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un 23. 2020

어쨌거나 해피엔딩

홍콩, 생활의 유혹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홍콩, 생활의 유혹 #4





 사흘째 꼼짝없이 같은 무늬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1시 방향은 석고보드 귀퉁이가 깨져 있고, 10시 방향에는 스프링쿨러가 달려 있다. 일어나 돌아다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천장의 무늬까지 외울 지경이다.


 시간은 사흘 전으로 돌아간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나는 육 년 만에 둘째를 임신했다. 초기에 잦은 출혈로 살얼음판 걷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드디어 임신 육 개월에 접어들었음을 자축하고 있었다. 임신에 안정기라는 것이 없다고는 하나 일반적으로 임신 육 개월을 넘어가면 유산될 확률이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에 흔히 안정기라고 부른다. 기다리던 안정기에 접어들자 나는 마음도 안정된 것인지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증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관절이 아프거나 다리에 쥐가 자주 나거나 변비가 찾아오는 것 같은 증상들이 그것이었다.


 사흘 전 그날도 어김없이 화장실에 앉아 애를 먹고 있었다. 임신 중기에 접어들어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녀석은 나의 허가도 없이 내 몸속의 모든 수분을 불법 전용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변기에 앉아 배설의 쾌감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투를 벌일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에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임산부에게는 흔한 어려움이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목적에 집중했다. 거의 끝장을 보겠다는 투지로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갑자기 ‘투둑’ 뜯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배가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휴지를 집어 더듬더듬 닦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선홍빛 혈이 묻어나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순 열상이기를 바라고 바라며 거듭 확인했으나 불행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변기는 붉은 잉크를 쏟은 듯 새빨갛게 물들었고, 응급 상황이었다.


 자고 있던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불길했는지 단번에 잠에서 깬 남편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응급실 가자.”


 두말없이 바지에 다리를 꿰어 넣고 응급실로 직행했다. 분만하기로 한 사립 병원의 응급실로 향하면서 담당의를 불러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사실 나의 담당의는 휴가 중이었다. 왕세손의 분만을 위해 영국 왕실의 부름을 받는다고 소문난, 홍콩에서 가장 노련하다는 영국인 할머니 의사였다(그 소문의 진위는 아쉽게도 확인된 바 없다). 하필이면 그녀가 부재중일 때 이런 응급상황이 발생하다니 나의 불운이 원망스러웠다.



 응급실치고는 여유가 넘쳐흐르는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산과 응급 병실에 누워 있으니 곧 눈이 충혈한 담당의가 나타났다. 대머리 덕분에 40대임에도 50대쯤으로 보이는 홍콩인 의사였는데 집에서 자다가 콜을 받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인수인계를 받은 그를 처음으로 만난 곳이 한밤중의 응급실이어서 나는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병원에선 당직의가 응급환자를 보지 않는다. 담당 환자가 응급상황이라면 시간에 관계없이 담당의가 책임을 지고 환자를 보러 온다. 임신 초기부터의 히스토리를 잘 아는 담당의가 분만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이라 마음이 든든하다. 물론, 그에 응당한 대가는 금전적으로 치러진다. 보험이 없다면 누구라도 헉 소리가 나는 금액이다. 고급 서비스 뒤에는 당연히 고가의 보상이 따르는, 피할 수 없는 경제 논리이다.


 출혈은 멈추었지만 나의 배에는 여전히 태아의 심장 박동을 체크하는 기계와 자궁의 수축을 측정하는 기계가 부착되어 있었다. 다행히 태아는 무사하고 자궁의 수축도 안정적이었지만 의사는 우리 부부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만약 아이를 조산하게 되면 아이를 지켜낼 수 있는 장비가 이곳에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모든 장비가 갖추어진 정부 병원으로 다시 가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사립병원에서 그만한 시설을 갖추지 못한 것에 한 번 놀라고, 정부 병원으로 이원을 시켜줄 수는 있으나 그보다는 우리가 택시를 타고 정부병원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을 권한다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립 병원에서 이원한 환자를 정부병원에서 성심껏 돌볼 리가 없으니 새로운 환자인 양 개인적으로 가라는 권고였다. 의아한 것들투성이였다. 정치적인 이유인지, 정서적인 이유인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는 외국인으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의사도 명확한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그런 경향이 있으니 따지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는 편이 이로울 것이라는 뉘앙스로 얼버무렸다.


