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1
솔론의 금권정치
고대 그리스의 양대 축으로 알려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주어진 환경이 다르다보니 사회구조의 발전방향도 달랐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했던 폴리스(도시국가)로 반도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다. 농사를 짓기 힘든 산지를 주로가진 다른 폴리스들과 달리 스파르타가 자리한 분지형태의 라코니아 평야에는 에우로타스 강이 흐르고 있어 곡물농사에 유리했다. 자연 환경의 혜택을 입은 스파르타는 농업위주의 사회로 발전했고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풍족함으로 인해 외부와의 교류가 적어 폐쇄적인 사회로 발전하면서 효율을 따지는 군국주의 체제로 성장했다.
아테네도 초기에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문제는 아테네가 자리한 아티카 지역은 곡식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적었고 수자원도 부족하다. 그나마도 소수의 귀족들만이 소유한 토지로 인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다수의 사람들이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그중에 1/6 ~ 5/6를 땅의 임대료로 지불하다보니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었고 임대료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불리는 아테네의 드라콘 법에는 인신의 담보가치를 인정해 채무를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자신과 가족이 저당 잡혀 갚지 못한 빚 때문에 다른 폴리스로 팔려가는 경우도 발생했다. 흉작으로 인한 부채증가는 이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소수에게 집중되어버린 부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이 솔론(Solon)이다.
산적한 문제들에서 여러 차례 기지를 발휘한 솔론은 아테네의 모든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594년에 양측의 집정관(아르콘)이 되어 모든 부채를 없애고 부채로 인해 노예가 된 대다수의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다른 폴리스에 팔려간 사람들마저도 값을 지불하고 데려왔다. 그리고 인신담보를 금지시켰다. 이를 제도화하려고 법을 제정했고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덜었다’는 의미의 ‘세이사크테이아(Seisachteia)’라 불렀다. 귀족층과 지주들의 채권이 사라지면서 불만이 높았지만 부자였던 솔론 스스로도 많은 금액의 채권을 잃었기에 반발을 줄일 수 있었다.
식량유출을 방지하고자 올리브외의 농산품수출을 막았다. 교역으로 이익을 보려는 지주들은 올리브재배를 늘렸다. 올리브는 기름으로 수출되고 있었는데 이를 담기위한 도자기도 많이 필요했다. 올리브생산을 위한 농사이외에도 기름생산과 도구제작, 도자기생산까지 많은 기술자가 필요했다.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에게 이런 기술을 배우게 해 일자리를 주었고 수입이 안정되게 했다. 아테네의 특산품이 된 올리브유는 품질도 높아 식민지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고 덤으로 올리브유를 담은 도자기까지 유명세를 얻어 수출상품에 이름을 올린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으로 폴리스를 먹일 곡물도 충분히 확보하며 만성적였던 식량부족을 해결했다.
귀족출신들에게만 주어졌던 참정권에도 변화를 주었다. 다수가 참여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구들을 만들게 되는데 그 기준이 혈통과 출신이 아닌 재산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금권정치(金權政治)라고 표현한다. 아테네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예산에 대한 납부세금을 기초로 4개의 신분으로 나누었다. 민회와 법정에 참석만 할 수 있는 테테스(세금면제)를 제외한 펜타코시오메딤노이(세금60%담당), 히페이스(세금30%담당), 제우기타이(세금10%담당)는 등급과 기여도에 맞는 선출직 관직을 맡아 폴리스운영에 같이 참여할 수 있었다.
금권(金權)의 영향력은 근대까지 미쳤다. 부르주아 자본가에게 주어진 선거권이 여러 과정을 통해 도시민에서 농어촌, 광산노동자까지 순차적으로 넓어져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아테네의 성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은광(銀鑛)이라는 의외의 발견을 통해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되면서 에게 해를 중심으로 둘러싸인 그리스의 폴리스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