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자본과 부(富), 문화가 움직이던 초원길 그리고 오늘, 나
고대의 자본과 부(富), 문화가 움직이던 초원길 그리고 오늘, 나
독특한 환경을 가진 곳이 있다. 북쪽은 극한 추위를 안기는 영구동토의 시베리아가 있고 남쪽은 극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사막지대가 있었다. 모두 생명이 살아가기 쉽지 않은 극한 환경이다. 그 사이의 실낱같은 경계에서 그나마 다양한 모습으로 생명 활동이 유지되었다.
높고 낮음이 없어 이동에는 편했으나 평평한 지형은 수분을 저장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건조한 기후다 보니 물이 필요한 농사를 짓기는 어려웠다. 부족한 수분이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돋아나는 풀이 있었기에 그나마 가축에게 먹이며 목축은 이어갈 수 있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대지에 돋아난 풀이 하나의 길을 이루며 끝없는 초원이 이어졌던 이 길을 많은 이가 ‘초원길’이라고 부른다. 초원길은 대규모로 무역이 이루어지는 비단길(실크로드)보다 최소 2천 년 이상 앞서는 역사를 품고 있기에 고대의 역사를 파헤치는 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태평양과 댜뉴브 강의 하구까지 이어져 있어 중국과 만주 일대와 동유럽이 교류하는데 기여했다.
동부와 동양(이하 아시아)과 서양(이하 유럽)을 잇는 약 10,000km에 이르는 길이의 초원길이 있어 고대의 문화권이 소통을 할 수 있었고 말과 비단, 자기, 모피와 보석(옥, 터키석 등) 같은 교역품이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런 교역은 농기구와 무기, 서적 같은 기술과 학문이 주변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교류의 영향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의 대규모 이동을 낳았고 로마의 쇠퇴의 시작과 멸망으로까지 이어진다. 몽골은 러시아를 지배했고 헝가리까지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흑사병이 유럽으로 전래되었다는 주장하는 학자도있다. 또 투르크의 이동은 훗날 동로마의 후예인 비잔틴의 멸망에도 영향을 준다. 비잔틴의 멸망으로 외부세력의 방패가 사라진 유럽은 한동안 혼란을 겪어야 했다.
농경으로 살아가는 지역에서 물이 생명을 좌우하듯이 유목으로 삶을 이어가는 초원 지역에서는 계절마다 바뀌는 목초지가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풀을 따라 일 년에 몇 번씩 이동해야 했던 유목민들에게 기록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짐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이유로 유목민들에게 붙였던 명칭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이들은 흉노(훈)와 돌궐(투르크), 몽골로 불리며 세상의 역사에 거대한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몽골 초원을 가로지르는 초원길은 북방 민족이라고 불리는 유목민이 이동하던 이동로였다. 이들의 주거 이동에 따라 다양한 지역의 환경에 따른 문화와 기술이 교류되어 새로운 문물이 만들어졌다. 특히 우리 민족의 전성기와도 연결되어 있다. 드넓은 만주와 몽골지역에서 활동하던 고조선을 비롯한 우리의 조상이 강성하던 시절이 바로 초원길을 통한 무역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 고조선이 강성하던 시절 한족은 물론 중국에서 발흥한 국가는 고조선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조선은 중계무역을 통해 중국지역을 압박하기도 했다. 이후 한나라의 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면서 판도가 바뀐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은 비단을 서역으로 보내면서 비단길(실크로드)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후 모든 문물이 중국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고조선을 비롯한 우리의 조상들의 세력이 위축되었다.
반대로 중국의 왕조는 비단길을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서역과의 왕래가 잦았고 다양한 제도와 문물를 직접 받아들이며 발전을 거듭했다. 중국에서 발흥한 왕조들이 세력을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우리와 북방민족의 세력은 약해진게 사실이다. 그렇게 긴 시간 중국에서 발흥한 나라가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가져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길은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는 다니는 단순한 길로 보이지만 그 길에서는 나라와 민족의 흥성쇠망의 흐름이 이어진다.