 느낌상 지금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의사의 권고대로 택시를 타고 정부병원으로 향했다. 홍콩에서는 거주지별로 이용할 수 있는 정부병원을 나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갈 수 있는 병원은 폭풀람에 위치한 ‘퀸 메리 정부 병원’이었다. 여든 살을 훌쩍 넘긴 이 병원은 아직 동도 트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바라보아도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 옛날 봤던 「킹덤」이라는 유럽산 호러영화가 절로 떠오르는, 낡고 음침한 느낌의 대형병원이었다.


 임산부였고 출혈이 있다고 하니 응급 환자로 분류되어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레지던트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의 당직의에게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고 산과 병동으로 옮겨졌다. 산과 병동은 너스 스테이션을 중앙에 두고 각각 부인과 병동과 분만 병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병동에서는 정해진 면회시간에만 보호자 면회가 가능했으므로 남편도 집에 돌아가야 했다. 홀로 병상에 몸을 뉘였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지새우는 부인과 병동의 응급실만큼 불안과 기도가 가득한 곳이 또 있을까. 오직 커튼으로만 구분된 병상들이 열린 커튼 사이로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산모임이 분명한 젊은 여자가 울며 들어왔다가 혼절하기도 했고, 펑퍼짐한 임부용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기도 하고, 막달에 가까운 임산부들이 이동식 침상에 실려 들어오기도 했다. 다양한 인종의 여자들이 다양한 사연을 품고서 이곳에 들어와 기도로 밤을 지새웠다.




 병원의 아침은 바깥 세계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지난 밤, 숨죽이던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공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6시부터 경쾌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간호사들이 교대를 하면서 주고받는 인사도 소란스럽고 7시면 시작하는 조식 배식도 시끌벅적하다. 커다란 들통에 가득 담긴 ‘콘지(죽)’를 긴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바가지(주방용 아님)로 퍼서 원하는 환자에게 덜어준다. 병동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도 어쩐 일인지 활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하루를 열고, 이어서 병동 내에는 하루를 시작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한쪽에서는 직원들이 다 같이 아침 체조를 하는 눈치다. 이 병원은 필시 행복이 넘치는 좋은 직장임이 틀림없다. 모든 직원들이 활력이 넘치고 모두 ‘솔’음으로 대화를 하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밤을 꼬박 지새웠고, 까무룩 눈이 감기는 순간이 왔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저기, 지금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 달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너무 시끄러워서 힘들어”


 담당 업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직원임이 분명한 중년 여성에게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짓고 얘기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어이, 거기 좀 조용히 하래”가 틀림없을 말을 크고 우렁차게 광둥어로 소리쳤다. 민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스 스테이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신생아 울음소리와 그들을 보기위해 찾아온 친지들의 환담을 나누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들에게는 소리를 칠 수도 없었다. 난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의 누군가 나에게 입모양으로 “Today is Sunday”라고 말하고 있었다.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입원했는데 지척에서 들려오는 신생아 울음소리는 자꾸만 분만을 떠올리게 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누우며 반대편 베개로 나머지 귀를 틀어막는 수밖에.



 전치 태반으로 고위험군 산모에 속하는 나는 그저 누워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태반이 조기에 박리 된다거나, 자궁이 과도하게 수축되거나 해서 아기가 예정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에 분만되는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간호사가 거의 매 시간 와서 태아의 심박음을 확인해주었다. 모든 것이 집에 있는 것보다는 말도 못하게 불편한 와중에도 한편으로 안심되기도 했던 것은 그나마 의료진의 모니터를 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유사시에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직 그 두 가지 이유만으로 무료하고 지루한 입원 기간을 견딜 수 있었다.


