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당모의 (作黨謀議)
이력(履歷)이란,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과 직업, 경험 등의 내력을 비롯하여 많이 겪어 보아서 얻게 된 슬기를 뜻한다. 우리가 설령 실패하더라도, 실패했던 과정까지 잘 기록하여서 '해왔던 일의 의미'를 잊지 않고 모든 순간이 '이력'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의 개발과 성장 과정을 기록해보려 한다.
조선 선조 시기 무신(武臣)이었던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처럼, 그날의 기상 변화, 점심 메뉴 선정, 업무에 대한 고민, 본가와 모친에 대한 걱정, 개발 과정에 도움을 줬던 조력자들의 코멘트까지 기억날 때마다 섬세하게 한 번 기록해보고자 한다.
2022년 9월 13일(화)의 기록.
*게임 디렉터(Game Director)를 맡은 첫 프로젝트의 실패 이후 다음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있던 날이었다.
실패 이후 재도전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첫째로, 나 스스로가 과거에 얽매여서 위축되지 않아야 하며, 둘째로, 실패했던 프로젝트의 상황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시장의 상황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키워드와 기획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게임 디렉터(Game Director) : 회사마다 역할은 다르나 보통 게임 제작을 총괄하는 담당자를 지칭
코로나-19로 전 세계 사람들의 독립적인 생활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여전히 많은 게이머들이 친구 또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연결되어 게임을 즐기는 멀티 플레이어 게임(Multi-player game)의 수요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게이머이자 게임을 만드는 나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기작은 멀티 플레이어 게임을 만들어보겠다 다짐했다.
이전 프로젝트를 통해 배운 점과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 실수를 정의하였으며, 팀의 규모가 작지만 이 작은 팀의 게임을 통해서도 한 단계 진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여러 가지 물음을 가지고 고민했다.
커뮤니티 중심의 게임
- 길드(Guild) 이상의 단단하지만 느슨한 커뮤니티를 만들 수 없을까?
자발적 이벤트 참여의 게임
- 유저들은 여전히 퀘스트(Quest)라는 시스템을 반기고 있으며, 지표상 도움을 주고 있는가?
자발적 스트리밍 플랫폼 게임
- 여전히 크리에이터(Content Creator)의 영향력이 강세인 상황에서 그들이 우리 게임을 통해 콘텐츠를 생산해 낼 거리들이 마련되어 있는가?
2022년 9월 20일(화)의 기록.
"우리가 게임을 계속 만드는 게 맞을까?"
'게임 개발'이라는 직종은 참 독특하다.
<카트라이더>, <메이플스토리> 등 성공적인 IP를 만들었던 넥슨의 연봉 인상 바람이 있었던 해의 1년 전인, 2020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대부분의 신입 연봉은 최저임금에 맞먹었다.
그럼에도 1)'게임 개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와 2)적은 임금의 게임 제작 어시스던트 과정을 인고하며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게임과 가상 세계를 전 세계 사람들이 재밌게 즐기는 상상과 로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면 가장 괴로운 일은 나중에 삶이 지칠 때 도피할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매출 성과가 좋지 못한 팀이 유의미한 반등 없이 오랫동안 운영 되면서, 업무 강도와 업무 성과 측면에서 함께 일하고 있던 동료들의 신세한탄이 조금씩 커져갔고, 신세한탄은 업무라는 울타리를 넘어 직업 가치관의 영역까지 건드리게 되면서 때로는 동료들의 자존감이 떨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2022년 9월 22일(목)의 기록.
회사에서 팀마다 한 달에 한 번 법인카드 사용 찬스가 있었었는데,
그때마다 저희 팀은 한도 내에서 알차게 맛집을 돌아다녔다.
이번 9월의 회식이 팀의 마지막 회식이 될 것이라는 육체적인 직감이 있어, 지금까지 저희 프로젝트를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감사한 조력자 분들까지 초대해서 함께 회식을 진행했다.
뻔한 장소와 음식은 항상 싫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팀원분들이 날이 좋으니 한강공원으로 가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와 함께 팀원분 중 한 분이 살면서 한강공원 같은 데를 나가서 돗자리 펴고 뭐 먹어본 적이 없다는 고백으로 장소를 단번에 결정했다.
오후 6시에 시작된 회식은 BBQ 황금올리브콤보, 치즈볼, 뭉티기, 낙지탕탕이, 빙수, 회오리감자, 치킨떡볶이를 거쳐 장소를 3번이나 옮겨가며 장장 10시간 30분 뒤인, 익일 오전 4시 30분에 끝났다.
즐거운 이야기, 가슴 찡한 얘기, 화가 났던 얘기, 게임 업계로 들어오게 된 얘기등 다양한 토픽이 오고 가다가 마지막 회식 자연스럽게 지금 프로젝트가 서비스 종료하게 된다면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냐는 얘기가 나왔었고, 생각하고 있는 차기작의 기본적인 콘셉트와 형태 등을 공유드렸는데 그 자리에 마침 프로그래머와 아티스트가 있다.
그렇게 함께 사이드 프로젝트(Side-Project)를 해보자는 <작당모의>의 시작이 이 장소에서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