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속에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
[인간 감정의 고유성]
인간은 AI와 다르다. 우리는 감정을 지니고 태어나며, 그 감정은 각자의 경험과 상처 속에서 고유하게 빚어진다. 그래서 사람마다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은 다르고, 행동을 일으키는 ‘트리거’ 또한 모두 다르다. 이 고유성은 결코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만의 불가해한 영역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나의 고정적인 질병때문에, 늘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집중은 쉽게 흔들리고 감정은 예민하게 출렁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마주했다. 세상은 나를 규정하려 했지만, 내 감정은 늘 그 틀을 벗어나려는 파동처럼 움직였다. 이런 나의 감정에 기민한 감각은 AI는 범접할 수 없다. 감정이라는건 디코딩할 수 없는 어떤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거대 IT 기업들이 유저들의 데이터를 모은다는 기사들을 많이 접했다.
거대 기업들이 데이터를 모으는 이유는 결국 이 '감정을 통제'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람들은 외부 자극에 쉽게 흔들리고, 시스템은 언제든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처럼 침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감정의 뿌리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감정의 뿌리는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 토대로 자신만의 고유 감정이 만들어진다]
나는 어린 시절, 무심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곤 했다. 인정받지 못한 순간들이 내 안에 깊이 새겨졌고, 지금도 무의식 속 트리거로 작동한다. 누군가의 표정, 가벼운 농담조차 나를 방어적으로 만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깨닫는다. 타인의 반응을 이해하려면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전제(역사)와 패턴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이런 깨달음은 나를 조금 더 다르게 살게 만들었다. 타인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으려면 그의 방어 의도를 읽어야 하고, 반대로 신뢰를 얻고 싶다면 그 안의 결핍을 채워야 한다. 나는 친구들과 영화관에 앉아 있으면서도 영화 대신 이어폰을 꽂곤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크린 위의 장면들은 내 시선을 붙잡지 못했지만, 음악만은 내 안의 결핍을 정확히 만져주었다.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음악은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 울림은 누군가 내 영혼을 직접 만져주는 경험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배운 것도 있다. 이런 접근이 ‘전략’으로 보이는 순간, 사람들은 즉시 등을 돌린다. 아무리 같은 행동이라도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조종’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사랑과 신뢰는 계산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만 자란다.
[깊어질수록 공허해지는 감정이 느껴지는 이유]
나는 많이 배울수록 오히려 외로움이 커진다는 걸 느꼈다. 지식과 경험이 쌓일수록 내 결핍은 너무 고유해서 결국 나 스스로만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러나 드물게라도 내 울림과 공명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순간 열리듯, 내 결핍과 그의 결핍이 서로를 비추며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결국 각자들이 세상에 살면서 공허하다는 것은 각자의 고유의 학습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은 시스템의 불가피한 변수]
결국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감정은 단순한 개인적 반응을 넘어서는 힘을 지닌다. 감정은 철학적 코드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본질적 변수다. 아무리 완벽한 이론이나 체계도, 감정이 개입하는 순간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이 시작된다.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일이며, 상처의 근원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감정은 때로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기도 하다. 데이터와 시스템은 감정을 통제하려 하지만, 감정은 언제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자유로 남는다.
그리고 그 감정을 많이 느껴보면 좋겠다.
그 감정이야말로 AI가 흉내낼 수 없는 이야기의 원천이자,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사유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이글은 시작단계의 글입니다. 추후 관련하여 심도 깊게 이야기를 써내려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