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4
트로이 전쟁문학과 그리스의 부
여러 고대문화권이 그렇듯 그리스도 신화와 역사가 뒤엉켜있다. 역사를 읽다가 신화로 신화를 읽다가 역사로 연결된다. 신화와 역사가 얽힌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도 그렇다. 두 작품을 지은 호메루스(Homerus)마저 실존 여부를 두고 의견이 다양하다. 트로이 전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던 시기에서 3천년이 지나 고대 전설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소년이 나타난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슐리만은 8살에 선물 받은 일리아스를 읽으며 트로이가 존재했다고 믿었다. 유럽의 크림전쟁과 미국의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부를 쌓은 슐리만은 어느새 중년이 되었고 자신이 꿈이던 트로이의 존재를 밝히는데 재산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스 해안가를 시작으로 유적을 찾아다녔다. 1870년 터키의 히실리크 언덕에서 시작된 발굴 작업은 신화로만 여겨지던 트로이의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소설 같은 신화를 고고학의 탐사를 통해 역사라는 실증학문으로 이끌었다. 열정은 미케네문명으로 이어져 유럽 고대사연구에 획을 그었다. 발굴된 황금유물들은 고대그리스가 이룩한 부와 문화를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도 산업기반은 농업이었다. 도시들은 국가형태로 발전했지만 통합되지 않아 여러 폴리스로 나눠져 있었다. 서로의 손익에 따라 다투는 경우가 발생했는데 다툼에서 지지 않기 위해 지배계급은 힘의 균형이 필요했다. 이에 농민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여기에 부응한 농민들은 그에 합당한 권리를 요구했다. 그렇게 확보된 참정권으로 시민들은 평등을 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게 더욱 강화했다. 예를 들어 아테네인이 경제적으로 속박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테네는 노동력을 위한 외국인 노예를 구매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합리적인 권리 보장받게 된 시민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일정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구의 증가는 농경지의 부족을 야기했다. 이에 새로운 지역에 정착해서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식민지가 흑해연안과 지중해연안에 걸쳐 분포했다. 그리스 본토와 식민지간의 해상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식민지의 농산물과 특산물이 그리스의 올리브유와 포도주로 교역되면서 토지를 통해 부를 독점하던 세력과 크고 작은 마찰도 발생하게 된다. 이는 군사적으로도 변화를 주게 되는데 사유재산이 증가하면서 무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수도 증가를 하게 되었다. 농민과 상인을 비롯해 교역 물품을 만드는 수공업자들까지 전쟁에 나가게 되면서 정치에도 참여한다. 참정권을 가진 사람 수도 증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겪으며 식량부족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아테네를 중심으로 여러 식민도시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해안가에 위치했던 아테네는 배를 건조하는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장거리 무역이 가능해져 고대의 100톤 전후의 적재용량이 기원전 100년 이후에는 300~500톤에 이르는 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런 적재용량의 서서히 증가하면서 다양한 교역이 가능해졌고 무역으로 더 많은 부가 창출될 수 있었다. 교역의 발달은 동전과 같은 교역 수단을 만들어내고 자본의 축적과 거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게 했다. 선박건조의 기술과 함께 도구를 활용하는 기술의 발달이 있었다. 바퀴들과 기어를 활용한 물레방아를 만들면서 흐르는 물을 에너지로 바꿔 곡물을 빻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후 와인이나 올리브유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압착기 같은 도구가 만들어지면서 노동력에 지출되는 비용을 줄여 돈과 시간을 절약했고 생산성이 높아졌다.
호메루스가 지었다는 오디세이아는 주인공인 ‘오디세이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 이타케로 돌아가기까지 12년간 칼립소를 포함한 12지역에서 겪는 고난과 모험을 서술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떠돌던 경로 모두가 이런 그리스 식민지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