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주권,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미래
최근 주요 매체의 보도를 종합해 보면 글로벌 자율주행 시장, 특히 'Robotaxi(무인 택시)'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의 독주는 공포스러울 정도입니다. Waymo는 이미 상용화에 성공했고, 중국의 Baidu와 Pony.ai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거대한 내수 시장 데이터를 쓸어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최근 미국 정치권의 거대한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더욱 강력하게 '미국 내 제조'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미국 땅에 공장을 짓지 않으면 관세 폭탄을 맞을 것"이라는 그들의 메시지는 단순한 무역 보호주의를 넘어, 국가의 근간인 '제조 역량'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겠다는 필사적인 선언과도 같습니다.
반면,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기술 격차는 분명 존재하고, 일각에서는 "어차피 늦은 거, 싸고 좋은 중국산 자율주행 솔루션을 사다가 우리 차에 얹어서 팔자"는 효율성 중심의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시점에서 전 인텔(Intel) CEO Andy Grove가 남긴 섬뜩한 경고와 우리가 가진 새로운 '돌파구'를 연결해보고자 합니다.
2010년, Andy Grove는 블룸버그 기고문을 통해 미국 경제의 쇠락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는 '차고 창업(Startups)' 신화에 취해 있었고, 제조와 양산(Scaling)은 "비용이 싼 아시아에 맡기면 된다"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브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발명(Invention)은 차고에서 일어나지만, 일자리와 산업 생태계는 스케일업(Scaling)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제조를 포기하는 순간, 혁신을 지속할 능력조차 잃게 된다."
그의 경고는 오늘날 트럼프 정부의 정책으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공장을 자국 내로 강제 소환하는 이유는 제조 기반(Industrial Commons)이 없으면, 결국 기술 패권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H그룹의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한 고위 임원이 기술 격차와 비용 효율성을 근거로 "중국의 앞선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도입하자"는 취지의 보고를 올렸다가, 회장에게 크게 질책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동차의 정의가 '기계'에서 '움직이는 전자 기기(SDV)'로 바뀌는 시점입니다. 껍데기(하드웨어)는 제작사가 만들더라도, 그 뇌(자율주행 AI)를 중국 기술에 의존한다면 제작사는 단순한 '하청 조립 업체'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는 곧 국내 자동차 산업 생태계 전체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냉정하게 말해,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순수 자율주행 AI 데이터와 기술력에서 다소 뒤처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강점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원격 관제'와 '서비스 운영'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완벽한 AI(Level 4/5)를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동안, 우리는 AI의 부족한 성능을 세계 최고의 통신 기술과 세심한 운영 역량으로 메우는 전략을 취할 수 있습니다.
* 원격 모니터링 및 제어(Remote Control): 자율주행차가 판단하기 어려운 돌발 상황에서, 관제 센터의 전문 인력이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합니다. 한국의 촘촘한 5G/LTE망은 이를 가능케 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 운영 중심의 비즈니스 발굴: 기술이 완벽해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원격 관제'를 전제로 한 규제 특례를 미리 적용해야 합니다. '관제원 1명이 다수의 차량을 모니터링'하는 조건을 허용한다면, 물류 배송, 심야 순찰, 커뮤니티 셔틀 등 지금 당장 적용 가능한 신규 비즈니스가 무궁무진하게 열립니다.
우리는 AI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기술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운영 노하우와 관제 시스템이 결합된 '토털 솔루션'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이러한 한국형 전략이 통하고 있다는 증거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의 한 대표적인 자율주행 스타트업의 행보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 기업은 불모지와 같았던 한국 시장에서 '제조'와 '운영'을 동시에 아우르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공신력 있는 글로벌 조사기관의 자율주행 기술 평가에서 해를 거듭할수록 순위가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기에는 순위권 밖이나 하위권에 머물렀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글로벌 자이언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력한 도전자 그룹'으로 진입했습니다.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 Guidehouse가 발표한 2025년 자율주행 리더보드(Guidehouse Research Leaderboard: Automated Driving Systems)에서 세계 7위에 오르며 역대 최고 성과를 달성하였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단순히 코딩 실력이 좋아져서가 아닙니다. 국산 자율주행 모빌리티 플랫폼을 직접 양산하고, 실제 도로 위에서 방대한 실증 데이터를 쌓으며, 관제 시스템을 고도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한국 기술은 안 된다"는 편견을 깨고, 객관적인 데이터와 제3자의 평가로 실력을 입증해 보인 것입니다.
미국은 거대한 자본과 트럼프의 강력한 정책으로, 중국은 국가 주도의 데이터 몰아주기로 앞서가고 있습니다. 자본도, 내수 시장도 부족한 한국이 이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려면 '정부-민간의 정교한 협력 모델'이 필수적입니다.
그 핵심에 정부의 '자율차 실증도시' 정책이 있습니다. 기업이 홀로 감당하기 힘든 '스케일업'의 리스크를 정부가 함께 짊어지는 구조입니다.
첫째, 규제 샌드박스의 과감한 적용입니다. 기술이 법을 앞서 나갈 때, 도로 위에서 합법적으로 주행하며 데이터를 쌓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숨통입니다.
둘째, 공공 수요 창출을 통한 초기 시장 확보입니다. 민간 시장이 열리기 전, 지자체의 대중교통이나 특수 목적 차량으로 기술력이 검증된 국내 기업의 플랫폼을 우선 도입해 주어야 합니다. 트럼프가 미국 기업을 위해 장벽을 세우듯, 우리 정부도 국내 기술이 자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와 시장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앤디 그로브는 "스케일링(규모 확장)은 힘든 작업이지만 혁신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기술을 사다 쓰면 당장은 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H그룹 회장의 역정과 국내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평가에서 보여준 쾌거는 "편한 종속보다는 힘든 자립"을 택하겠다는 의지이자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국내 자율주행 기업들을 응원하고, 정부의 실증지구 확대 정책에 공감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자율주행 기술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향후 100년을 책임질 국가의 '기간산업(Industrial Commons)'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거대 강국들에 비해 열세일지라도, 우리 땅에서, 우리 기술로, 직접 부딪히며 쌓아 올린 데이터만이 진정한 우리의 미래 자산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