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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Nov 17. 2022

커피요약

콩 자루는 돈 자루가 되었다.

콩 자루는 돈 자루가 되었다.   

※참고->얼마 전 '인물과사상사' 통해서 출간한 '그림으로배우는경제사'내용의 일부입니다.






 1683년 7월 17일 빈을 점령하기 위해 겹겹이 주위를 포위했던 오스만 투르크(이하 오스만)의 대군이 1683년 9월 12일 유럽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해 가져왔던 물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게 된다. 약 60일 동안 지속되었던 공방전이었지만 더 오랜 시간을 대비해서 군수물자를 챙겨오다 보니 물량이 많았다. 전투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물품부터 평소의 생활을 위해 사용하는 물건까지 품목도 꽤 다양했다. 그들이 놓고 간 물건 중에 갈색 자루 수백 개도 있었다. 안에는 콩처럼 생긴 것이 담겨있었다. 평상시였으면 사람들은 콩 자루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오스만이 도망간 주둔지에는 이국(異國)의 비싸 보이는 신비한 물건이 수두룩하였다. 자루 안의 담긴 콩보다는 번쩍이는 물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사람들은 몰랐다. 자루에 담겼던 콩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와 역할 외에도 당시에 오스만이 두고 간 재화 중에서 그 어떤 물건보다 가치가 있는 재화였다는 것을 말이다. 자루에 담겼던 콩을 사용해서 만든 음료로 당시에는 특정계층의 입맛을 사로잡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구분은 의미가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계층의 차이는 물론 인종의 차이마저도 소용없을 정도로 세계인의 입을 훔치게 되면서 이익도 불어나 막대한 이익을 남기게 된다.  






 이 콩은 AD6~7세기경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양을 치던 어린 목동 '칼디(Kaldi)'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콩은 이용법과 함께 주변으로 널리 퍼졌다. 에티오피아는 525년 홍해건너에 있던 예멘을 멸망시키고 지배하게 된다. 이로 인해 홍해 제해권은 악숨 왕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솔로몬의 자손이라 불리는 악숨(Axum) 왕국이 전성기를 누리며 다스리고 있었다. 이런 여건으로 콩이 에티오피아에서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예멘에서 재배한 콩이 주변 지역과의 무역에서 인기를 얻는 품목이 되자 악숨 왕국은 다른 지역에서는 이 콩을 재배하지 못하도록 방법을 강구했다. 콩을 수출하기 전에 종자를 불에 볶아서 재배할 수 없도록 만든 뒤에 수출하는 꼼수를 부렸다.






 이런 꼼수로 인해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된 콩은 유럽에서 재배되기 전까지 약 400여 년간 예멘에게 독점적인 부(富)를 안겨준다. 예멘에서 콩의 종자와 묘목을 관리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부(富)를 대물림하는 것으로 간주 될 정도였다. 볶은 콩을 곱게 갈아 그 위에 물을 부어내려 마셨던 이 음료는 후에 카흐와(quhwa)와 카흐베(kahve)로 불리며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네덜란드어로 코피(koffie)라 불린 음료는 1582년 ´모르겐란더의 쌀´이라는 저서에서 ‘커피(coffee)’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포도주가 로마세력의 확장과 함께 했듯이 아랍지역에서 성장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를 비롯해 발칸반도까지 확장되면서 커피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해 북아프리카를 지나 남유럽까지 전해지게 된다. 십자군원정으로 유럽에 일부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동방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베네치아를 거점으로 본격적인 유입이 되면서 알려지게 된다.






 그렇다보니 여러 차례의 갈등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 이슬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악마의 콩’이라고 부르며 저주했다. 심지어는 유럽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교황에게 공식적으로 금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도 한다. 1600년경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커피를 맛 본 뒤 이 음료를 이교도에게만 마시도록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대를 무릅쓰고 커피에게 축복을 내렸다는 풍문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를 타고 커피는 유럽에 곳곳에 급속한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돈을 버는 수단이 되었다.






