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회사는 없다
사명에서 단어 하나를 지웠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글자가 이 회사의 과거 전체를 가리켰습니다.
샤오펑(小鹏)은 4월 1일부로 중국어 사명을 ‘小鹏汽车’에서 ‘小鹏集团’으로 바꿉니다. 지워진 ‘汽车’는 자동차를 뜻하고, 들어온 ‘集团’은 그룹을 뜻합니다. 변경은 두 글자지만, 선언은 하나입니다. 이 회사는 더 이상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아닙니다.
이 장면, 우리는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기아자동차는 2021년 사명을 ‘기아’로 바꿨습니다.
‘자동차’라는 두 글자를 조용히 내려놓으면서,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방향을 선언했습니다.
테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2017년 ’테슬라 모터스(Tesla Motors)’에서 ’테슬라(Tesla)’로 이름을 줄였습니다. 에너지·소프트웨어·AI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담기에 ‘모터스’라는 단어가 너무 좁아진 것입니다.
샤오펑의 이번 결정은 그 계보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점에서 앞선 두 사례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기아와 테슬라가 먼저 이름을 바꾸고 전략을 채웠다면, 샤오펑은 전략을 먼저 채우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허샤오펑 CEO가 말하는 ’물리적 AI(Physical AI)’는 자율주행·로보틱스·AI 칩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개념입니다. 선언이 아닙니다. 2025년 R&D 투자액 95억 위안 중 절반 가까운 45억 위안이 이미 AI에 들어갔고, 광저우에는 휴머노이드 로봇 양산 공장이 착공 중입니다. 사명 변경은 이미 진행된 전환의 공식 확인입니다.
‘튜링’이라는 이름에 담긴 것
샤오펑이 직접 설계한 AI 칩의 이름은 ’튜링(Turing)’입니다.
앨런 튜링. 현대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수학자입니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지를 판별하는 ‘튜링 테스트’를 고안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율주행 차량에 들어가는 AI 칩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단순한 반도체 제품명이 아닙니다. ‘이 칩은 생각하는 기계를 위한 두뇌’라는 선언입니다.
튜링 칩의 누적 출하량은 이미 20만 개를 넘었습니다. 2026년 목표는 100만 개입니다. 올해 2분기부터는 샤오펑 전 차종에 이 칩이 탑재됩니다. 외부에서 사다 쓰던 칩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칩이 이미 양산 수준의 검증을 받았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자동차 회사가 반도체를 직접 설계하기 시작했을 때, 그 회사의 정체는 이미 달라진 것입니다.
폭스바겐이 샤오펑 기술을 산 것의 의미
이 흐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폭스바겐이 서구 주요 완성차 브랜드 중 처음으로 중국산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와 AI 칩을 채택했습니다.
샤오펑의 VLA 2.0과 튜링 칩이 그 대상입니다. VLA는 ‘Vision-Language-Action’의 약자로, 카메라로 세상을 보고(Vision), 상황을 언어로 이해하고(Language), 직접 운전 행동을 결정하는(Action)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구조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고 판단해서 핸들을 돌리는 과정을 AI로 구현한 것입니다.
이 기술을 폭스바겐이 샀습니다.
10년 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중국 자동차 산업은 오랫동안 유럽 기술을 배우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흐름이 이번에 방향을 바꿨습니다. 유럽 OEM이 중국 소프트웨어에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합니다.
허샤오펑은 추가 완성차 업체, AI 기업, 1차 협력업체와의 협력에도 열려 있다고 밝혔습니다. 기술을 파는 회사, 플랫폼을 운영하는 회사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샤오펑이 이제 자동차를 파는 것이 아니라 자율주행 기술을 파는 회사가 되려 한다면, 사명에서 ‘汽车’를 지운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2030년, 로봇 100만 대라는 숫자 앞에서
차세대 휴머노이드 로봇 ’아이언(Iron)’은 올해 말 양산에 들어갑니다. 월 생산 목표는 1,000대 이상. 허샤오펑이 제시한 2030년 연간 판매 목표는 100만 대입니다.
이 숫자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테슬라의 옵티머스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테슬라도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샤오펑은 이미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와 AI 칩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로봇에 들어가는 두뇌와 눈과 판단 알고리즘을 자체 조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2026년 하반기에는 로보택시 시범 운행이 예정됩니다. 2027년 초 목표는 안전 운전자 없는 완전 무인 운행입니다. 이 일정이 실현된다면, 샤오펑은 차량 판매 마진이 아닌 서비스 수익으로 먹고사는 첫 번째 중국 자동차 기업이 됩니다.
‘汽车’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기아가 ‘자동차’를 지우고, 테슬라가 ‘모터스’를 지우고, 이제 샤오펑이 ‘汽车’를 지웠습니다.
세 회사 모두 같은 방향을 향했습니다.
자동차는 우리가 만드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선언. 그리고 세 회사 모두 그 선언 이후에 이전과는 다른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샤오펑의 사명 변경이 진짜 전환점이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AI 칩을 직접 만들고,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유럽에 팔고, 로봇 공장을 짓고, 사명에서 ‘자동차’를 지운 회사가 앞으로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는 충분히 선명합니다.
자동차 회사는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AI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만들겠다는 회사입니다.
출처: Electric Vehicles, “XPeng Drops ‘Motors’ From Chinese Name as It Expands Into Robotics and AI Chips” (접속일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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