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는 자는 미지의 세계에 가지 못한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퇴사를 하고 여행을 한 지 5개월째로 접어든 날이었다. 미얀마와 태국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낸 나는, 다음 행선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는 확실한 주제 하에 답사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건축이었다. 건물이 주는 미학적 아름다움도 만끽하면서 동시에 로컬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렇게 건축에 대해 잘 아는 건 없는 상태로 무모한 ‘88일간의 건축 기행’이 시작되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건축 기행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모름지기 답사란 것은 사전 탐구와 공부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건축을 봐도 1차원적인 감상 밖에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몰아 공부 하고, 날을 잡아 건축 답사를 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동남아에서는 해먹에 누워 우쿨렐레를 쳤는데, 유럽에선 이렇게 힘들다니. 가끔은 공부고 답사고 모든 게 지겨워졌고, 여행을 그만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건축가 황철호의 말을 떠올렸다.
“답사와 여행은 첫걸음이 중요하다. 떠나지 않는 자는 결국 미지의 세계로 가지 못한다.”
숙소에서 꾸물대다 억지로 나가도, 우선 나가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생겼다. 역설적이지만 건축 기행이 즐거운 이유는 즐겁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있다. 읽어야 할 것을 읽고, 가야할 곳에 가고, 집중한 상태로 스케치하고 사진을 찍으며 답사지를 찬찬히 사유하다보면 어느새 즐거움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 당일 아침의 귀찮음만 이겨내고 첫 걸음을 떼면, 언제나 즐거움은 알아서 따라왔다. 배움의 즐거움, 경험의 즐거움이었다.
그때 88일 동안 포르투갈과 스페인 13개 도시를 답사했다. 알바로 시자, 소토 드 모라, 라파엘 모네오,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렘 쿨하스, 프랭크 게리, 그리고 가우디…. 천재적인 건축가의 흔적을 따라 매일 운동화를 고쳐 신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매일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감각은 여행에 생기와 기쁨을 주었다. 그렇게 88일간, 건축을 따라 느슨하게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걸었다.
가장 먼저 만난 도시는,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다.
리스본에 도착한 첫 주엔 많이 이동하기보다는 숙소 근처 구시가지 위주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 시내 관광명소나 맛집을 검색해도 거리가 멀지 않아 쉽게 이동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지?’ 시내 2만보를 걷고 집에서 흐물거리는 대파처럼 쓰러지고 나서 생각했다. 리스본의 경사는 엄청나구나.
그제야 에어비앤비 호스트 비키가 몇 번이고 고무 깔창이 튼튼한 운동화를 가져오라고 당부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리스본 시내는 언덕이 많고 골목마다 가파른 계단은 기본이다. 게다가 인도도 시멘트나 벽돌길이 아닌 오랜 세월동안 발길에 매끈해진 조약돌길이라 미끄러지기도 쉽다.
리스본 지형은 굴곡이 심해 '7개의 언덕의 도시'로 불린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Miradouro das Portas do Sol)나 그라사 전망대(Miradouro da graça)처럼 리스본에 유명한 전망대가 많은 이유 역시 높은 지대가 흔한 탓이다. 이처럼 고저가 심한 도심을 걷기 위해 리스본에는 19세기부터 독특한 이동 수단 세 가지가 발달했다. 트램, 아센소르, 그리고 엘리베이터다.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노란색 트램은 리스본을 상징하는 시그니처이자 주요 이동 수단이다. 현재는 5개의 노선만이 남아 리스본 골목 곳곳을 누비며 운행 중이다. 아센소르(ascensor)는 트램과 비슷하지만 다른,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종의 케이블카다. 리스본에는 3개의 아센소르 - 글로리아, 비카, 라브라 - 가 있다. 수동식 에스컬레이터라고 할까?
