 기억은 얼마나 되었을까. 존재의 인정 이후, 우리는 또 다른 문턱 앞에 서게 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그 문턱 ‘기회의 자격’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살아 있음이 곧 기회가 되는 사회. 그 문장이 현실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조건을 요구받고 있는 걸까요?


다음 편, 2장. 기회는 왜 조건이 되었을까? 자격 없는 존재의 싸움 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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