 초기에는 커피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유럽의 상황으로 인해 소비되는 커피의 양이 증가하는 만큼 커피를 생산해서 수출하던 예멘의 부(富)도 증가했다. 커피 소비량만큼이나 모카와의 무역량이 증가하다 보니 무역항인 모카의 이름까지 유명해져 유럽에서 커피와 모카는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했다.






 커피를 유럽으로 실어 나르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계무역만으로도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원두의 값어치를 알았기에 예멘이 쌓아가는 부의 크기가 큰 만큼 이를 바라보던 네덜란드의 욕심도 커졌다. 예멘의 독점적인 지위를 깨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네덜란드 상인 피터 반 덴 브뢰케(Piter van dan Broeck)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저지른다. 1616년 예멘의 항구 모카에서 볶은 커피를 가지고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배편으로 예멘에서 수출이 금지되었던 종자와 묘목을 숨겨 오게 된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유럽에 뿌리내린 커피나무는 이후 유럽에서 이루어질 커피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된다. 무역으로 인한 비용이 줄어들어 가격경쟁력이 생긴 네덜란드 커피를 찾는 사람은 증가했고 예멘에서 수입되는 원두의 양이 줄어드는 만큼 네덜란드 이익은 증가했다. 이는 새로운 유행을 낳았고 가까운 잉글랜드를 비롯해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도 커피가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1636년 차가 잉글랜드에 보급되면서 그 인기가 잠시 주춤하지만 수요가 증가하는 커피의 인기를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퇴각하며 놓고 간 콩 자루는 오스트리아 빈(Wien)에 ‘커피하우스(Coffee house)’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전역에 빈 스타일의 커피하우스가 퍼졌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다양한 사람에 의해 다양한 거래와 이야기가 오갔다. 잉글랜드에서는 커피하우스에 여성의 출입이 금지되었었다. 이는  여러 부차적인 문제를 만들었다. 커피를 마시느라 남편이 집에 오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부인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남편을 빼앗아간 시기와 질투로 인해 다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680년대 인구가 약 50만이었던 런던에 3천여 곳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는 점을 봤을 때 소비되는 커피 양과 그로 인해 파생되어 움직이는 돈은 숫자로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던 남성들 중에는 무역상들도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부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무역을 위해 투자 유치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보험이 탄생한 곳이 바로 커피하우스였다. 1670년 프로이센에도 커피가 전해지게 된다. 여성은 커피하우스에 갈 수 없어 여성의 인기를 끌지 못했던 잉글랜드와 달리 프로이센에서는 남성의 지지를 뛰어넘어 여성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음료로 각광을 받았다. 커피를 수입하던 프로이센은 과도한 소비량으로 인해 늘어나는 수입물량이 국고 유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그로 인해 1777년 프리드리히 2세는 일시적이긴 했지만 커피 금지령을 내리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한 나라의 재정에 부담과 위협을 가할 정도로 유럽에서 커피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에 못지않게 커피가 움직이는 돈의 크기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사치스러운 기호 식품이던 커피는 시간의 여유가 많은 귀족이나 상류층에 진입하기 시작한 자본가가 즐기던 음료였다. 신분을 상징하는 커피를 즐기기 위해 사용하는 돈도 꽤 많았다. 잔에 담긴 커피가 테이블에 놓이기까지 재배부터 운반까지 모든 과정은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 거리였고 그로 인해 부(富)를 쌓은 이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많아졌다.  






 1600년대 5억 8천여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2022년 월드메터(Worldometer) 기준 80억에 육박하고 있다. 인구 못지않게 당시와 비교하면 커피를 즐기는 사람의 비율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많은 사람이 즐기는 커피로 인해 움직이는 뭉칫돈의 크기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거래량으로 유명한 것이 원유인데 그 다음으로 거래량이 많은 것이 커피를 만드는 원두라는 사실은 이를 정확히 입증해주고 있다. 현대인에게 커피는 단순한 기호음료로서의 가치를 넘어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는 매개체 역할로도 활용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커피는 누군가에게는 소통을 주지만 누군가에게는 막대한 부(富)는 쌓는 중요한 재화다. 독자분도 주변을 잘 관찰한다면 자신만의 부(富)를 쌓을 수 있는 재화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여러분의 행운을 기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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