길은 단순하지 않다. 이후 비단길보다 초원길이 강성해졌을 때 요가 중국을 압박했고 금이 뒤를 이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뒤를 이은 몽골은 동쪽 끝에서 서쪽까지 내지르며 유럽의 연합군대를 무너뜨리고 유럽이 몽골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여러 유적에서 초원길의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에 초원길을 통해 주고받은 기술과 수많은 문헌을 통한 지식은 각지로 흩어져 세상의 발전을 이끌었다. 건축가와 도예가, 목수, 보석세공업자와 연금술사 또는 야금학자, 화가를 배출했고 세상의 부(富)가가치를 만들어냈다. 시간은 지식이 부의 흐름을 타고 세상에 흘러다니며 패권을 만들고 부를 만들어냈다.
필자는 가끔, 지구본을 통해 유라시아를 바라본다. 유라시아라는 대륙은 각 지역에서 세를 이룬 세력 간에 ‘부의 경쟁’이 벌어지던 거대한 ‘판(版)’이었다. 이를 알고 독식하려 했던 이들이 있다. 알렉산더가 그랬고, 이슬람의 여러 왕조와 몽골이 그랬다. 이런 이유로 유라시아는 서양(유럽)이 ‘신항로 개척’이라는 바다를 활용한 활동이 활발하기 전까지 전 지구에서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면서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던 곳이다, 동양(아시아)과 서양(유럽)에서 각각 벌어지던 지역적인 경쟁의 판을 글로벌 규모로 확대하여 부가가치를 키우기 시작한 게 바로 ‘초원길’이다. 판의 확장은 영토와 정치적인 경쟁으로 벌어지는 전쟁보다는 교류와 교역으로 상호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적인 목적이 주였다. 이는 ‘부의 기회’로 찾아왔다.
초원길을 통해 이루어진 교류로 서로에게 없어 희소했던 물건의 희소성은 가격상승으로 이어졌다. 가격상승은 물론 가치까지 인정받아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이치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이 이치는 시장의 흐름에서 결핍과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는 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만든 비단길(실크로드)이라는 새로운 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초원길을 통해 당시의 생활에 바탕이 되는 물자부터 부를 상징하는 사치품 같은 유형의 재화는 물론 신지식과 신기술, 신문화처럼 세상을 이끌어가는 무형의 자산까지 다양한 형태의 문물이 교류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화학적인 결합을 통해 다양한 모습의 부(富)와 패권을 창출해냈다. 초원길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던 몽골과 만주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우리의 조상은 여러 형태로 이에 대한 수혜를 받았다.
이런 판을 읽은 이가 있었다. 이런 판을 읽었기에 한(漢)나라의 무제는 판을 바꾸기 위해 선택한 것은 서역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무역로를 바꿔야 부의 종착점을 한나라로 할 수 있다는 판을 읽는 판단을 한 것이다. 방향성이 정해지자 결국 무제는 장건을 파견하여 현지 국가와의 지속적인 교류와 흉노를 정벌하는 지속적인 원정을 했던 것이다. 이 결과로 결국 초원길은 쇠퇴하고 비단길이라는 새로운 길이 ‘부(富)의 판(版)’을 바꾸게 된다. 이는 초원길에 의지하던 북방의 유목민족의 쇠퇴와 몽골과 만주일대에서 활동하던 우리의 조상에게도 영향을 주어 동아시아의 패권이 중국이라는 곳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예시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개인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처음에는 내가 가진 백지의 모서리를 할애해 기존의 질서대로 남들이 하던 길을 따라가며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채우는 게 중요하다. 다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백지의 나머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발상을 조금씩 결합해 서서히 키우고 확장해 나아간다면 나만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세상이 자본주의이기에 이를 통해 이뤄야 하는 게 부라면 부(富)를 이루면 될 것이고 내가 이루려는 게 꼭 부가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접근을 통해 세상의 가치를 새롭게 한다면, 그 또한 세상에 내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