 면회 시간이 되어 딸아이가 아빠와 함께 찾아왔다. 여섯 살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젖살이 토실토실한 어린애다. 아이가 환자복 입은 배부른 엄마가 어색한지 생경하게 쳐다보았다. 쭈뼛쭈뼛 아빠의 등 뒤로 숨는 듯하다가 이내 달려와 안겼다. 무작정 집으로 같이 돌아가자고 떼를 쓰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지만 기특하게도 아이는 깊고 깊은 포옹 끝에 순순히 뒷걸음질 치며 엄마와 뱃속의 동생을 다시 보내주었다. 뒤돌아 걷는 동안 어느새 훌쩍 자란 딸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니 코끝이 시큰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졌다.


 의사가 회진을 올 때마다 내가 얼마나 멀쩡한 상태인지 어필하기 시작했다. 제발 퇴원시켜달라고 볼 때마다 애걸했다. 하지만 역시나 원칙주의자들(이라고 쓰고 융통성 제로라고 읽는다)의 나라답게 나의 의견은 의사결정에 반영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교과서대로 출혈이 완전히 멎고 48시간이 지난 후, 다른 이상 소견이 없을 때 퇴원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재확인할 뿐이었다.


 천장을 쳐다보거나 남편이 퇴근하면서 배달해 주는 삼각김밥이나 샐러드를 끼니에 맞춰 나눠 먹거나 스마트폰을 하면서 사흘이 지났다. 샤워를 마지막으로 한 지도 사흘이 지났다.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퇴원 전 검사가 있다고 했다. 이 검사에서 특이사항이 없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동식 침대로 옮겨졌다. 충분히 걸을 수 있었지만 굳이 침대로 이동되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를 수치심이 느껴져 얼굴까지 담요를 끌어당겼다. 입원할 당시에는 새벽이라 한산했지만 오후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환자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는 한눈에 보아도 노숙자가 틀림없어 보이는 노인이나 경찰의 엄호를 받고 있는 죄수까지 있었다. 노숙인이든 범죄자든 아프고 다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치료해주겠다는 정부 병원의 존재 의의를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생생하게 훔쳐본 기분이었다.


 정부 병원에는 사립 병원에 없는 학생 수련의가 있다. 많은 케이스가 존재하는 만큼 예비 의료인이 수련하기에 알맞은 환경이다. 출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인턴인지 실습생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아주 어려 보이는 누군가 다가왔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나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힘 조절에 실패한 그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마터면 그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걷어찰 뻔했다. 다행히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아 걷어차는 것은 면했고, 구원자가 나타났다. 의사에게서 그토록 기다리던 이상 없음 소견을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


 불과 한 시간 전에도 이동식 침대로 이동하던 나였으나 지금은 두 발로 걷고 있다. 혼자 하는 퇴원 수속은 복잡할 것이 없었다. 수납처로 가서 줄을 선 다음 처방약이 있으면 약을 먼저 받고 정산하면 된다. 이 모든 사달을 만들어낸 원흉을 원천봉쇄할 액상형 변비약을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큰 약병으로 세 병이나 처방 받았다. 이렇게 약 인심이 후하다니. 그리고 총 병원비를 정산하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나흘 동안의 입원비와 초음파 검사를 비롯한 여러 검사비와 약값이 고작 3만원 남짓이었다. 정부 병원에서 쌍둥이를 제왕절개로 출산하고 충전식 교통카드로 결제하고 퇴원했다는 무용담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이렇게 물질적인 인간이었나? 입에 맞지 않아 도저히 먹을 수 없던 환자식이나 소란스러웠던 입원실, 한없이 쳐다봤던 지루한 천장,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던 위층의 공사소음, 걷어 찰 뻔했던 초보 의료인의 얼굴 따위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 내 손에 있는 인심 후한 약 봉지와 3만원 남짓한 병원비 영수증만이 남아 있을 뿐. 무엇보다 나는 아기를 지켜냈다. 그곳에서 나와 뱃속의 아기는 어쨌거나 해피엔딩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글/사진 최경숙

서울에서 마케터로 활동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2011년 홍콩으로 이주했다. 여행 칼럼을 기고하거나 동화를 쓰면서 밤하늘의 달이 자신을 스토킹 한다고 믿는 다섯 살 난 딸과 함께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의 공동저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양 원당봉과 나이롱 서점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