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어른

by 마음힐러 지니

안동 김씨 집성촌 작은 마을에서 가장 안쪽, 가장 작은 집이 바로 내가 사는 집이었다. 나는 의성김씨도, 안동 출신도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으로 가는 길은 김양반댁, 덕자네, 영미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집을 지나 외양간을 지나야 닿을 수 있었다. 오솔길과 흙길 둑길을 지날 때면 소똥 냄새와 김씨들 냄새가 내 코 속으로 스며들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그 동네는 길가의 작은 잡초마저도 김씨 성을 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다니는 어른이 지나가면 동네 강아지조차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것 같은 곳. 그 지독한 냄새와 무거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집으로 향할 때마다 나는 늘 생각했다.


‘도대체 왜… 아버지는 이곳에 정착하셨을까. 다른 마을도 많은데, 왜 하필 우리 집 말고는 모두 의성김씨 뿐인 이곳에 우리를 두고 가셨을까.’


언제부터 아버지와 김양반댁 어른이 의형제를 맺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전해 들은 바로는, 두 분이 만주에서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실어 나르며 인연을 맺었다 했다. 해방을 맞고 남쪽으로 내려와 숱한 어려움을 헤쳐 나올 때도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결국, 오갈 곳 없던 우리 가족을 김씨 집성촌 안에 살게 해 준 것도 그 인연 덕분이었다.


칠순을 앞둔 지금의 나는 두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 자신을 합쳐 고작 네 식구를 건사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엄마, 그러니까 나의 엄마는 달랐다. 안동 땅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겨우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고, 홀로 일곱 남매를 키워내야 했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겨우 마흔이었다. 마흔이면 아직도 웃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꿈꾸어야 할 나이였지만, 안동댁으로 불리던 우리 엄마는 그 순간 이미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집 앞마당으로 들어서면 그제야 내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얼굴의 경직도 서서히 누그러졌다. 청소할 것도 없는 작은 집에서 엄마는 내내 쓸고 닦고 장독을 정리하고, 바닥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어매! 우리 다른 동네로 이사가면 안 되나? 이거 뭐 숨막혀서 살겠나.”

“누구 입에도 오르내리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지내라. 우리가 어디로 가겠노. 여기가 우리 고향이고 집이다.”

엄마에게 대들던 건 7남매 중 나뿐이었다. 나는 유일하게 명랑했고, 또 유일하게 다른 세상을 갈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고향은 경북 영양군이었다. 어린 시절 단 한 번 외가를 따라간 기억이 있다. 마을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엄마를 보며 ‘조부자집 딸’이라 불렀다. 외가에 들어서니 나를 ‘아가씨’라 부르며 살뜰히 챙겨주는 이들이 많았다. 그때는 그 말뜻을 몰랐다. 누구보다 풍족한 집의 딸로 태어났던 엄마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칠흑 같은 가난 속에서 일곱 남매를 키워야 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엄마는 본래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마흔에 이미 칠십 노인처럼 늙어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치마 같은 건 입을 생각일랑 하지 마라. 누구 입에도 오르내리지 말고, 쥐죽은 듯이 지내라.”


엄마가 늘 하던 말이다. 형제들 중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큰언니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나가면 ‘미니스커트 입는다’는 말이 돌았고, 내가 동네 바보를 놀리기라도 하면 ‘인성이 나쁘다’는 낙인이 찍혔다. 전쟁의 상처와 허기가 남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늘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누군가 ‘시골 인심이 좋다’고 하면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내 귓가에 맴돈다.


“쥐죽은 듯이 지내라.”

칠십이 된 지금도 나는 엄마의 경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넷째였다. 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특히 나를 아껴주셨다는 사실이다. 술에 취한 어느 날이면 나를 불러 땅에 등을 붙이고 두 다리를 구부려 ‘비행기’를 태워주셨다. 시계를 가리키며 바늘이 움직이는 법을 알려주며 “너는 뭐든 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삶의 첫 희망을 남겼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 중심에 김양반 어른이 있었다. 평생 도박꾼 행세를 했지만, 사실은 의성 김씨 학봉 종가의 종손으로 전국을 떠돌며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던 분이었다. 해방 직전, 만주에 긴급히 자금이 필요했을 때 직접 건너가셨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 것은 1995년 무렵이었다. 엄마는 평생 그분을 ‘노름꾼’이라며 경계했지만, 알고 보니 가장 허망해 보이는 삶 뒤에 가장 숭고한 뜻이 숨어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인생은 겉모습대로 판단할 수 없으며, 누구의 삶도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된다는 것을.


엄마의 삶도 그랬다. 누구보다 독하고 단단한 여자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그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 아들을 중동으로 떠나보내야 했을 때, 맏딸을 학교조차 보내지 못했을 때, 여섯 살 나에게 막내를 업히고 밭일을 시켜야 했을 때, 아들들이 물로 배를 채워야 했을 때—엄마는 흔들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 독함은 사실 단단함으로 위장한 슬픔이었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일곱 남매가 모두 깊이 잠든 뒤에도 엄마는 좀처럼 눈을 감지 못했다.

방 안은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로 가득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창호지가 바스락거리고, 가끔 막내가 뒤척이며 낮은 신음을 내뱉을 때마다 엄마의 손길이 이불 위를 다독였다.

엄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아이, 또 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손등으로 땀을 훔쳐 주었다. 거칠고 상처 난 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손이었다.

문밖으로 나서면, 깊은 어둠 위로 별들이 촘촘히 흩어져 있었다. 엄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매… 내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겠네.

내가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식이 아부지 보고 있는겨.

내 아직도 가슴이 이리 답답한데… 내 먼저 델꼬 갈랑겨.”


그러나 곧 다시 아이들의 숨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 숨결은 엄마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기적 같은 노래였다. 엄마는 별빛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또다시 속삭였다.


“그래도 버티야지. 야들, 별처럼 빛나게 살도록… 끝까지 어른으로 서 있어야제.”


그 순간만큼은, 하늘의 별빛이 마치 엄마에게만 들리는 위로처럼 반짝였다.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은 분명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숨결과 별빛 사이에서 발견한 작은 기도와도 같았다.


나는 안다. 내가 칠십이 되어서도 아이 같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은, 그 위에 서 있던 마흔의 어른—나의 엄마 덕분이라는 것을. 시대는 사람을 아이로, 혹은 어른으로 만들었다. 나는 칠순에도 노래하는 아이로 남을 수 있었지만, 엄마는 마흔에 이미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들 쉽게 말한다. 하지만, 사실 나이보다 무거운 것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이 사람을 일찍 어른으로 만들었고, 또 다른 사람을 오래도록 아이로 머물게 했다.

나는 오늘도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마흔 살 엄마의 굳은 얼굴을 떠올린다.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 같은 노인의 모습 뒤에는, 울음을 삼키던 마흔 살 여인의 그림자가 늘 겹쳐진다.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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