트램과 아센소르가 좌우 이동을 담당한다면, 상하 이동만을 위해 설치된 교통수단도 있다. 카르모 대성당 주변의 높게 솟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Santa Justa Lift)는 고지대인 바이루 알투(Bairro Alto) 지구와 저지대인 바이샤(Baixa) 지구를 연결하는 엘리베이터다. 바이샤는 포르투갈어로 ‘낮음’을 의미한다.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는 구스타프 에펠의 제자이자 프랑스계 포르투갈 구조 엔지니어인 라울 메스니에르 드 퐁사르(Raoul Mesnier du Ponsard)가 만들었다. 퐁사르가 엘리베이터를 만들기 전부터, 리스본에는 바이샤의 낮은 거리와 바이루 알투 지구의 카르모 수도원 부근을 오고가는 어려움으로 고충이 많았다고 한다. 퐁사르는 1882년에 리스본 시 의회에 교통수단을 설계하는 내용의 건축 신청서를 제출했다. 아센소르와 엘리베이터 역시 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퐁사르가 지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는 동시대인에게 20세기의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기적과도 같은 건축물이었다. 대리석이나 돌이 아닌 철을 사용하고 선진 공학기술로 설계된 미래지향적인 구조물인 엘리베이터에 당시 사람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엘리베이터는 고딕 양식을 구조합리주의적으로 접목한 네오고딕 양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는 ‘죽기 전에 꼭 봐야할 건축물 1001’로 꼽힌 유명한 건축물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리스본 공공 교통 서비스의 한 축이라는 점이다. 전망대이자 교통수단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이 건축물은 위에서 소개한 3개의 아센소르와 함께 2002년 포르투갈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탓인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빈다.
집의 본질이 ‘거주’라면, 엘리베이터의 본질은 ‘상하 운동’이 아닐까? 복잡한 거리에 자리 잡은 거대한 수직의 엘리베이터는 '이동'이라는 본연의 기능에 가장 충실하다. 총 45미터 높이로 두 대의 승강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제로 이용료를 내면 탑승할 수 있다. 승강기 내부는 나무와 거울,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서른 명 가까운 인원이 탑승 가능하다. 본래 증기로 움직였으나 완공 후에는 전기 엔진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 상층부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나는 미리 안내 책자를 통해 줄서지 않고 전망대를 이용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많을 때는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올라오는 데만 2시간은 걸리니, 시간과 입장료를 아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대가 높은 바이루 알투 지대의 카르무 수도원에서 전망대로 바로 향하라는 것.
그렇게 카르무 수도원을 돌아 도착한 전망대에 서니, 리스본이 한눈에 담기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따로 돈을 내면 지붕이 없는 제일 상단의 전망대에 올라설 수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리스본 시내를 충분히 360도로 살펴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넓은 테주강을 보며 바람을 쐴 때는 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반대쪽으로는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인 상 조르제 성(Castelo De Sao Jorge)이 보였다.
리스본을 살펴본 후에는 바로 옆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앉아 맥주나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전망대를 구경한 나는 카르모 수도원 뒤편으로 나왔다. 카르모 수도원 바로 옆에 있는 탓인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는 카르모(Carmo)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처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베르트랑Bertrand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방문했다. 나는 초보 건축 답사자의 설레는 마음으로 ‘architecture’ 코너를 서성거리고 나왔다. 앞으로의 건축 여행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리스본에 처음 도착한 여행자라면, 가장 먼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로 향해 일곱 개 언덕의 도시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미지의 언덕 사이에 숨겨진 것들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여행이 꽤나 기대될 테니까.
글/사진(1, 5-10) 사과집
한때 모범생 증후군과 장녀병에 걸린 ‘공채형 인간’이었으나, 퇴사 후 1년간 동남아와 유럽을 떠도는 여행자가 되었다. 한동안 캐리어 속에 우쿨렐레를 넣고 메콩강을 여행하는 노마드로 지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머물 때는 건축에 빠졌다. 삶과 사람을 예민하게 감각해 자주 소름이 돋는 피부를 갖는 것이 꿈이다. 2019년 첫 에세이 『공채형 인간』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