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7
수메르의 부
우리는 100cm를 1m라고 하지만 100분을 1시간이라고 하지 않는다. 60초가 모여 1분을 만들고 1분들이 모인 60분을 1시간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작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런 60진법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문명이라고 불리는 수메르문명에서 시작되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강을 가진 지역이다 보니 홍수로 강이 자주 범람했다. 이런 환경은 측량법과 수학, 태음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수레바퀴 60진법을 활용해서 천문학이 발전했고 쐐기문자를 통해 법전과 기록으로 그들의 역사를 남기는 등 수메르문명에서는 인류가 지금도 사용하는 수많은 기준을 만들었다.
쐐기문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특권층에 의해 독점된 문자였다. 주로 성직자나 귀족 같은 지배층과 부자들이 문자를 배웠다. 자녀들도 쐐기문자를 배워 사회지도층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에 의해 쐐기문자로 기록된 내용들은 점토판에 남아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채무나 거래처럼 계약과 관련된 내용이나 소유권처럼 권리관계를 나타내는 경제적인 내용들도 있다.
수메르는 우리가 자신들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도록 많은 양의 자료를 남겼다.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남겨진 25만 여점에 이르는 점토판은 수메르가 다른 지역의 문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부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당시의 수메르를 비롯한 문명은 농경에 기초하고 있었다. 곡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고 도시가 만들어지게 된다. 수메르 지역에서 번성했던 도시들 중에 우르(Ur)가 있다. 1922년부터 달의 신(神)인 난나르(Nannar)에게 받쳐졌다고 알려진 지구라트(Ziggurat)를 중심으로 시작된 발굴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발굴 작업을 통해 발견된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비롯해 우르의 주변에서 채굴되지 않는 보석들은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이는 우르가 얼마나 풍요로운 도시였고 지배층들의 삶이 얼마나 호화로웠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사원과 궁전을 비롯한 시설과 그들이 살았을 대저택에서 발견된 지배층의 계약과 거래에 대한 수많은 점토판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수메르의 또 다른 풍요의 상징에는 바빌론(Babylon)이 있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로 그 바빌론이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정복활동으로 많은 영토를 정복하였다. 수도였던 바빌론으로 정복지에서 전리품으로 들어오는 재화는 넘쳐나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지역에서 끌려온 노예들도 있었다. 관개시설의 발달은 노예들의 노동력과 맞물려 농산물의 생산량을 증가시켰고 잉여농산물은 적극적인 교역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었다. 교역은 상업을 발달시키게 되었고 단순한 물물교환을 넘어 거래의 기준이 되는 화폐가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빌론의 성장과 발전은 여러 나라와 왕조가 바뀌면서도 이어졌다. 신권이 강하던 시대여서 신전과 왕실로 편중되었던 경제였지만 바빌론은 오늘날의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시금석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당시 여러 나라의 수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했던 부를 누렸다. 오랜 시간의 영화도 페르시아에 점령되면서 쇠락을 맞게 되지만 이민족의 왕이었던 알렉산더마저도 도시의 매력에 빠져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바빌론은 또 한 번의 중흥기를 맞이하며 세계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바빌론이 쌓아올렸던 경제적인 부는 이후에도 중동지역의 경제 발전과 함께 이 지역을 기반으로 일어선 이슬람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바빌론이 차치했던 경제적인 부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시장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와 논문에서부터 개인의 부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다양한 글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게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