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Apr 17. 2019

즐기기 위한 것들

무엇에 미치도록 빠지게 될 때는 한 번의 충격적인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와인으로 기억하는 여행 #1





 향기로운 것들을 좋아한다. 시작은 와인이었다. 어떤 향이 피어날지 열어서 따르는 순간부터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다. 그 향이 더 알고 싶어 따라 가다보니 어느 순간 좋아하는 것도 취미도 와인이 돼 버렸다.  

   

 무엇에 미치도록 빠지게 될 때는, 우연히 찾아오는 한 번의 충격적인 경험이 있다. 


 2010년 프랑스 여행에서 방문한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작은 마을, 본 로마네Vosne-Romanée에서 만난 한 잔의 와인. 이 한 번의 기억이 매년 프랑스를 찾아가도록 만들었다.


 파리 시내에서 자동차로 출발해 세 시간 정도 지나면 포도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낮은 언덕이 길게 이어지는 부르고뉴의 풍경에는 와인 애호가가 아니어도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싱그러움이 있다. 이곳을 꼬뜨 도르Côte d'Or, 황금의 언덕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부르고뉴 전경


 신의 물방울 만화책 덕분에 요즘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와인 로마네꽁띠의 포도밭도 부르고뉴에 자리 잡고 있다. 와인은 너무 비싸니 밭 구경이라도. ‘한 병에 약 2천만 원씩 가는 와인이니 포도 한 송이는 얼마야’ 같은 생각을 하며 둘러본다. 포도밭은 따로 막혀 있지도 않고 명패와 함께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문구 정도만 붙어 있다.


로마네꽁띠 밭


 가이드와 함께 부르고뉴를 둘러본 후 세 군데의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그 중 내 기억에 각인된 곳은 마지막으로 들렀던 도멘 그로 프레르 에 쇠르Domaine Gros frère et soeur. 프레르 에 쇠르는 프랑스어로 남매를 뜻하니 그로 남매가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도착 후 차에서 내리자 등이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나와 간단한 인사를 건넨다. 우리를 휙 둘러보고 인원수를 체크한 후 말없이 와인 잔을 챙겨 우리를 지하 꺄브로 안내한다. 지하에는 예상보다 큰 저장고에 오크통이 가득 쌓여있었고 그 끝에 번쩍이는 작은 방 하나가 보였다. 


테이스팅 룸


 바닥에 깔린 조명, 방 가운데의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그 위에 일렬로 줄지어 서 있는 와인 병. 사실은 손녀가 피아노를 연주했으면 해서 마련했던 장소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 아프게도 손녀는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고 테이스팅 룸으로 쓰이는 모양이다.


 일행이 모두 놀라 두리번거리는 와중에 할머니는 작은 와인 잔 하나씩을 나눠주고 순서대로 와인을 따라주기 시작한다. 역시 별다른 설명은 없다. 각 와인마다 어느 밭에서 나오는 건지 나지막이 불러주고 따라줄 뿐이다. 한잔씩 받아 마시다 나도 모르게 중얼. 


 “어떻게 술에서 이런 향이 나지?”


 맛을 떠나 와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꽃향기에 깜짝 놀랐다. 이 날의 기억이 특별한 건 맛보다는 향 때문이다. 소주의 알코올 향을 너무 싫어했던 나로선 새로운 세상이 열린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마지막에 따라줬던 한 잔의 와인은 ‘리쉬부르Richebourg’. 마치 향수처럼 피어오르는 바이올렛과 장미꽃의 향기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눈이 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피노 누아Pinot noir라는 포도로 만든 와인이 이렇게 매력적인 거구나. 와인이 이 정도로 다를 수 있구나. 와인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로프레르 @샤이요 궁


 시간이 지나고 문득 떠오르는 여행의 장면에는 풍경을 더한 무언가가 있다. 2010년의 유럽여행에서 내가 추억하는 순간은 이 와인 병을 들고 있던 시간이다.




글/사진 이원식

본업은 영상콘텐츠를 만드는 PD. 애호하는 것은 와인,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어.

매거진의 이전글 자발적 고독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