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by 마음힐러 지니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기념 행사가 열리고,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기념식 소식을 전했다. 그해 여름, 나는 창원시립박물관 최종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 창밖 풍경이 유난히 길게 이어졌고, 마음속에서는 앞으로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는 묘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돌이켜보면 박물관과 함께해 온 내 길은 언제나 낯선 곳으로 향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대구와 경북을 오가며 문화재를 관리했고, 다시 창원이라는 새로운 이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내겐 서울에서 뿌리내릴 계획이 분명히 있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석사 논문을 정리하면, 서울에서 계속 자리를 잡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순간, 교회 친구가 알려준 <창원시립박물관 학예사 채용>이라는 짧은 소식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창원이라는 도시는 내게 낯설었다. 공장지대와 바다, 벚꽃 정도의 이미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면접을 준비하며 알게 된 사실이 흥미로웠다. 지금의 창원은 본래 창원·마산·진해라는 세 도시였는데, 일제강점기 행정정책으로 갈라졌다가 2010년에야 다시 하나로 통합된 도시였다. 역사 속에서 갈라졌다 합쳐진 이 도시의 사연이, 마치 나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서울에 뿌리내릴 거라 믿었지만, 결국은 남쪽 끝으로 가지 않았던가.

며칠 뒤, 도청 문화재과로 출근하던 길에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다. 내 이름은 분명히 거기 있었다. 그러나 손끝으로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계장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우리 막내가 드디어 창원시 학예사로 합격했습니다. 오늘은 아무도 일찍 집에 못 가요. 삼겹살에 소주, 그리고 2차까지 갑니다!”

모두가 박수 치고 웃어주었다. 축하받으며 마음 한편은 뭉클했지만, 사실 나는 벌써 창원의 박물관에 가 있었다.


‘가자마자 전시를 열어야 할 텐데. 무슨 주제를 잡아야 하지?’

학예사에게 전시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숙제이자 시험대, 때로는 성적표였다. 특히 시립박물관은 그 도시를 기념하는 전시를 한 해에 한 번은 반드시 해야 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해였으니, 광복 이후 창원의 도시 변화상을 보여주는 전시가 가장 적절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또 다른 70이 떠올랐다. 바로 엄마의 칠순이었다.


칠순은 오래도록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처럼 여겨져 왔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생을 나이로 구분했지 않았던가. 마흔에는 불혹, 쉰에는 지천명, 예순에는 이순, 그리고 칠십에는 종심.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도를 벗어나지 않는 나이. 그런데 엄마는 그 중요한 순간을 축하받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칠순이 뭐 별거냐, 그냥 또 하루지.” 그렇게 말하며 웃어넘겼다.


내게 엄마는 늘 ‘조여사’였다. 우리 가족 모두 그렇게 불렀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부엌 불을 켜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사람. 라디오를 켜 두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다가도,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며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사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엄마의 아침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박물관에서 일하며 나는 늘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아 미래에 남기는 일이 내 역할이었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면, 내 곁에 있는 엄마야말로 가장 오래된 문화재이자,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활력 그 자체였다. 나이가 들어도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반찬을 척척 해내고, 가족을 먼저 챙기는 그 모습은 세월을 비껴선 듯 단단했다.


“혜진아, 축하한다. 너는 어딜 가든 잘할 거야. 언제부터 출근이니?”
“2주 뒤에. 집도 구해야 하고 정리할 게 많네. 그런데 엄마 칠순을 못 챙기고 가게 되어서 마음이 쓰여.”
“아이구, 그게 뭐 대수라고. 네 할 일 잘 챙겨라. 그리고 자꾸 칠순, 칠순 하지 마라. 나 아직도 이팔청춘이다.”


엄마의 말은 늘 단순하지만 힘이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고, 동시에 깊이 울컥했다. 역사 속에서 기념되는 것들은 늘 ‘70주년’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어떤 기념일은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엄마의 노랫소리 속에서, 또는 식탁에 놓인 따끈한 된장국에서 조용히 이어진다. 내가 기획하는 전시가 아무리 정교하고 웅장해도, 엄마의 삶처럼 자연스럽고 흔들림 없는 리듬을 담아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해 나는 광복 70주년 전시를 준비하며, 동시에 조여사의 칠순을 기념했다. 전시장에 놓인 사진과 기록이 창원의 세월을 보여주었다면, 부엌에 선 엄마의 뒷모습은 나의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엄마는 칠순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 같다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세상에 서툴지만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기쁨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슬픔 앞에서는 금세 눈물짓는 모습 그대로였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그해 여름, 나는 깨달았다. 기념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역사를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날, 조여사의 한마디가 오래도록 내 가슴에 새겨졌다.

“나 아직도 이팔청춘이다.”

그 웃음 섞인 말 속에는, 나이든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조용히 그리고 힘차게 기다리는 조여사의 에너지리라.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