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절판되어 나오지 않는 책, 고어(古語)로 표현된 문장, 낯설지만 낯익은 표지가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지, 가라앉지 않은 물수제비처럼 오래된 책에 여운을 품다, 그렇게 헌책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책에 무지하지만, 아는 듯 있는 듯 허세에 취한 주인장의 느낌을 듬뿍 주고 싶었다. 다 읽진 못할지언정 일단 구매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더 이상 헌책방 협동조합에 가는 일을 지체할 수 없었다. 어두운 길눈의 초보운전자에게 서울이 아닌 김포는 생소한 길이었지만, 이제는 한정판이 되어버린 중고서적이 나에게 헌정될 생각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렸다. 창고에는 여기저기 책이 가득했는데, 책을 만지려면 모래 같은 먼지를 털어내야 했고, 시린 공기 때문인지, 먼지 때문인지 목으로 들어오는 칼칼함 마저 분위기 있다고 취해있을 때쯤 이것은 결코 쉬운 구매가 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 넓은 곳에서, 많은 양의 책을 한번 훑기도 어려웠는데, 여기저기 잊을만하면 지속적으로 밟히는 동일한 책들이 있었다. 그 책들은 이러했다. 누군가의 자기개발서, 종교인의 신앙고백서, 기업인의 성공신화, 이제는 한물간 정치인의 회고록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일기를 통해 보고 배우라는 성장시대의 큰 가르침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기고 싶어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체와 안정에 돌입한 지금, 그들의 기억 속에서 가장 먼저 방출된 수많은 구매실패의 흔적들이었다. 한동안 미니멀 라이프에 심취했다. 구매했던 물건들을 하나씩 돌아보며, 우선순위를 매겨 정리하고 처분했다. 구매라는 열망은 ‘나’라는 개인을 통해 시대까지 짐작하게 만드는 미시적 유물이었다. 먼지 같이 겹겹이 쌓인 욕심을 걷어내니 남기고 싶은 보물은 많지 않았다. (물론 그조차도 다시 쌓인 건 안 비밀이지만…) 살아남은 나의 소비 결과물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했다. 기억하고 싶거나 기억해야 하는 과거, 나 이런 사람이라는 현재, 그도 아니면 이렇게 되겠다는 미래를 나 자신에게 어필하고 설득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물건님은 응당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덜어내 후회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열망의 크기를 줄였던 적이 있었다. 생각 없이 책장만 보고 또 보면서 보물을 찾아냈다. 사실 보물을 찾아내는 눈은 길눈보다도 더 어둡고, 이게 보물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보물인 책들이 있었고, 그 책들은 이러했다. 문학이나, 시, 철학 책 같은 것들이 구석구석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격정적이었던 한 사람의 일기를 통해 더 나은 시대를 꿈꾸고 좌절하던 기록물이 얼마나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고전이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치열했던 과거 고민의 기록이 누구에게는 반성을 누구에게는 배움과 깨달음으로 이어오다 잊히기도 하고, 다시 찾아지기를 반복하다 누군가의 잊힌 구매 실패 책들이 나에게로 와서 성공이 되었다.
#헌책은 #포네그리프_랄까 #이_글을_읽고_있는_당신이야말로 #구매실패 #당신의_소비는_그야말로_여민동락 #휴머니즘_폭발
실패자 : 반짝반짝 주얼 리
실패내용 : 스와로부스키 구매실패
각: 어떻게 구매실패를 하신 거죠?
