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참 빠르게도, 느리게도 흐른다
퇴사 후 큰 마음을 먹고 여행을 떠난 지가 벌써 1년 전이다. 이 역시도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아이폰에 1년 전 추억이라고 알람이 떠서 알게 되었다. 삶에 찌든 직장인의 일상이라고 가볍게 변명하고 싶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물론 미얀마, 인도 등지를 떠돌다가 돌아온다고 해서 내가 엄청나게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사람들과 만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선택받은 소수였다면 참 좋았겠지만, 현실이 늘 그렇듯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저 선택받지 못한 다수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갔다 오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소소하긴 했지만,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거창한 것이 아니니 간략히 서술해보고자 한다.
더도 말고 딱 한 가지만.
미얀마, 태국, 인도, 그리고 스리랑카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았다. 47도를 넘나드는 뉴델리의 거리에서 누워서 잠을 청하는 노동자의 표정, 몸에 안 좋은 미생물로 가득할 것 같은 물속에서 헤엄을 치며 밝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 길 위에 아무 생각 없이 있는 동물들 사이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릭샤 한 무리 등.. 이국에서 목격한 것은 우리나라의 일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물론 외국이라는 곳이 당연히 그렇겠지만, 이번 여행에서 목격한 것은 평소의 여행보다 괴리가 더 컸기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아무리 봐도 걸쩍지근한 음식이나, 미심쩍은 미소를 띠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다. 어떤 배낭여행자라도 조금씩은 짜증이 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 흥정하고, 더 나은 먹거리나 잠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러했다. 그렇지만 3주 정도 지난 시점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무질서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를 찾을 수 있었고, 미어터지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름의 평화를 찾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좀 더 지나니,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은 '그러려니'로 진화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곳의 삶이 편해졌다. 그렇게 나는 우리가 흔히 '오지'라고 말하는 곳에서의 순간들에 적응했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일상의 나는 무언가에 항상 쫓기는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 순간 치열하게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막연한 무언가를 성취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나의 마음은 건강한 동기 유발보다는 조급함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당시의 나를 두고, 화가 가득 찬 것 같다는 어머니의 표현은 그 불안정함을 표현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조금만 마음을 여유로이 가져도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지난 일들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무작정 'should have + pp'하면서 지나간 일을 붙잡고 후회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 봐야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다짐했다. 특유의 긍정적인 자세로 (혹은 빠른 합리화의 자세로), 맥주 한 잔 마시며 털어 넘겼다.
1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도 예전 회사보다는 조금 더 빠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조직에서 말이다. 예전의 나였으면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들과 상황을 현재의 나는 매일 대면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차이는 견딜만하고, 견딜 수 있다는 점 아닐까.
내가 이렇게 적응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것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지난 여행에서 배운 교훈이다. 상사가 시답지 않은 것으로 뭐라 해도, 나와 의견이 맞지 않는 동료가 딴지를 걸어도, 가끔씩 직접 불만에 가득 찬 고객을 대할 때에도, 나는 그때의 느낌을 되살리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 사람도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
하며 마음을 다독이곤 한다.
나와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이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에, 생각은 다 다르기 마련이다. 소속된 집단이나 위치에 따라서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조금이라도 숙지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라도 상대를 조금이나마 인정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던 상황은 다르게 전개된다. 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양쪽이 줄다리기하듯 대립하기 때문인데, 한 명이라도 힘을 빼는 순간 갈등은 일시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나름 잘 살고 있다. 꽤나 친해진 주변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하면서 말이다.
29년의 삶이 단 한 번의 여행으로 바뀔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하나의 이벤트가 앞으로 내가 가질 삶의 자세에 어느 정도 영향은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삶이 물이라면, 1년 전의 여행은 하나의 커다란 바위라고 생각한다. 강이 가는 길을 뒤엎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방향을 틀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이다.
누구나 퇴사를 하고 길게 여행을 떠나서 그런 교훈을 느끼자는 말이 아니다. '그저 아주 작은 계기에서라도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고, 스스로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는 포인트'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꽤나 긴 여행이었을 뿐이다. 사람들마다 그러한 포인트는 제각기 다를 것이다. 각자의 배경과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길에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그루밍을 하는 길고양이가, 이른 새벽에 길을 치우는 미화원 분의 모습이, 밤새워 일을 하는 동료의 땀방울이 그런 계기일 수 있다.
고개 돌릴 겨를 없이 바쁜 삶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면, 흔하디 흔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을까? 나에게 고마웠던 1년 전 그 여행이, 이 글을 읽는 그 누군가의 삶에도 다른 모습으로 깃들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