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던 밤

by 마음힐러 지니


비가 차창 밖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내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그저 무심하게 느껴졌다. 내 어린 시절의 세상은, 작은 마당과 그 안에서 부대끼던 형제들,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을 다스리던 엄마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봄이면 소 꼴을 등에 이고 지고, 겨울이면 땔감을 등에 이고지며 내 키가 자라기나 할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지독히도 딱딱하던 땅을 뚫고 이름 모를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매해 그 풀들을 보면서도 나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래, 나는 예쁜 꽃도, 잘 자란 나무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잡초라면 또 어떠한가. 나는 이 세상에 고개를 내밀고, 바람과 발길질에도 다시 살아나 자라는 존재였다. 밟히고 꺾이고, 죽었나 싶어도 계절이 바뀌면 다시 돋아나는 것. 이제 나는 잡초다. 잡초처럼 끈질기게, 다시 일어서고 다시 뚫고 나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어쩌면 잡초라서 더 오래 남는 법일지도 모른다.

내 안의 독백이 끝나자 비로소 창밖이 눈에 들어왔다. 캄캄한 어둠을 가르며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터미널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외가집에 갔을 때 한 번,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로 타는 시외버스. 혼자 버스에 오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짐칸에는 보자기와 밀짚광주리가 쌓였고, 좌석 밑에서는 바구니가 덜그럭거리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창 밖에서 누군가의 가족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고, “잘 다녀와”라는 목소리가 바람처럼 스쳐 갔다. 나는 그 흔드는 손을 받지 못한 채 홀로 자리에 앉았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군복 입은 청년, 보따리 장수 할머니, 이미 도시에서 일하고 있는 듯한 청년들이 뒤섞여 앉아 있었다. 다들 어딘가 단단한 결심을 품은 얼굴들이었다. 나는 무릎 위에 보잘 것 없는 보따리를 꼭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올 만큼 힘껏 움켜쥔 채. 놓치면 내 삶까지 흘러내려 버릴까 두려웠다.

“하이고, 니 김씨 양반 마을 끝집 아 아이가? 와 혼자 이 늦은 밤에 버스를 탔노?”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보따리를 끼고 앉은 아주머니였다. 보니 보따리 장사를 하며 종종 우리 집을 드나들던 이였다. 김씨 마을 인심이 퍽 괴팍하다며 투덜거리다가도 결국 우리 집 마루에 앉아 밥 한술 뜨고 가던 얼굴이었다. 없는 살림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건 늘 엄마 몫이었고, 우리는 그만큼 더 허기져야 했으므로 형제들은 마뜩잖아 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주매, 근데 어매한테는 말하지 마이소. 저… 마산에 취직되서 가는데예. 돈 많이 벌어가 어매한테 소도 사드리고, 동생들 등록금도 보태고 할라고예.”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취직자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도 아주머니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마산으로 가는, 집을 떠나온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걸, 나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했다, 잘했어! 한 번 사는 인생, 우째 평생 시골에만 박혀 살겠노. 니는 뭐가 달라도 달라 보이더라. 가봐라, 가서 니 눈으로 봐야지.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알지. 큰 바다에 나가야 크게 자라는 법이다.”

생각지도 못한 응원의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꺼풀조차 깜빡이는 걸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그 답답한 양반 마을에서 니 식구들이 얼마나 숨죽여 살았는지 내 다 안다. 너거 어매도 니들 아니었으면 진작에 영양 부잣집으로 돌아갔을 거다. 다 너거 아버지 뜻 받들어... 니들 형제 별처럼 빛나게 살게 해줄라고 거기서 버틴 거 아이가. 니는 쓸데없는 생각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뿌라마.”

나는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엄마는 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죽은 듯 살라’고 당부했는데, 바로 앞의 낯선 사람이 ‘쓸데없는 생각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도,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데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리 집을 불운하다 여겼다. 그렇게 보는 한, 우리는 늘 불운으로만 살아야 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우리를 새롭게 봐 준 것이다. 나를 새롭게 봐 준 것이다. 아버지 이후로 처음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주매…” 내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갈라졌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울긴 와 우노! 당당하게 살아라. 겁먹지 말고 달려들어라, 고마. 세상 참 어려운 거 같아도, 또 맘먹은 대로 되는 게 세상인 기라. 마산에 간다 했제? 바닷가 사람들, 처음에는 차갑고 무심해도, 정만 붙이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준다. 김씨들보단 낫제. 니도 정 붙이고 살아내면 된다.”

창녕쯤에 이르러 아주머니는 보따리를 챙겨들고 내리면서, 불쑥 손에 돈을 쥐여 주었다. 지난달 내내 물건을 다 팔아야 벌 수 있는 돈일 텐데, 내 손에 들어온 건 오천 원이었다. 그순간, 마음속에 기이한 생각이 스쳤다. 신이 있다면, 아마 오늘은 내 편이 되어 이 아주머니를 보내 준 게 아닐까. 용기도 주고, 돈도 주고. 죽으란 법은 없구나. 그래 나는 죽기 보다는 살기 위해 마산로 가고 있지 않은가. 잡초처럼 살기로 했다면 기왕 열심히 살아내 보자. 밟히고 꺾여도 다시 일어서는 잡초처럼, 끝내 버텨 내보자. 혹시 알까, 언젠가는 잡초가 아니라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빛나는 존재가 될지도.

그날 밤 마산에 닿았을 때, 나를 맞이한 건 매서운 바람과 얼어붙은 공기였다. 남쪽이 따뜻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항구 곁 골목은 짠내 섞인 바람이 휘몰아쳤고, 시장통 사람들의 얼굴은 낯설고 무심했다. 누구 하나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해 겨울, 나의 몸과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오직 파도 하나 없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만이, 묵묵히 나를 품어 주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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