리: 처음엔 구매 실패가 아니었어요. 저는 호기심이 조금 많은 평범한 회사원이었거든요. 현실에 안주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역량을 키워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투잡으로 소매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어떤 아이템으로 시작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귀동냥을 하던 중, 쇼핑몰이나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모여있던 단톡 방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단톡 방에선 여러 정보들을 서로 공유했어요. 그러던 중 중국에 주얼리 공장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그분의 소문을 듣게 되었어요. 뭔가 머릿속이 반짝이는 게 액세서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전까지 액세서리의 액도 모르는, 심지어 잘 착용하지도 않는 1인이었지만, 가격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은 가격의 메리트, 여러 판매 루트를 통해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다는 유혹의 소나타를 읊조리셨고, 저 역시 그 장단에 맞춰하고 싶던 사업을 꿈꿔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이 보내준 사진 속 빨강, 초록, 파랑, 하얀색 스와로브스키가 반짝반짝 빛나는데 너무 영롱했어요. 백화점 빛깔이었죠. 그분은 처음이니 테스트 겸, 시장조사 겸 200개 정도를 사보라고 권하셨어요. 반짝반짝 빛날 나의 훗날을 기대하며 200개를 구매했고, 배송을 기다렸어요. 그렇게 기다림 끝에 받은 스와로브스키는 무언가 생각과는 달랐어요. 알맹이가 크고, 묵직했죠. 단추에 침을 박아 귀걸이를 만들었나 싶고, 기분 탓인지 자꾸 귓불이 말리는 것만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어요. 실제로 스와로브스키를 본 적이 없어 불안하긴 했지만, 알맹이가 크기까지 하다니, 알찬 구성이라며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어요. 황급히 온라인 마켓을 열었어요. 착용샷을 찍고, 상세페이지를 만들어서 올렸죠. 나름 상세페이지를 구성지게 잘 꾸몄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없었어요. 다른 곳은 잘 되는 것 같은데, 나만 하나도 못 파는 것 같아 번뇌하던 중 액세서리 선택의 폭이 적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액세서리를 좀 더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남대문을 돌아다녔어요. 회사원이었기 때문에 매주 토요일 아침 9시부터 3시까지 시장조사를 다녔는데요, 시장조사에서 유심히 체크해야 할 사항이 있었어요. 내가 산 스와로브스키의 진위여부를 확인해야 했거든요. 스와로브스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시는 사장님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넌지시 그 물건에 대해 물어보았어요. “이거 빛깔이 참 곱죠~ 그냥 스톤과는 다르죠~!? 제가 중국에서 도매가로 스와로브스키를 샀어요! ㅎㅎ” 사장님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게 무슨 스와로브스키냐고 반문하셨어요. 다급하게 스와로브스키라고 말하는 저에게 사장님은, 귀찮은 듯 한 손에 반짝이는 스와로브스키를 그대로 책상에 내리쳐 깨부수며 말했어요. “유리잖아!? 그것도 아주 하급 유리” 그제야 저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 스와로브스키가 도매를 하는지 알아보았어요. 구매했던 중국에 공장을 가지고 계시는 그분은 쉽사리 연락이 닿지 않았고, 급하게 스와로브스키 한국 본사에 연락했어요. 스와로브스키란 무엇인가? 스와로브스키는 스톤의 이름이었어요. 물론 진위여부를 판별해 달라는 연락이 많아, 다 해줄 수 없어 시리얼 넘버를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전 시리얼 넘버를 알아야 했어요. 끈질기게 그분에게 연락한 끝에 드디어 연락이 닿았어요. 간절하게 시리얼 넘버를 요청했고, 돌아온 건… 보석 모양의 색상표였어요. 그리고 그렇게 그분과는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았고, 그제야 구매 실패임을 깨달았어요. 199개와 1개의 깨진 스와로브스… 아니.. 유... 유리 귀걸이…
각: 199개는 어떻게 되었나요?
리: 함께 사기를 당했던 단톡 방 언니와 함께 유리 귀걸이를 팔기 위해 프리마켓을 준비하고 나갔어요. 프리마켓에서는 10시간 정도 앉아있었는데, 스와로브스키 아니 유리 귀걸이는커녕 남대문에서 매입했던 팔찌를 하나 팔았어요. 자릿세로 5만 원을 내고, 밥을 사 먹고, 음료를 마시고, 차비를 하니 10만 원 정도 쓴 것 같아요. 제가 남의 집에서 알바를 많이 해봤거든요, 마이너스로 10만 원이 더 추가되었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내가 직접 구매하고, 판매를 한 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결국 스와로브스키는 이렇게 실패월간까지 오게 되었네요. ㅎㅎ
각: 반짝반짝 주얼 리님의 구매실패는 어떠셨어요?
