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의 브랜드 루벤스
철저한 분업화로 이룬 부(富)
종류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지만 약 2만여 개의 부품이 모여 하나의 완성품을 만드는 산업이 있다. 자동차산업이다. 물론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이 더 디테일하고 정교해지면서 앞으로는 더 많은 부품이 들어갈 것으로 보이지만 자동차의 기본적인 기능인 사람과 재화를 이동시키는데 작동을 하는데 필요한 부품도 적지 않다. 이렇듯 수많은 부품이 소요되다보니 한 대의 차량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이런 예상을 깨고 3분에 차량 한 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포드다.
소수의 사람이 소량 생산하다 보니 가격이 비쌌지만 컨베이어벨트와 분업을 활용해 자동차를 대량생산하자 생산성증가는 가격혁명을 만들어내며 자동차를 생필품으로 만드는데 기여한다. 분업화로 성공한 포드보다 300여년 앞서 분업화로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제품보다는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분업화를 활용해 같은 시기 활동을 하던 이들보다 많은 작품을 남긴다. 작품 활동을 했던 이들의 대부분이 죽어서 명성을 얻지만 운 좋게도 활동초기부터 명성을 얻었고 무엇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바로크시대에 활동했던 벨기에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 이하 루벤스)는 17세기를 대표한다.
강한 색감으로 표현하는 역동성과 관능미를 추구했던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를 비롯해 신화, 전설, 사료의 내용을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화가로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에서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잉글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활동한 지역에서 각국 각계의 실력자들의 초상화와 여러 의뢰를 받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당시 유럽의 정치적인 안정에도 기여를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것처럼 작품세계에서도 건축설계, 연회의 인테리어, 디자인, 섬유와 목판, 인쇄 등 자신의 재능이 발휘될 수 있다면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특히 판화나 책 디자인을 통해 결과물이 전달되는 곳으로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명성에 걸맞지 않더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을 알렸다.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자 1608년 이탈리아에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다. 주변에서 이 소식을 들은 왕, 귀족은 물론 당시 상업과 무역으로 부(富)를 쌓았던 네덜란드의 재력가들도 그에게 자신의 초상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글로 남기는 기록보다 회화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을 남기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의뢰받은 작품들이 전달될수록 루벤스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졌다. 안트베르펜에 정착한지 2년 만에 그동안 모은 수입으로 자신이 직접 설계한 이탈리아 풍의 저택을 지었다. 자신의 거처와 작업실로 사용했다.
남은 돈으로 중심가에 집을 구매하기도 한다. 그는 이후에도 의뢰받은 작품을 완성하고 받은 수입으로 주변의 부동산을 구입하는데 사용한다. 주변의 건물과 성(城), 농지를 구입했다. 이런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덕분이었다.
루벤스는 자신이 작품을 직접 그린 경우 있었지만 얼굴이나 손 같은 특정부분만 직접 그리거나 자신의 감독 하에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루벤스의 명성을 따라 배우려고 찾아갔던 견습생을 100여명에 가깝게 두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다. 루벤스는 자신의 스케치 위에 배경, 옷, 얼굴, 각종 장신구를 전담하는 작가를 두었다. 작업의 전체적인 구상이나 디자인은 자신이하지만 각 부분을 채워 넣는 것은 제자마다의 재능을 살려 단계별로 배치시켰던 것이다. 각 과정의 채색이 마무리되면 루벤스는 눈앞의 놓인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단순한 표현인 옷, 배경과 달리 얼굴과 손처럼 피부가 드러나는 곳은 직접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어가는 자신의 명성이자 브랜드였던 루벤스의 서명이 들어갔다.
이런 방식은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고 제자들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도 있었다. 완성도가 높아진 덕분에 작품전체의 수준도 올라갔다. 자신의 제자들에게서 소화되지 않아 외주를 주는경우도 있었다. 배경에 들어가는 동물이나 정물분야는 당시에 유명했던 화가의 손길에 의지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생산(?)하다 보니 루벤스의 서명이 들어간 작품의 수도 1400여점의 드로잉을 제외하더라도 1600여점의 작품을 남기게 된다. 이를 두고 호불호가 있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분업화를 통해 그는 다른 대가들이 생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엄청난 부(富)와 명예를 누렸다는 것이다. 그가 누렸던 부는 당시 귀족들에 비해 최소2배에서 최대 5배에 이를 정도의 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