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평선 역주행
Writer. 일랑
“사건의 지평선”
(event horizon)
어떤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느 영역 바깥쪽에 있는 관측자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그 시공간의 영역의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예시로, 블랙홀의 경계가 있다.
“사건의 지평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가 아닌 매우 생소했던 단어이지만, 한 가수로 인해 이 용어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바로, 17년 차 싱어송라이터 ‘윤하’다. 윤하는 2006년 12월 17일에 데뷔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으며, 직접 자신의 곡을 작사 작곡해오며 음악성을 인정받아왔다. 윤하의 대표곡이라고 하면 “기다리다”, “비밀번호 486”, “혜성”, “오늘 헤어졌어요”, “우산” 등 대중적으로 히트친 곡들만 나열해봐도 6곡이 넘는다. 이렇듯, 윤하의 히트곡은 정말 많지만, 상대적으로 예전에 나왔던 곡들이 대표곡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난 3월에 발매한 정규 6집 리패키지 [END THEORY : Final Edition]의 타이틀 곡 “사건의 지평선”이 역주행하면서, 윤하의 새로운 대표곡이 탄생하였다. 이 노래는 올 3월에 나왔지만, 6개월 후인 9월부터 슬슬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며 현재는 음원차트에서 당당히 1, 2위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사건의 지평선은 어떻게 역주행하게 된 것일까?
오프라인 공연의 재개
그간의 역주행 곡들을 보면, 대체로 SNS상에서 틱톡 노래로 사용되거나 방송에 많이 노출되거나 특정 곡의 가사를 밈으로 만들거나, 직캠 영상으로 인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건의 지평선 역주행은 앞서 말한 것들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바로, 오프라인 공연에서의 “라이브”를 통한 역주행이라는 것이다.
https://youtube.com/shorts/4arrNFIMLBk?feature=share
올 4월 18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리면서, 5~6월쯤부터 다양한 페스티벌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또한, 대학교의 꽃이라고도 볼 수 있는 대학 축제도 재개되면서, 윤하는 많은 대학에서 섭외를 받았다. 특히 9~10월의 축제 기간 동안 서울대, 경희대, 숭실대, 동국대, 단국대, 충북대를 비롯한 정말 많은 대학 축제에서 사건의 지평선을 라이브로 부르며 역주행에 불을 붙였다. 아무래도 윤하의 탄탄한 라이브 실력이 역주행의 아주 큰 역할을 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가사 또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건의 지평선은 한마디로 “좋았던 날들의 안녕과 새로운 시작의 응원”을 전하는 노래이다. 블랙홀의 일정한 경계 너머로 들어가면 그 안과 밖은 완전히 분리되는 것처럼, 우리의 좋았던 날들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보내주지만, 함께한 소중한 기억들은 마음속에 간직한 채 새로운 시작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가사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렇듯, 모든 끝에 또 다른 시작이 함께하길 바라는 윤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통의 이별 노래들은 멜로디부터 슬프며 이별의 대상을 응원하기보단, 원망하거나 붙잡는 가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건의 지평선은 이별을 담은 곡이지만, 밝은 멜로디와 누군가를 진심으로 보내주면서 응원하는 가사들이 오히려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과 아련함을 더욱 불러일으킨다.
이별은 슬프고 아프지만, 오히려 한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특히, 사건의 지평선에서 말하고 있는 이별은 연인과의 이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의 나 혹은 소중한 인연과의 이별 등 여러 범주의 이별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점이 더욱더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아름다운 이별이 존재한다면, 사건의 지평선의 가사와 같은 이별일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 노래로 아이돌 데뷔 초~ 현재 모습을 담은 영상 유행
최근, 트위터상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데뷔 초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사건의 지평선 노래로 담은 영상이 유행했다.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도 “사건의 지평선”이 오르기도 했다. 사건의 지평선의 가사는 어쩌면 팬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연차가 쌓이다 보면, 데뷔 초와는 정말 확연히 다른 모습들이 많이 보이기 마련이다. 나쁜 쪽으로는, 흔히 초심을 잃었다고 말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있으며, 좋은 쪽으로는, 실력으로든 외적으로든 엄청나게 성장해서 이제는 데뷔 초의 풋풋한 모습들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지 간에 팬들은 과거의 모습을 그리워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팬들이 사건의 지평선 노래에 맞춰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데뷔 초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으로 영상을 만든 것은, “예전에 모습들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그 소중한 기억들은 사라지는 게 아닌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으니까, 지금 현재의 모습들을 응원할게.”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이돌에게는 재계약을 하는 기간이 무조건 있기 마련이다. 이 시점에는 그룹이 해체될 수도, 완전체가 아니게 될 수도, 좋아하는 멤버가 이제 아이돌이 아닌 다른 분야로 나아간다는 소식을 듣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이 끝이 정말 완전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에, 너의 선택을 응원할게. 많이 그립겠지만 좋은 추억을 선사해줘서 고마워”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은 여러 형태의 아름다운 이별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학 축제로 인해 역주행 되었던 사건의 지평선이 이러한 영상들로 재생산되면서 역주행의 입지를 더욱 굳히고 있다.
최근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노래를 보면 보통 2분에서 3분 남짓의 짧은 곡들이 많은 상황에서, 5분 정도 하는 노래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윤하는 어떠한 홍보나 프로모션, 심지어 음악방송도 없이, 라이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진심을 다해 노래를 부르며 역주행에 성공하였다. 그간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자신의 곡을 맞추지 않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며 묵묵히 진정성 있는 노래를 만들고 부른 윤하의 음악성이 마침내 빛을 발휘한 것이다. 좋은 음악이 뒤늦게라도 빛을 본다는 건 뜻깊은 일이다. 앞으로도, 사건의 지평선의 역주행과 같은 사례가 더 많이 나오길 바라며, 모든 끝에는 시작이 함께한다는 노랫말처럼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의 끝과 시작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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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두산백과, "사건의 지평선”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70424001549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