리: 이후로도 여러 소매업에 도전했었어요. 운동을 배울 때, 헬스 트레이너에게 실패를 줄이고, 효과적으로 운동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잖아요. 이번 구매실패가 계속되는 실패의 경험을 줄이고, 훗날을 더욱 효과적으로 도모하기 위해 경험을 돈으로 산다고 생각했어요. 평일에는 회사에서 일을 했고, 주말에는 시장조사를 다니거나, 프리마켓에 나가서 늘 바쁘게 움직였거든요. 술값도 아껴서 건강도 좋아지고, 실제로 나름의 판매 노하우도 생기게 되었어요.
각: 모든 실패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리: 처음에는 회사에서 더 배울 것을 찾고, 역량을 키우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실패와 씨름하다 보니 경험이 생기고, 자산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아직도 회사를 다니며 개인사업을 꿈꾸는 꿈나무라, 이 실패 경험이 어떻게 발현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잘 배우고 있습니다.
실패자 : 이레
실패내용 : 내 청춘을 드림
실패년도 : 나의 20대
사람이 참 간사하지. 두근대던 첫 마음이 신기루같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다 아련한 찰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아무 일 없었던 듯 내일을 살아가잖아. 실패를 겪고 난 직후 느꼈던 쌀쌀한 감정도. 먹고, 또 자고, 웃고, 또 떠들다 보면 잊히니까 말이야. 그래서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잖아. 어항 속 금붕어처럼.
어느 날, 실패월간의 편집장님이 글을 써달라고 했어. 주제는 ‘구매실패’래. 생각했지. 난 무엇을 샀는데, ‘실패했을까?’ 근데 딱히 이거다 싶은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는 거야. 아이템 하면, 물건인데. 난 물욕이 없고, 흥미가 없으니, 실패라고 다가오는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짧다고 하면 짧고, 살았다 하면 산 이 나이에. 나는 끊임없이 소비했고, 끊임없이 실패했겠지. 외교관이 되겠다고 과목별로 아주 두껍고 비싼 책을 수두룩 사놓고, 일 년도 채 안 돼서 운이 좋아 된 취업 덕분에 중고 책방에 새것과 같은 책을 팔았을 때 난 실패했을지도 모르고. 태생부터 다른 몸매의 소유자들이 포토샵이라는 무기까지 사용하며 예쁘게 찍어 올린 옷을 짤막하고 비루한 내 몸뚱이에 걸쳤을 때, 현실 Fit에 놀라 옷장 서랍 구석진 곳에 고이고이 숨겨둬야 했던 순간. ‘난.여.전.히.실.패.했.군.’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라. 근데, 이 모든 것은 말이야. 그냥, 全인류가 겪어내야 할 하나의 고비에 불과한 것 같아.
결론을 내자면, 내 인생의 최대 구매실패는 그거더라. 꿈을 위해 샀던 것. 결국에 포기되거나, 포기하게 되거나 그랬던 과거 속 내 미래. 분명히 샀는데, 뭘 샀는지도 모르겠는 그 무엇. 시작은 늘 선한 마음이었으나, 끝에 덮어진 것은 욕심과 야망이었고. 더 높은 곳을 정복해야 진정한 성공이라고 속삭이는 말들 속에서 남은 건 흐트러진 내 가치관이었으니까. 마치 치즈를 얻으려 덫에 자신을 스스로 던져 넣은 생쥐처럼, 세상의 기대라는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투자는 했는데 남은 건 비싼 석사 논문이라는 냄비 받침대거든.
