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어린 사슴의 맑은 눈 같은 마을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나는 페루 북부의 해발 3375m의 윌카와인Wilkahuain이라는 지역에서 2주간 머물고 있다. ‘윌카’는 케추아어로 손자라는 뜻이고, ‘와인’은 집이라는 뜻이다. 손자의 집. 이 산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 가지 언어를 완벽하게 쓰는데, 바로 스페인어와 케추아어다. 케추아어는 남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언어이자 옛날 잉카 제국의 공용어였다. 이들은 타지 사람들과는 스페인어를 쓰다가도 가족들끼리나 마을 사람들끼리는 케추아어로 자유롭게 바꾸어 소통한다. 이들은 모두 잉카의 후예들이다.
넬슨이 5~6년 전만 해도 케추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다른 페루 사람들에 의해 핍박받았다고 말해주었다. 케추아어를 쓰는 사람은 산속에 사는 ‘못 사는’ 사람들이라고 따돌림을 당했단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 당시 페루 사람들 인식 속의 케추아어는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 아닌 없애야 할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케추아어어가 페루 곳곳에 남아 있음을 상기하면 놀라운 일이다. 페루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적지, 마추픽추Machu Picchu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의 케추아어다. 잉카 또한 케추아어인데,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페루의 많은 지명이 케추아어로 남아 있다.
인식은 무섭다.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이 같은 이유로 빠르게 사라져 갔던가? 언어가 사라지면 그 언어로 쓰인 노래나 글도 사라지겠지. 다행히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서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케추아어 실력을 증빙하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단다.
내가 머무는 이 집의 원주민 가족은 직계만 모두 여덟 명이다. 파파, 마마, 그리고 형제가 여섯, 여기에 신기한 구성원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열아홉 살 막내 산드라의 남자친구다.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처럼 생긴 이 남자친구는 집이 바로 근처의 산속이라는데, 마치 가족처럼 이 집에 자주 와서 밥을 함께 먹고 잠을 잔다. 이렇게 첫 번째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함께 지내는 것이 이곳의 풍습이라고 한다. 그 친구랑 결혼할 거냐고 물으니 아이참 몰라, 하고 부끄러운 듯이 웃는데 그 모습에서 우리의 데릴사위 풍습이 떠오른다.
첫째 아들 크리스티앙은 ‘샤먼’이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영매나 무당보다는 제사장 정도에 가깝다. 이 지역의 전통 악기와 선인장에서 뽑아낸 어떤 ‘약’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제의Ceremony를 거행한단다. 마침 오늘, 체코에서 14명의 단체 여행자가 사흘간 이 제의를 체험하러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이자 내 호스트인 넬슨은 일종의 공무원이다. 넬슨의 집에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아주 오래된 복층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무덤 안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0~1300년 전의 귀족들의 ‘미라’가 묻혀 있었단다. 돌무덤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넬슨은 페루 문화관광부에 소속된 그 문화재의 경비원이자 책임자로 십 년째 일하고 있다. 넬슨 아래로 두 명의 형제들은 근교 도시 우아라스에 살면서 일하거나 대학을 다닌다. 막내 산드라도 우아라스에서 대학을 다니지만 산속에 살면서 통학한다. 자기는 복잡한 시내보다 조용하고 깨끗한 산속이 훨씬 좋다고 했다.
새벽 무렵 화장실을 다녀와서 무려 30분 동안 방문이 열리지 않았던, 웃지 못할 밤을 보낸 후 (알고 보니 열쇠를 내 생각보다 훨씬 - 아니 아주 많이 - 힘주어 돌려야 했다) 이튿날 아침 이들이 생활하는 본가로 내려와 현관을 처음 열었을 때,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메주처럼 빚은 벽돌로 벽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이겨 바른 돌집은 순식간에 몇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미음(ㅁ) 자로 생긴 집의 가운데가 하늘 아래의 마당이자 야외 거실이었다. 지붕을 떠받치는 고르지 못한 아름드리 통나무 기둥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선은 기계로 정교하게 자른 것이 아닌 손으로 직접 자른 부드러운 곡선과 불균형한 면이었지만 쓰러질 듯하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지지하고 있었다.
양철로 씌운 지붕 아래 야외 부엌이 보였다. 가스레인지 대신 돌로 만든 단에 세 개의 불구멍이 삐뚤빼뚤 뚫려 있었는데, 화구 밑으로 불붙은 나무를 밀어 넣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나무로 불을 지펴 요리를 하는 것이다! 가스레인지가 있기는 했지만 아주 급할 때 – 말하자면 마마가 심각하게 늦잠을 잤을 때 – 를 제외하고는 새벽부터 잔가지를 한 아름 준비해서 불을 ‘만들어내는’ 것이 매일의 첫 의식이다.
