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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22. 2016

칠레, 푸에르토 나탈레스

카페는 여전히 비어있어도 음악 소리만은 멎은 듯했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 카페 미야 #1


목이 칼칼하다. 몸도 으슬으슬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파타고니아의 엘 칼라파테El Calafate까지 3시간 반의 비행은 계절을 바꾸어 놓았다. 몇 주간 끈적대던 한여름에 허덕이다, 숨 한 번에 폐까지 파고드는 파타고니아의 청량한 공기가 좋아 산과 들을 휘젓고 다녔다. 사뭇 매서웠던 바람을 너무 만만하게 봤나 보다. 

폭풍우의 대지라고 불리는 거대한 파타고니아 고원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걸쳐있다. 안데스 산맥은 비를 내리고, 비는 거대한 빙하를 만들어냈다. 빙하는 산을 기묘한 형세로 쪼개어 푸른 초원과 울창한 숲, 에메랄드빛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엘 칼라파테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칠레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하려고 했는데 감기가 웬 말인가.  

작은 바닷가 마을의 카페에는 오래된 팝음악만 울릴 뿐 손님도 주인도 나타나지 않는다.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벗어 던지고 매일 진행된다는 트레킹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불편한 텐트, 초라한 음식, 심한 비바람과 추위 그 모든 것을 견뎌내야 해요. 매일 비에 홀딱 젖을 것이고, 마른 옷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길은 미끄럽고, 날씨는 몇 분 사이로 오락가락 바뀔 거예요. 잘못하면 날아갈 수도 있으니 강풍이 불어올 때는 몸을 숙이고 최대한 중심을 낮춰 바위 뒤에 숨으세요. 등산 스틱은 반드시 두 개. 하나만 짚었다가는 바람에 몸이 홱 돌아가서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시무시하구나. 지금은 비수기라 산장이 모두 문을 닫아 캠핑장을 이용해야 한단다. 텐트까지 이고지고 산을 타게 생겼다. 혼자서는 절대 못 갈 것 같다. 내가 타려는 W 트레킹 코스는 4일간 토레스 전망대, 프랑스 전망대, 그레이 전망대를 왕복하며 사슴뿔처럼 기묘하게 생긴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와 쿠에르노 델 파이네Cuernos del Paine의 파노라마를 눈앞에서 조망하는 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만난 친구들은 다들 열흘짜리 Q 코스를 탄단다. 배낭이 너끈히 20㎏은 넘어 보인다. 혼자 산을 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산속에서 길이라도 잃는다면, 그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 상태로 산을 타다가는 남은 여행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감기는 으슬으슬 수준을 넘어서려나 보다.




며칠을 밖에 나서지도 못한 채 내리 자고 말았다. 좀 살만해진 듯해 느지막이 일어나 해안선을 따라 동네 구경을 나섰다. 휑한 마을 푸에르토 나탈레스에는 확실히 사람보다 개가 많았다. 나무 둥치 아래 배 깔고 드러누워 긴 하품을 뱉어내다가 얼음장 같은 바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총 뛰어들어 오리를 쫓으며 나른한 오후를 보낸다. 귓불을 치는 파타고니아의 바람, 이러다 감기가 도지겠다 싶은데 마침 카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골목 사이에 숨은 작은 카페로 들어간다. 딸랑! 종소리가 나고 한참 후에야 느릿느릿 주인이 나타난다. 손으로 정갈하게 쓴 메뉴를 찬찬히 살펴보며 드립 커피를 주문하니 순식간에 커피 향이 번진다. 커피를 다 내리자 라디오를 켠다. 마돈나의 Take a bow, 보이즈투맨의 End of the road. 한국에서도 오래전 지나간 팝송이 작은 카페를 잔잔히 채운다. 커피 한 모금에 수제 쿠키를 한 입 베어 문다. 밀린 가계부를 정리하고, 다시 예산을 짜고, 그리운 이들에게 엽서를 쓴다. 텅 빈 카페, 오래된 노래, 얼굴 가득히 햇살. 창 너머 새파란 바다가 넘실댄다.



떠나온 지 3개월 째, 계획 했던 여행의 반이 흘렀다. 그동안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 터리에나 나올 법한 황홀한 곳들을 누비며 한 곳도 놓치기 싫어 늘 숨 가쁘게 다녔다. 내게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있었던가? 낯선 작은 마을, 카페에 한적하게 앉아있는 것도 내가 꿈꾸던 일상이다. 지금쯤 토레스 델파이네 꼭대기 에메랄드 빛 호수에 몸을 던지고 있을 친구들을 떠올려보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여유로움의 행복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역시 여행의 행복은 관광지의 별점에 비례하지 않는다. 낯선 작은 마을, 카페엔 두 시간이 자나도록 손님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다. 커피를 끓여주고 사라진 주인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커피 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딸랑, 종을 울리고 카페를 나오고 나서도 여전히 카페는 비어 있다. 그래도 음악 소리만은 멎은 듯했다.


카페 정보
Cerritos Coffee and Cake

주      소 : Miguel Sanchez No 11, Puerto Natales, Chile
영업시간 : 월~토 09:30-20
지     역  : South America  >  Chile  >  Magallanes Region  >  Puerto Natales
전화번호 : +56 2412989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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