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오랜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는 그해 봄날,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오래전, 그때 그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고.


"아버지, 무슨 일인데요?"

"내가 오래전 옛날에 시장에 있는 노점상을 하나 단속했는데 말이다..."

"그게 뭐 그리 마음에 남는다구요?"

"그렇채. 근데 야야, 그게 자꾸 맴에 남는기..."


아버지의 경찰로서 초임 순경 때 일이었다.

아버지는 경남 창녕에서 근무를 하셨는데, 같이 근무하는 지서장이 계속 시장통 노점상 단속을 강하게 지시하였다.


다들 먹고살기 힘든 60년대 말, 배고팠던 그때 시절, 노점상으로나마 겨우 겨우 생을 연명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 쉽게 단속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계속되는 지서장의 채근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노점상을 단속하게 되었는데, 그날 하필이면 애를 업고 앉아있는 아주머니 노점상을 단속 맡게 된 것이었다.


평소 채소 몇 개, 나물 한두 접시 올려놓고 장사를 하다가, 저녁이면 약방에 들러 누가 아픈지 약을 지어 돌아가던 아주머니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등에는 애를 업고, 머리에는 광주리를 이고, 한 손에는 아픈 사연이라도 동여맨듯한 약봉지를 들고 가는 뒷모습을 아버지는 몇 번이고 봤던지라, 그동안 계속되는 지서장의 지시가 있었어도, 선뜻 단속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또 단속을 못하면 퇴근을 물론이거니와, 지서장의 무서운 왕방울 눈을 들이대고 퍼붓는 질책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날은 정말 눈을 딱 감고 단속을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있는 돌도 지나지 않은 딸아이가 보고 싶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생업이 걸린 노점상 아주머니의 저항은 생각보다 거세었고, 그렇게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그만 노점상의 좌판을 본의 아니게 엎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판자로 얼기설기 허술하게 만든 좌판은 다리가 부서지고, 좌판 위의 나물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에 아주머니 등에 업힌 애는 겁에 질려 마구 울어댔고, 아주머니는 겨우 붙잡고 있던 줄이라도 놓친 듯 허망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그 날 밤새 잠을 못 이루셨다고 했다.

애 울음소리가, 아주머니의 그 원망 어린 눈빛이 가슴을 아프게 하여서 말이다.


더욱이 딸아이가 그날따라 유난스레 칭얼대는데 더 마음이 무거웠다고 하셨다.


새벽이 밝아오자 말자, 밥도 안 먹고 바로 시장으로 뛰어갔는데, 그 자리에 그 아주머니 노점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내는 정말 그럴 마음은 아니었는데...

오늘 장사하러 나오면, 정말 본의가 아니었다고 사과라도 할 건데.'


아버지는 병석에서 꽤 오래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퇴직 후 바로 병원에 입원하셔서, 꼬박 3년을 병원 신세 지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동안 정말 말도 못 할 정도의 고통에 시달리셨다. 돌아가실 때는 37kg의 몸무게로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게 있다. 그 기간 동안 아버지는 살아오신 지난 세월을 하나하나 곱씹으신 모양이셨다. 막 병원에 입원하실 때는 다시 회복된다는 희망에 부풀어 계시다가, 병세의 호전이 없으시자 점점 본인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신 모양이셨다. 처음에는 세월의 굵직굵직한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더니,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누에가 실을 토해내듯 가늘게 가늘게 묻혀서 가려진 기억마저 말씀하시는 거였다. 그러다 무려 30년 전의 사소한? 일마저도 기억해내시고, 후회하고 사과하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어쩌면 그 과정이 영혼이 정화가 되는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 말씀을 하시고 아버지는 며칠 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20년이 다되어 간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디에 계시는지 모를 그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