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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l 20. 2023

네덜란드 금융의 영향을 받은 잉글랜드

네덜란드 금융의 영향을 받은 잉글랜드     






 잉글랜드를 절대왕정에서 의회주의로 만든 대표적인 사건이 청교도혁명(1642~1651년)과 명예혁명(1688년)이다. -최근에는 청교도혁명이라는 표현보다 잉글랜드 내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청교도 혁명이 종교와 정치적 이슈에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두 사건의 실질적인 원인은 모두 돈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왕이 세금을 걷으려고 하자 왕에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귀족과 젠트리 같은 자본가는 힘을 합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의회라는 곳을 세웠다. 발언할 곳을 얻자 나라 전체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권력을 잡은 소수 집단이 왕을 쫓아내거나 죽여 이익을 보전하는 사건들이다.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관점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어린 시절의 우리가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기를 원했던 교육부 의도아래 두 사건이 잉글랜드의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 잡고 성장해 가는데 기여한 아름답게 역사라고 배웠다. 실제는 국교회와 의회가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던 권력의지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왕에 대항한 것이었다.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참수를 하자 왕족들은 잠시 프랑스로 망명을 한다. 크롬웰에 의해 공화정이 시행되지만 크롬웰 사후 1660년 찰스1세의 아들인 찰스 2세에 의해 왕정은 복고된다. 복고 후 의회는 새롭게 시작된 왕실의 재정을 위해 난로세를 비롯한 여러 세금을 부과했다. 의회와 매끄러운 밀당(?)으로 어느 정도의 협치를 구현한 찰스 2세는 동생인 제임스 2세의 도움과 협력까지 이끌어내며 큰 분란 없이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이때 제임스 2세는 형을 도우며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가톨릭적인 면을 모두 숨길 수는 없었다. 그가 국교회보다는 가톨릭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버지 찰스 1세가 사망한 이후 망명했던 프랑스와 동맹이었던 에스파냐에서 지내면서 가톨릭과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왕비와의 후사가 없던 찰스 2세가 1685년 2월 6일 사망하자 국교회의 심장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1685년 4월 23일에 가톨릭신자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른다. 1688년 6월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두 번째) 왕비가 제임스2세의 아들을 낳는다. 제임스 2세가 사망하면 국교회를 지지하던 그의 딸 메리나 앤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국교회와 의회는 가톨릭을 믿는 왕비가 낳은 아들이 갑작스럽게 출현하자 달가워하지 않았다. 의회는 네덜란드를 다스리던 메리공주의 남편 빌럼 3세(이하 오라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신교도였던 메리와 그녀의 남편 네덜란드 통치자 오라녜에게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와 왕이 되어달라는 내용였다. 






 겉으로는 신교에 기반을 둔 잉글랜드의 평화와 정치적인 안정을 말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교로 최적화되어있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방향이 다른 왕을 제거하는 것 외에는 없어보였다. 오라녜와 메리는 고민을 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잉글랜드마저 가톨릭 국가가 되면 신교의 나라 네덜란드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위협이었다. 오라녜와 메리는 1688년 11월 5일 1만 5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한다. 군대 외에 유대인도 상륙한다.






 제임스 2세는 급하게 전달된 서신을 받게 된다. 서신에는 자신의 조카이자 사위인 오라녜와 딸 메리가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를 듣자 제임스 2세는 전투준비를 하였지만 국교회를 믿던 병사들이 이탈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제임스 2세는 12월초가 되면서 왕비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로 도피하고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의회는 제임스 2세가 떠난 자리에 오라녜(이하 윌리엄 3세)와 메리(이후 메리 2세)를 공동왕(共同王)으로 추대하였다. 의회는 이들에게 왕의 권력이 법위에 있지 않다는 것과 의회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승인받는다. 이제부터 국가를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경비는 매년 의회의 의결을 거쳐야했다. -매년 한 국가의 운영에 소요되는 예산을 의회가 결정하는 것은 이런 전례에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절대왕정의 선대(先代) 왕들이 대외 전쟁에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부족한 돈을 구하기 위해 왕실과 정부가 가진 재산을 너무나도 헐값에 넘기면서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잉글랜드의 왕이 된 윌리엄 3세에게 가장 먼저 닥친 문제는 재정적자였다. 국고는 바닥을 보였고 의회와의 갈등이 뻔한 상황에서 세금을 올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1690년 프랑스와 겨루었던 비치 헤드 해전(Battle of Beachy Head)에 잉글랜드가 패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해군력을 강화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윌리엄 3세는 1692년 네덜란드에서처럼 국채를 발행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통치자였던 왕에게 빌려주는 방식이 아닌 국가가 채권을 발행해서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의회가 국채발행에는 동의를 해주었으나 발행한 국채를 소화할 시중자금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윌리엄 3세는 자신과 함께 잉글랜드로 넘어온 유대인들과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의논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금융 분야에서 종사했던 이들은 잉글랜드가 오늘날의 금융선진국으로 우뚝 서게 만들어주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실행해보자고 제안했다. -런던이 오늘날 세계 금융시장의 한축으로 성장한 모습은 이런 아이디어들을 실행하면서 발생한 시행착오들을 보완하고 또 보완하면서 가져온 결과물이다.- 






 유대 금융인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잉글랜드에게 있어 자신들은 외부인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천시를 받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수적인 잉글랜드에서 자신들이 앞장설 경우 불어 닥칠 파장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금융인을 앞에 내세워 전쟁기금을 모금하는 단체를 세우고 비용을 조달하기로 한다. 단체에 모인 자금으로 국가가 발행한 채권을 매입해 정부에 돈을 지원하고 부족한 부분은 은행권을 발권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런 금융기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은행권을 발행할 주체가 필요했다. 이는 사안이 급했던 만큼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1694년 주식공모로 투자자를 모아서 민간중앙은행을 설립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곳이 바로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잉글랜드의 금융은 유대인이 장악하게 된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유화 될 때까지 민간은행으로 유지되었다.- 






 전쟁비용을 확보한 윌리엄 3세는 이를 가지고 군세를 확장했다. 그리고 이어진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한동안 조용히 지냈고 잉글랜드는 프랑스가 피해를 회복할 때까지 안전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 금융혁명은 네덜란드에서부터 금융 시스템에 대한 경험을 축적한 유대금융인들이 주도하였다.






 윌리엄 3세 때부터 시작된 잉글랜드은행의 역사는 잉글랜드의 대외 활동에 모터를 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자금조달을 하려고 국채를 발행할 때마다 영란은행은 국채를 인수해서 정부가 원하는 자금을 지원하는 금고역할을 담당했다. -잉글랜드은행은 보유한 채권은 다시 할인하여 유동화를 하여 시장을 통해 국민과 기업에 매각해서 시중의 자금을 확보했다. 시장에서 확보한 자금은 다시 영란은행의 자산이 되어 잉글랜드정부가 국채를 발행했을 때 국채를 사들이며 정부에 자금을 제공했다. 이러한 순환 고리는 잉글랜드의 함대가 5대양 6대주를 누빌 수 있는 경제력을 제공했다. 금융의 힘은 ‘자금의 순환’이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잉글랜드은행이다. 

  풍부해진 자금동원력은 이후의 잉글랜드의 발전 속도를 아기걸음에서 성인의 걸음을 넘어 증기기관의 속도로 성장시킨다. 잉글랜드가 나중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장악하고 전 세계의 식민지를 경영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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