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돌고돌아 침략으로 돌아오다
일본의 은(銀)
세계역사에서
은이 차지하는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볼리비아의 포토다.
채굴양이 엄청나다보니
은을 채굴하기 위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한정적인 시간에
많은 은을 채굴해야했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이려면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의 희생이 있었다.
모인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된다.
세계사에 길이 남은 포토시가 있다면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에서도
이런 역할을 한 곳이 있다.
바로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석견은산, 이와미긴잔)이다.
지금의 시마네현(島根縣) 오다시(大田, おおだ, Ōda)에 있는 은광 유적으로
사업성이 떨어져 1943년에 폐광된 곳이다.
일본이 가진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 하나(2007년에 지정)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은광을 비롯해 주변을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
은을 채굴하던 사람들의 거주지와 그들이 다니던 사원,
항구까지 운반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 포함된 14곳의 유적이
2007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와미 은광 주변에사는 주민들 사이에
노천으로 드러난 은을 채굴하던 것이 전부였던 것이
오우치가문의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 おおうち よしおき)의 지원을 받은
가미야 주테이(神屋寿貞)가
무로마치(室町)시대의 말기인 1526년부터 채굴을 시작한다.
이후
전국(戰國)시대를 거쳐
도쿠가와(德川)가문의 에도(江戸)시대 초기까지
일본 내의 은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참고로
은광개발을 지원한 오우치(大内)가문은
일본 중세에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명문가로
대부분의 씨족이 일본의 위인을 시조로 언급하지만
오우치 씨는 백제(성명왕 혹은 위덕왕의 셋째 아들인)의 임성태자(琳聖太子)가
자신들의 시조라며 백제계임을 주장하는 씨족이다.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웬만해서는 주장하기 힘듦-
채굴된 은(銀)원석을 통해
오우치가문은 막대한 부(富)를 쌓게 된다.
더군다나 조선에서 전해진
추출하는 방법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같은 양의 원석에서 더 많은 은을 추출하게 되었고
이는 은광을 차지하려는 주변세력의 욕심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당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던 시기로
일본열도가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전국시대로 가는 길목에 있던 상황이었다.
세력을 키워야했던 주변의 영주들에게
‘이와미 은광’의 은의 재력(財力)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와미 은광을 탐낸 곳은
아마고 가문이었다.
1537년에 바로 옆 동네인 이즈모(出雲, いずも, Izumo) 의
아마고 츠네히사(尼子経久, あまご つねひさ)는
시기를 보던 중 ‘이즈모의 늑대’라는 별명답게
오우치 요시오키가 영지를 비운 틈을 노리고 쳐들어가
광산을 점령한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한 오우치가문은
2년 후에 은광을 탈환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마고 가문은
2년 후 다시 쳐들어와 은광을 점령한다.
이들의 다툼을 끝낸 것은
모리가문이었다.
모리가문의 영주였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もうり もとなり는
전통강호 오우치가문과 신흥강호 아마고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겨우 가문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세력의 균형이 깨지는 시류의 흐름을 잘 타면서
1561년에 두 가문을 모두 평정하고
주고쿠지방(中国地方, ちゅうごくちほう)의
새로운 패자가 된다.
당연히
은광도 모리가문의 것이 된다.
이후
20여 년간
은광에서 나오는 은으로
막대한 부를 쌓게 되고
광산의 주변지역까지 발전되면서
지역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패자(覇者)가 된다.
당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맞설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와미 은광에서 나오는
부(富)의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戰國)을 통일하면서
그의 압력에 의해
이와미 은광은
도요토미 가문과 모리가문의 공동소유로 바뀌게 된다.
이와미 광산의 은이
도요토미에게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은으로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다량의 조총을 구입하게 된다.
조총은
일본내부에서 계속되던 반란을
잠재우기도 했지만
결국 내부 혼란과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
조선에게 총구가 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