요즘은 그렇잖아. 사랑도 사람도 진실한 것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잖아. 어떤 환경적 장애라도 다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와 사랑의 결실을 맺고자 목숨마저 귀히 여기지 않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허상에 불과해졌고. 타인이 만든 지옥 속에 사는 것인지. 내가 타인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왔는지. 순간순간 헷갈리는 매일을 견뎌내야 하는데, 사치 부릴 시간이 어디 있겠어. 유치원 선생님, 음악가, NGO 활동가, 작가. 과거의 나는 업그레이드와 다운그레이드를 반복해가며, 남들만큼. 남들처럼. 늘 충실하게 엇나가지 않으려 충분히 애쓰며 살았고. 돈. 시간. 노력. 그것들을 이용해. 타인의 꿈속을 떠돌며 그가 얻은 그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일에 솔직했으니까. 그랬으면 된 거지. 꽤나 열심이었잖아. 아직은 ‘완벽한 실패였다’라고 단정하지는 않을 거야. 결국,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고. 나는 지금 충분히 잘 먹고 있고, 잘살고 있거든.
실패자 : 꼬북핏자
실패내용 : 대학원
실패년도 : 나의 20대
소비는 돈이다. 소비는 타이밍이고, 소비는 선택이다. 돈과 타이밍이 없으면 소비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최종적 go를 허용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이다. 이렇게 삼박자가 갖추어진 소비에 실패하게 되면 소비자는 타격을 받는다. 돈이 아깝고, 하필 그때 나타난 적절한 타이밍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무엇보다 쓰라린 것은 선택에 실패한 나 자신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거니 웅앵웅…’ 하며 쉐도우 복싱을 하지만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모두 나여서 상처밖에 남지 않는다.
소비는 자고로 그에 응당한 대가가 있어야겠지만 나의 대학원 선택에는 그것이 없었다. 아마 시작부터 응당 치 못했기 때문일까. 대학원 진학은 학문에 대한 관심, 학술/연구분야에 대한 열망 등을 동기로 삼아 시작해도 승부를 볼 수 있을까 말까이지만 응당 치 못할 뿐 아니라 불순하기까지 했던 나의 동기는 도피였다. 그렇다, 나는 대학원으로 도망간 것이다.
어쩌자고 하필이면 대학원으로 도망을 갔는고 하니… 무서워서 그랬다. 대학 졸업 후 하게 될 수많은 어른의 징표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당시 너무나 철부지였던 나는 그때 당장 해야 된다고 상상했던 일들을 면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학자금 대출도 받아 “성공”적인 도피생활을 했다. 나는 논문을 쓴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하고, 이것저것 익히겠다 결심하게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수년 뒤 오늘, 나는 학위의 명예도 통장의 잔고도(TMI: 학자금은 지금도 갚고 있다.) 0으로 수렴한 채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지금 돌아보면 수년 동안 왜 진즉 관두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존버로 여겨졌던 그동안의 시간은 사실 희망고문과 계륵이 점철된 시간이었다. 즉 ‘학위가 취직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와 ‘여태껏 했는데 조금 아깝다’가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어 나의 탈출을 불가능케 했다. 좌우지간 학위는 취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고, 그때까지 한 것이 많이 아깝지 않았을 것이 팩트이긴 하지만 말이다.
계륵의 시간을 보내며 돈, 시간, 감정은 모두 거덜 났다. 역설적이게도 거덜이 나고서야 ‘이건 아니다’ 싶었다. 몇 년 동안 나오지 못해 개미지옥 같던 그곳을 하루아침에 손 털고 나왔다. 조금 더 일찍 거덜 냈으면 일찍 나왔으려니?
실패한 소비 덕분에 괴로웠지만, 결론적으로는 아주 좋다. 첫 번째로는 나의 미적지근한 상태를 종결 낼 수 있어서, 그리고 두 번째로는 계륵의 괴로움 체험했으니 앞으로 이 짓거리는 내 인생에서 줄여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결론의 결론은 말이지 내일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좀 낫지 않을까? 아님 말고.
3호 끝.
크고 작은 실패를 응원하는 실패 각성 잡지 실패월간.
by 도시 비둘기
문의 : fffail0902@gmail.com
SNS : @magazine_f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