처음에는 잔가지를 얼기설기 넣고 전날의 재 속에 남아 있는 불씨를 작은 피리처럼 생긴 원통형 철심으로 후, 후, 입김을 불어 넣어 불씨를 튕긴다. 불이 어느 정도 붙었다 싶으면 길고 굵은 나무를 집어넣어 불기를 세게 한다.
그렇게 데워진 냄비와 프라이팬에는 몇 십 년 동안 쌓였는지 모를 두꺼운 검댕이 묻어 있다. 주전자는 본래부터 검댕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처럼 완벽하게 검은색이다. 거기에 고구마처럼 작고 똥똥한 보랏빛 옥수수를 가득 채우고 끓여서 보라색 옥수수 찻물을 만들어낸다. 라임과 설탕을 넣어 마시는 이 옥수수차(치차 모라다)가 맛이 꽤 좋다. 마당의 벽면에 그려진 전통 모자를 쓴 마마의 얼굴 그림과 가면, 곳곳에 세워진 석상이 마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집의 사람 수보다도 많은 또 다른 식구들은 바로 동물들이다. 꽤 큰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고작 세상에 온 지 두 달째인 회색, 황토색, 연한 검은색 새끼 고양이 세 마리, 크고 작은 개가 세 마리, 통통하게 살이 찐 암탉 두 마리가 바쁘게 마당을 뛰어다닌다. 왼쪽 구석에는 기니피그 스무 마리를 위한 2층짜리 우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이 기니피그들은 누군가의 생일과 같은 큰 잔칫날 페루의 대표 요리, ‘꾸이’가 될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의 ‘꾸이’는 정말 최고라고!”
막내 산드라가 자랑하며 입맛을 다신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우리에는 커다란 어미돼지가 새끼를 셋이나 낳아서 태평하게 젖을 물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를 꼽으라면 단연 새끼 사슴 ‘치와’다. 치와는 고작 3개월 정도 된 젖먹이다. ‘어린이’라는 뜻의 Chivo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어미를 잃고 버려진 것을 산에서 데려왔다는데 여기 있는 것을 알면 경찰이 데려가서 산에 도로 풀어줘 버릴 거라고, ‘쉿’, 비밀을 유지하란다.
“아직 너무 어려서 우유를 더 먹여 길러야 하거든. 지금은 산에 가면 살아남기 어려울 거야.”
디즈니 영화에서 막 뛰어나온 것 같은 새끼 사슴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꼬랑지에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드는 어여쁜 속눈썹을 가졌다.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며 무엇이든 먹을 것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내 녹색 점퍼와 모자 끈도 먹는 것으로 아는지 가까이 다가와서 오물오물 씹어댄다. 젖병의 우유를 남은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 먹는 어린 사슴의 모습은 세상의 온갖 죄악과 근심을 잊을 정도로 천진하기 그지없다.
이곳은 정말로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하늘 보자기 끝이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처지면 눈앞의 산봉우리를 쓰다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대문 바로 앞에는 산꼭대기의 호수에서 시작된 물이 개울을 이루어 졸졸 흐른다. 맑은 물이 밤낮으로 흐르는 자연의 수도꼭지다. 물의 양이 제법 되어 빨래도 할 수 있고 웬만한 물은 여기서 그냥 떠다 쓰면 된다. 원주민 복장의 아주머니들이 개울 옆에 퍼질러 앉아 가족들의 옷가지를 빨고 있는 모습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이곳의 태양은 뜨겁다. 사막의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에 흠뻑 젖은 빨래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바삭바삭하게 마를 만큼, 사람도 동식물도 바삭바삭해진다. 피부가 뜨겁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늘을 찾아 헤맨다. 그래도 이곳의 생명이 이만큼 윤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해발 4000~5000m 위 빙하와 호수로부터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이 개울물 덕분이다. 그 높은 곳의 물을 끌어오기 위해 이 산속 사람들이 돌을 다듬어 만든 수로를 보면 얼마나 가지런한지 감탄을 그칠 수가 없다. 그러나 최근 물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 2000m를 넘지 않아서 나에게는 이곳이 정말 높아, 라고 내가 고산 증세를 걱정하자 넬슨은 오늘 첫날은 몸도 적응할 겸 쉬라고 배려해 주었다. 쉬엄쉬엄, 집 근처의 가톨릭 묘지와 산 중턱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넓고 판판하게 닦인 축구 경기장을 따라 산책했다. 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고산증세를 경험한 적이 없다. 