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un 14. 2021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이제 언니 마음 다 알아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시가 오는 로마 #7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 한혜영

공무원을 하던 동생이 그 짓을 때려치우고 태평양을 건너 뉴욕으로 이주, 세탁소 주인이 되어버린 뒤 일 년 내내 태평양 주름살과 씨름을 하고 있다 눌러도 눌러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 
태평양 그 시퍼런 치마폭 다려야 할 물굽이는 첩첩이 밀려오고, 질 나쁜 가루비누처럼 시원찮은 영어는 좀처럼 거품이 일지 않아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니 맘 내 다 안다, 
안다 하면서도 치마폭 솔기 하나 잡아주지 못하는 이 누나도 사실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바다를 입은 채 십년 내내 미친것처럼 출렁거렸다 
어차피 이쪽과 저쪽 끝에서 팽팽하게 잡아주지 못할 바에야, 동생아 바다는 구겨진 채로 펄럭일 수밖에 없으니 
펄럭이게 내버려두거라 

(후략)

-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한혜영, 천년의시작, 2002.



이 시를 읽으며 한국에 있는 저의 친언니가 떠올랐습니다. 


함께 카페를 운영하던 제가 다 때려치우고 이탈리아로 가겠다고 했을 때 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는 언니에게 늘 멋대로 사는 응석받이 동생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무책임하게 굴 줄은 몰랐을 겁니다. 저도 제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미 지원서를 제출하고, 1차 합격 메일을 받은 뒤에나 언니에게 해외 취업을 해서 이탈리아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가장 큰 단점이 혼자 일을 벌이고 나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교 시절 휴학을 할 때에도 그랬고, 취업을 할 때마저 중요한 결정들을 혼자 해치워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족들의 뒤통수를 치는 데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함께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니 아무리 저라도 말을 꺼내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언니와 저는 함께 아파트를 구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집과 일, 생계와 생활을 모두 공유했던 것이죠. 그러던 중 한 명이 갑자기 떠나간다는 건 다른 사람의 일상을 통째로 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언니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만약 언니가 안 된다고 하면 이탈리아에 가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조심스러웠다 해도 언니 입장에서는 그냥 '조심스럽게'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망설였다고 해도 때린 건 때린 거고, 맞은 사람은 맞은 겁니다. 그래서 바닥 끝까지 가라앉은 마음으로 언니가 얼마나 실망할지, 어떻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언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래,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믿지 못했습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되물었습니다. 


“진짜 괜찮아? 카페를 정리해야 하는 건데? 우리 아직 계약 기간도 한참 남아 있어!” 


“응. 카페는 내가 하면서 임대 내놓고 처분할게.” 


“그럼 집은? 집도 아직 보증금 받으려면 일 년 남아 있잖아!”


이건 마치 나에게 화를 내 달라고 조르는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저는 인간이 덜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니는 정말 괜찮다고 했습니다. 카페와 집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떠나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로마로. 



비행기를 열네 시간 타고 왔으니, 바다를 건너온 느낌이 아니라 하늘을 건너온 느낌입니다. 굽이치는 파도를 본 기억은 없고, 그저 구름 사이를 헤친 것과 가끔 귀가 멍해지는 것을 느낀 기억만 있습니다. 


당시에 한국 사회에 실망을 많이 했고,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때에는 외국에서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로마에 도착하니 행복을 찾기 전에 생존부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요. 모든 것은 제가 생각한 것과 달랐습니다. 먼저 저는 이탈리아어를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말을 못 하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산다는 것은 자괴감의 연속입니다.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요. 그리고 외국에 있더라도 회사는 회사입니다.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직장인이 된 것입니다. 제가 취업한 회사는 외국에 ‘있는’ 것이지, ‘외국계’ 회사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났지만,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며 한국인 손님들을 만납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제가 싫어하던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힘들게 했던 것들, 화가 나게 했던 것들을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합리화하며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말이죠. 조금 더 행복할 줄 알았는데, 다른 곳에서는 괜찮을 거란 희망이 사라져 조금 더 불행해졌습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커집니다. 여기에 계속 있는 것이 나에게 좋은 일일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언니, 나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이번에는 정말 혼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끈질기지 못하냐고 질책을 들을 각오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습니다.


"그래, 와. 언제 올 건데?"


순간적으로 언니가 쉽게 말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거냐고 묻는 저에게 언니는 정말 그만둬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더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프랑크푸르트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기도 참 많이 고생했다고, 그래서 다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었다고 말하며 저의 투정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제 마음을 다 안다며 다독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비뚤어진 저는 다 안다는 언니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성격, 취향, 가치관까지 너무나 다르거든요. 언니는 낙관적이고 무던한 편입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남이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사치를 부리지도 않고, 괜한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예민하고 쉽게 울고, 남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며, 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한 번도 언니가 저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속으로 어떻게 언니가 저를 알겠냐고 생각하며 겉으로만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며칠 뒤에 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유를 묻자, 주말 수당을 받기 위해서 주말마다 출근을 계속했는데, 상사가 주말 수당을 안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왕복 세 시간이나 통근하는 것을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퇴사 소식보다 쏟아지는 이유들에 더 놀랐습니다. 


‘안다 하면서도 치마폭 솔기 하나 잡아주지 못하는 이 누나도 사실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바다를 입은 채 십 년 내내 미친것처럼 출렁거렸다’ 


저는 제가 떠나온 이후의 언니를 알지 못합니다. 제가 로마에 와서 적응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부딪쳤던 것처럼, 언니도 카페를 정리하고, 집을 정리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해서 자리를 잡기까지 많이 뒤틀렸을 것입니다. 그건 몰랐습니다. 언니는 늘 빳빳하게 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만 구겨지고 펄럭이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충동적인 말과 결정이 언니에게 뒤통수를 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저만 흔들리고 펄럭이는 줄 알았는데, 언니도 같았던 것입니다.  


언니도 사실은 카페에 앉아 무료하게 보내던 시간을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힘들어서 다 그만두고 싶다고 말을 할  언니도 그런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돌이켜보게 됩니다. 제 멋대로 동생을 다 받아주는 무던하고 자비로운 언니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언니도 사실은 저와 같이 출렁거리고 있었기에 저의 말을 이해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니는 사진관을 차리고 싶다고 합니다. 아마 또 고생을 할 겁니다. 마음도 몸도 이리저리 흔들리겠죠. 그때는 제가 말해주고 싶습니다.  


"언니 마음을 나도 다 알아."





글/사진 박무늬

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이 막막하고 의욕도 없어서 작은 카페와 독립출판사를 차렸다. 친구와 함께 첫 번째 책 『매일과 내일』 을 내고, 출판사 사업 신고한 것이 아까워서 두 번째 책 『오늘도 손님이 없어서 빵을 굽습니다』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이탈리아 로마에 왔다. 현재 유로자전거나라 회사에서 투어 가이드로 일하며, 사람과 삶에 부딪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톨레도 대성당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