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이후 홍콩, 잉글랜드

마약을 팔기 위해 도발했던 잉글랜드와 마약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칭

by 필립일세

아편전쟁 이후 홍콩, 잉글랜드






청(淸, Qing)나라와의 아편전쟁(鴉片戰爭, 잉: OpiumWars)에서 승리한 잉글랜드는 전리품으로 얻은 ‘홍콩(Hongkong, 香港)’ 섬과 ‘구룡(九龍)’ 반도(半島)일대를 새로운 식민지로 삼으며 자유무역항으로 지정했다. 홍콩은 중국무역을 위한 잉글랜드의 교두보이었기에 USA와 오세아니아, 유럽을 중계하는 무역과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홍콩의 지리적인 위치는 당시 잉글랜드의 전 지구적 식민지 통치를 위해 꼭 필요한 핵심이었다. 홍콩의 활용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잉글랜드는 ‘사회간접자본(SOC)’을 적극적으로 투입했다. 1887년 이후 간척사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67㎢의 땅을 넓히는가 하면 육상 교통에 필요한 도로와 다리를 비롯해 해상교통의 활성화를 위한 항만건설과 준설작업 등에도 많은 자본을 투입하며 무역항에 알맞은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아편전쟁을 승리한 잉글랜드는 홍콩의 항만을 이용해 중국의 개항지에 대한 아편무역도 계속 유지했다. 잉글랜드는 남북전쟁이 발발하며 발생한 혼란으로 신대륙에서 면화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중국산 면화를 유럽으로 수출하는 중계 무역항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저렴한 인건비로 가격경쟁력이 있던 중국의 면직물도 함께 취급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게 된다. 모든 이익은 잉글랜드의 몫이었다.






이후 일본과 조선도 순차적으로 개항을 하면서 홍콩의 역할은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의 거점으로서 역할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지리적인 장점은 무역항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자본이 움직이는 데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는 계기가 된다. 동아시아와 인도차이나,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자본으로 축적했고 무역과 관련한 자금을 중개하는 회사들이 설립되면서 홍콩은 무역항을 넘어 동아시아 금융 산업의 중심지로 주목받게 된다. 1891년 세워진 홍콩의 증권거래소시장은 중계무역과 수출기업의 성장으로 자본이 몰리면서 더욱 성장하여 오늘날 홍콩의 부(富)를 상징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2020년을 기준으로 현재 시가총액으로는 세계 5위수준의 규모이고 아시아에서는 상하이거래소와 도쿄거래소에 이어 3번 째 규모를 자랑한다. -대한민국은 참고로 세계 13위, 아시아 7위에 랭크되어 있다.-






세계사의 흐름으로 인해 잠시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잉글랜드가 다시 탈환하면서 본격적인 홍콩의 제조 산업이 성장하게 된다. 잉글랜드가 다시 홍콩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당 정부와의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본토에서 발생한 국공내전으로 국민당정부가 와해되면서 갈등이 흐지부지되었지만 중국본토가 공산화되면서 불안한 정세의 변화도 있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의 6.25전쟁으로 인해 전쟁 물자를 제외한 중계무역이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하지만 이는 홍콩이 변화하는 계기를 만든다. 중국의 공산화를 피해 많은 인구가 홍콩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는 노동력이 증가하면서 상대적으로 비용이 감소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또 중국의 부호들이 홍콩으로 이동하면서 홍콩의 자본력까지 증가해 노동집약적 산업인 섬유산업이 홍콩에 자리를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홍콩의 공업화는 홍콩을 중계무역의 거점뿐만 아니라 수출산업을 통한 거시경제적인 이익과 부(富)를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들어 중동 정세의 불안으로 인해 전 세계가 겪은 석유 파동과 보호무역확산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자 교역량이 줄어 홍콩의 경제가 잠시 주춤하지만 기존의 섬유, 플라스틱, 신발 같은 경공업위주의 산업구조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기술 집약형 산업으로의 전환을 꾀한다.






1978년 12월 18일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회의에서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은 개혁, 개방을 선언하고 USA와 1979년 1월에 역사적인 공식 수교를 맺는다. 그 영향이 홍콩에도 미쳐 가까이에 있는 선전(深圳, 심천)시와 광둥(廣東,광동)성, 푸젠(福建, 복건)성과 경제협력을 시작한다. 홍콩의 인건비 상승으로 제조사들은 공장을 이들 지역으로 이동시킨다. 생산 공장이 세워지자 이들 지역은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홍콩의 기술과 자본이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을 만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본토와 홍콩은 동반성장을 하게 된다.






잉글랜드는 중국과의 외교적 실패로 홍콩을 돌려줘야했지만 1997년 6월 30일. 홍콩이 중국으로 이양되기 전날까지 잉글랜드는 홍콩을 통해 많은 경제적 이익과 부(富)를 맛보았다. 홍콩의 중국이양을 앞두고 공산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많은 자본과 기술을 가진 인력이 해외로 유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1국 2체제를 유지하면서 홍콩은 최근까지도 아시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홍콩은 잉글랜드로부터 이식된 자본주의 DNA를 훌륭하게 지키고 있다. 그 과실을 이제는 중국에서도 적절히 즐기고 있다. 홍콩은 무역과 관련된 비즈니스와 해운, 금융과 관련된 은행과 투자업무, 부동산에 대한 권리 같은 자본시장 여건과 노동의 유연성, 정부의 부정부패·통화당국의 제어력 등을 수치화한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과 ‘헤리티지 재단의 경제자유의 지수(Heritage Foundation's Index of Economic Freedom)’에서 경제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세계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노란 우산 시위’를 통해 중국정부의 간섭을 비판하는 시위가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혼란을 불러왔고 정치 분야의 민주화 요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아시아 금융시장에서의 홍콩의 지위도 조금은 흔들리고 있다. 홍콩의 진출해있는 세계적인 금융회사들 중에는 싱가포르와 서울, 도쿄 등으로 일부 사업 분야를 이전하려는 분위기도 있다. 중국의 변두리 중에서도 변두리였던 홍콩과 구룡반도는 혼란스러웠던 역사 속에서 ‘동양의 진주’로 빛을 발했지만 또 다른 미래의 새 역사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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