한 곳에서 2주를 머물며 천천히 적응하는, 무리하지 않는 일정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전 헬퍼가 헬프엑스 웹사이트에 남겨놓은 리뷰처럼, 이곳은 정말로 문턱을 나서자마자 그야말로 훌륭한 트레킹 코스가 펼쳐진다. 라디안 호수Laguna Radian가 걸어서 1시간 30분, 아왁 호수Laguna Awac가 6~7시간 코스다. 한 번 정도는 마음먹고 트레킹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두세 시간을 산책하고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첫날 밤 타고 올라온 15인승 정도의 미니버스에서 나는 들 수도 없이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짊어진 백인 남녀가 한 무더기 쏟아져 내려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이 내일 크리스티앙의 ‘제사의식’에 참여하러 온다던 체코인 단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어느덧 해는 졌고, 내가 방에서 잠깐 자고 일어났을 때 새로 온 손님들은 어스름한 전등불 밑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두운 부엌에서 마마가 저녁을 준비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살아온 노동의 생애를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녀는 생김새로 보나 복장으로 보나 마치 인형 같다. 그녀는 온종일 이곳 원주민의 복장, 그러니까 레깅스에 치마, 스웨터, 길게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까만 머리 그리고 뭉툭한 고깔형 전통 모자를 고수하는데 어제도 오늘도 동일한 복장이었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동안 그녀가 다른 옷을 입는 것을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옷장을 열어보고 싶어졌다. 옆집의 아주머니, 그 옆집의 아주머니, 그 옆옆집의 아주머니도 모두 같은 복장이다. 그들의 다리는 치마 사이로 반절은 가려져서 더욱 짧고 아담해 보이는데 그 다리로 그야말로 ‘모든 곳’을 다니며 ‘모든 일’을 한다.
마마가 내놓은 저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큼한 맛이 묘하게 어우러진 걸쭉한 계란 수프, 그리고 소금으로 간을 한 옥수수 알이다. 우리처럼 ‘뻥’하고 튀긴 게 아니고 알 자체가 크기 때문에 그걸 그냥 기름과 소금에 볶아서 먹는다. 달콤한 우유에 만 밥알Arroz con Leche과 빵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어슬렁거리다가 내일의 제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크리스티앙과 파파를 도왔다. 걸쭉한 액체를 면 보자기에 거르는 작업이다. 와츄마 혹은 이곳에서는 산 뻬드로라고 부르는 선인장을 완전히 두들겨 부수어 냄비에 저어가며 부글부글 끓인 후, 약간 삭히듯 시간을 들여 식힌 액체란다. 크리스티앙과 파파가 양쪽에서 보자기를 비틀고 내가 중간에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짰다.
“여어, 모모. 손힘이 꽤 센데!”
크리스티앙이 몸짓으로 칭찬해줬다. 스페인어를 못 하는 나는 이 집에서 거의 몸짓으로 통했다. 한 시간 넘게 제사의식에 쓸 ‘약’을 걸러냈다. 큰 페트병으로 두 통을 채웠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두 잔씩 마신다고 크리스티앙이 킬킬 웃으며 이야기해줬다.
“굉장히 강한 약이야. 이걸 마시면 아마 너희 나라가 눈앞에 보일걸. 치와는 이걸 마시면 자기가 호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환각 작용이라도 있는 걸까. 한국에서도 식물로 이런 약을 만드느냐고 물어서 뭐, 예전엔 그랬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이런 약을 만들 때 매우 진지했어,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고 덧붙여 주었다. 이것저것 설명을 들으며 킬킬거리기도 하며 한참 약을 짜내자 손가락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손가락의 감각에 반비례해서 크리스티앙이 원하는 만큼의 약이 준비되었다.
“고마워 모모, 넌 좋은 사람 같아.”
크리스티앙이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품을 했다. 그는 내일부터 사흘 동안 제의에 들어간다며, 요일마다 제사의식 내용이 다르다고 했다. 나에게도 마지막 날 한번 참여해보라고 제안해줘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글/사진 김소담(모모)
교환여행, 헬프엑스(HelpX)로 전세계에서 ‘살아보고자’ 하는 생활인. 여행보다는 일상을 좋아하여, 장소보다는 그곳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대안적인 삶, 환경문제, 퍼머컬쳐(Permaculture), 채식주의, 공동체 등에 관심이 많고 서울의 공동체 ‘성미산마을’에 산다. 《모모야 어디 가? : 헬프엑스로 살아보는 유럽 마을 생활기(2018)》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