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마음힐러 지니

우리 집 외양간이 언제 생겼는지, 기억은 흐릿하다. 어느 날 문득 마당 한켠에 네모난 기둥과 새 나무 냄새가 나는 외양간이 들어섰고, 그때부터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소는 내 담당이었다. 옆집에서 풍기던 소똥 냄새는 늘 코를 찌르며 진저리를 치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집 소들에서는 그런 악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축축한 짚단 냄새와 소들의 거친 숨결만이 따뜻하게 감돌았다. 엄마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려받은 재산 같은 존재였을 테다. 외가에서 보내온 그 소들은, 엄마에게 있어 물려받은 유산이자 동무였다.

소가 생긴 뒤로 농사일은 한결 수월해졌다. 고랑에 코를 박고 묵묵히 흙을 갈아내는 녀석들을 보면, 마치 말없이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는 아빠 같았다. 엄마는 그 옆에서 쟁기를 잡으며 땀을 흘렸고, 나는 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뒤를 따랐다. 나는 그때 알았다. 저렇게 묵묵히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한 번은 소에게 꼴을 먹이러 야산으로 갔다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진 적이 있다. 돌멩이에 부딪히며 굴러내려가는 순간, 뒤에서 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이 속도면 나를 밟고 지나가겠구나.” 겁에 질렸던 찰나, 소들은 나를 피하려 힘껏 점프했다. 허공을 가르며 번쩍 뜬 네 다리, 그 큰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를 지켰다. 그 순간, 깨달았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형제 또는 가족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또 소들이 높이 뛰는 꿈을 꿨어!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하늘로 날듯이 뛰더라!”


나는 신이 나서 엄마에게 달려가 꿈 이야기를 쏟아냈다. 엄마는 여전히 소죽을 젓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꼴이나 제대로 줘라.” 엄마에게 소는 친구가 아니라, 삶을 함께 지탱하는 짐짝 같은 동반자였다.


내 꿈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건 바로 밑 동생, 민식이뿐이었다. “누나는 소가 그렇게 좋나? 난 밤마다 외양간 앞을 지나가면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처럼 무섭던데.”


“민식아, 우리 집 지켜주는 누렁이들이 뭐가 무섭냐. 엄마가 해 준 얘기 기억 안 나? 옛날 산골 마을에 호랑이가 내려왔을 때, 소들이 울며 달려들어 쫓아냈다는 거.”


엄마가 살던 영양 산골은 호랑이가 종종 내려오던 곳이었다. 깊은 밤이면 마을은 숨을 죽였고, 호랑이가 아이와 가축을 노리며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그때마다 마당을 지킨 건 소들이었다. 번뜩이는 눈빛, 무겁게 울어대는 소리, 땅을 울리는 발굽. 민식이에게는 두려움이었지만, 나에게는 든든한 수호자였다. 그래서 나는 종종 소 등에 올라타 마을 어귀를 돌아다녔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선 듯,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나가는 어른들이 종종 혀를 찼다. “뉘 집 자슥인지 겁도 없다 겁도 없어. 쯧쯧.” 우리 집 누렁이는 그럴수록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지켜주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더 고개를 치켜들고 마을 흙길을 당당히 걸었다.


민식이 대학에 갈 무렵, 우리는 소들과 이별해야 했다. 소는 유대가 깊어 이별을 알아차린다고 했다. 팔려 나가는 그날, 녀석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영영 떠나는 줄 아는 듯, 커다란 눈망울이 이리저리 굴러가며 눈물이 맺혔다. 천천히, 그러나 애절하게 울어대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을 후벼 판다. 나는 소의 울음소리에 맞춰 울었고, 민식도 그런 나를 보며 울었다. 우리 모두가 울던 날이었다.


“어무이, 누나 죄송해요. 내가 대학 공부 마치고 돈 많이 벌어 다시 누렁이 사드릴게요. 꼭 다시 데려올게요.”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쥐죽은 듯이.”


나는 텅 빈 외양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볏짚 사이로, 소들이 남긴 숨결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날 나는 마음먹었다. 소들이 떠난 것처럼, 나도 이 집을 떠나야겠다고. 누렁이가 마치 나에게 마지막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다.


동네 어귀 담벼락 길을 걷다 우연히 바람에 찢겨 붙은 종이 한 장을 보았다. ‘여사원 모집 안내.’ 반쯤 찢겨져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글자는 충분했다. 모집인원, 중학교 졸업자, 제출서류… 내 눈은 거기서 멈추었다. 순간, 운명이 던져준 길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숟가락과 젓가락, 이력서 한 장, 졸업증명서와 등본, 졸업앨범을 얇은 천에 둘둘 말았다.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마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낯익은 산천이 멀어져 갔다. 소들이 울며 뒤돌아 보던 그날처럼, 나도 고개를 수없이 뒤로 돌렸다. 그러나 버스는 내 마음을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앞으로만 달렸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앞만 보며. 끝없이, 끝없이.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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