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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ul 21. 2017

알만 먹고 다음을 기약하는 여름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 들에서 보낸 사계 #2


 “오월만 같으면 농사 못 해먹지.” 매년 봄만 되면 어머니가 하는 말이다. 모내기를 중심으로 각종 밭작물이 주인님(이라고 하기엔 노동을 많이 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올해도 모내기의 추억은 아찔했다. 하루 14시간, 세끼 삼겹살을 먹어도 살이 빠지는 기적의 다이어트! 이제는 봄의 일상이 된 황사는 논을 덮었고, ‘포천은 괜찮지?’라고 묻는 친구에게 쌍욕을 하고 말았다.


 몸은 지쳤고, 마음도 지칠 무렵, 옆 논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강제로 힘을 냈다. 40년 전 그는 한 달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진흙 속에서 하루 종일 허리를 숙이고 손모를 냈다. 자리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아내와 함께했고, 그 돈으로 땅을 샀기에 행복했으리라! 그동안 땅값이 200배가 올랐지만, 아내는 떠나고 주름만 남은 노인은 쓸쓸해 보인다.



 또 지친 나를 위로한 건 이웃 마을에 붙은 현수막이었다. ‘지장산 계곡의 차량 출입과 야영 및 취사 행위 금지’. 오, 대박! 이곳은 아주 훌륭한 계곡인데, 지난 10년 간(혹은 그 이상) 사람들 때문에 매년 몸살을 앓았다. 술과 담배, 노름과 고성, 교통체증과 심각한 주차난. 눈앞에 펼쳐지는 아수라를 보며 괴롭게 읊조렸다. ‘여길 막아야해.’ 


 그녀(지장산 계곡)를 당장이라도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뭄이 너무 심해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물 없는 계곡은 아직 단장을 하고 있는 아내를 기다리는 일과 마찬가지, 기다리는 게 예의이다. 나 또한 가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물을 식물의 뿌리에 닿도록 하기 위해 애써야 했고, 갑자기 나타난 느치(멸강나방 애벌레) 수백 만 마리 때문에 농약 통을 등에 지고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제대로 된 비 한 번 못 보고 봄(초여름) 다 보내나 싶은 6월 말,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내렸다. 살면서 들어보지 못한, 굉음에 가까운 천둥소리로 시작한 소나기는 한 시간 동안 퍼부었다. 순식간에 길은 물길이 되었고, 타는 목마름에 시름하던 대지는 촉촉한 숨을 쉬게 되었다. 머릿속에 그녀가 떠올랐다. 내일 새벽 난 그녀를 찾을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는 그녀와 나 오직 둘뿐이다. 무슨 대단한 풍경을 본 것도 아닌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 지장산 계곡을 찾은 건 30년 전, 학교 소풍 때이다. 산만한 초등학생은 맑은 물속에 두 손을 담그고 걸어오느라 마른 목을 축였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조용하고, 시원하며, 맑고, 깨끗했다. 아이들이 웃으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도 함께 웃었다. 



 그녀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산(지장산, 혹은 보개산)이 있고, 큰 바위로 이뤄진 계곡이 있고, 그 위에 맑은 물이 흐르고, 옆에 길이 있고, 다시 산이 있다. 높은 산이 양쪽에 있어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지고, 길을 걷다가도 언제나 시원한(차가운) 물에 들어갈 수 있어 여름에 더위를 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이러한 산과 계곡, 물과 길이 수 킬로미터에 이른다.


 허기가 진 내게 그녀는 산딸기를 선물했다. 새빨갛고 영롱한 색 때문에 에로 영화 제목이 됐고, 그 덕에 성인용 과실이 된 산딸기이지만, 맛이 그렇게 순수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모든 친구들의 음료수를 한 통에 넣고 이제 막 먹을 찰나에 떨어뜨려 울던 소년이 생각났다. 그때 계곡 물을 마시며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어른이 된 소년은 두 손 가득 물을 마셨다.


 여름만 되면 들끓는 욕망으로 가득한 성인의 공간이 되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버려진 쓰레기를 품고 있는 그녀를 보면 열통이 터진다. 맑은 물이면 되지 꼭 술을 마셔야 하나? 도시락 하나면 되지 꼭 고기를 구워야 하나? 좀 걸으면 되지 꼭 차를 끌고 가야 하나? 나는 안다. 우리가 선을 지킬 때 그녀가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지장산 계곡(관인면)에서 차타고 10분 정도 가면 내가 사랑하는 블루베리 농장(창수면)이 나온다. 사실 나는 이곳을 알기 전까지 블루베리를 먹어본 적이 없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 도시의 작은 방에서 자취(하숙)한 유학생, 월급 얼마 안 되는 영화기자 등 내 인생의 이력에 어디에도 귀한 몸인 블루베리와 인연이 닿을 곳이 없었다. 그냥 나와 다른 세상의 과일이라고 치자.


 우연한 기회로 푸른언덕 블루베리를 만나고 매년 서너 번 정도 방문할 정도로 팬이 되었다. 먼저 블루베리가 맛있다. 체험비를 내면 밭에서 직접 과일을 마음껏 따먹을 수 있다. 또 얼마 정도는 가져올 수 있다. 신기한 것이 블루베리의 맛이 종류마다는 물론 나무마다 다 다르다. 한 마리 나비가 된 양 이 나무 저 나무 맛보고 다니다가 운명 같은 나무를 만날 수도 있다.



 블루베리를 맛있게 먹으려면, 당연한 소리지만, 잘 익은 걸 먹어야 한다. 잘 익었는지는 엉덩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가지와 연결된 부분까지 까맣게 됐으면 잘 익은 것이다. 아직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간 것은 덜 익어서 시다. 나는 땅에 떨어진 것과 벌레 먹은 것도 좋아한다. 잘 익었으니 떨어졌을 테고, 과일 맛 알기는 벌레가 나보다 전문가일 테니 말이다. 



 처음에는 블루베리 먹는 재미가 좋았지만, 나중에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좋아졌다. 블루베리 나무가 훤히 보이는 그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보고…. 좀 과장된 표현인 것 같지만, 몇 년 전에 비해 삶이 풍요로워진 느낌이랄까? 시원한 바람이 불거나 해질녘 풍경을 보면 더 좋다.


 안단테(andante), 푸른언덕 블루베리를 만끽하는 주문이다. 천천히 걸으며 다양하게 맛보고, 함께하는 사람과 이야기도 나누면 이곳은 더없이 달콤한 시간이 된다. 반대로 본전 뽑겠다는 마음으로 서두르기만 한다면 과일로 배를 채울 수는 있겠지만, 달콤상큼함을 느끼는 가족, 연인의 표정을 볼 수 없다. 다음에 올 사람을 배려할 정도가 된다면, 이미 신선놀음 중이다.



 수확 철이 되면 새내기 농부는 들에 곡식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엽도록 철없는 짓이었다. 짐승들도 먹고, 땅도 먹고 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가끔 우리는 다 가지고 싶어 한다. ‘꿩 먹고 알 먹고’. 현장예술가 최병수 선생은 말한다. “꿩 먹고 알 먹으면 멸종”이라고…. 알만 먹고 꿩을 잘 키워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여름은 아직 많이 남았다.





글/사진 농촌총각

인생의 절반에서 새로운 기회가 한 번은 더 올 거라 믿는 농부. 좋은 책, 음악, 영화, 사람들로 가득한 문화창고를 꿈꾸고 있다. / mmb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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