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차이트
2022년 5월 2일, 하이브 산하의 쏘스뮤직에서 새 걸그룹이 데뷔했다. 이름은 르세라핌(LE SSERAFIM). 걸그룹 역사에 전례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무채색 도배, 멋들어진 런웨이 형식의 티저, 명품 브랜드의 태가 느껴지는 로고와 심볼디자인까지... 맥시멀리즘으로 가득하던 케이팝 역사에 충격적인 파장을 일으킨 조용한 미니멀리즘이다. 그리고 도회적인 서늘함, 또 차분함, 또는 담백함. 그들의 첫인상이다. 지금의 르세라핌은 어떤가? 정적이라기보다 역동적이고 사납다. "독기"와 "더 높이"를 외치며 달뜬 속도감을 올리는 그들은, 어쩐지 훨씬 전투적이고 바쁘다. 데뷔 후로도 지속적인 화제를 일으키며 명실상부 대세 반열에 오른 그들이지만, 이후의 콘셉트가 <FEARLESS>와 얼마나 적당한 접점을 가지는지는 의문이다. 솔직하게 말해, 브랜딩이 잘 유지되고 있냐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다. 도대체 르세라핌의 시니컬한 무채색은 언제부터 열띤 정열의 붉은색이 되었는가?
<FEARLESS>는 그들의 심볼과 로고 디자인이 보이는 단호한 직선의 미학을 꼭 그대로 입은 듯하다. 그 선의 느낌만큼이나 조용한 듯 날 선 표정연기와 가사의 어조가 서로 맞물릴 때의 조화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무채색상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핏을 갖춘 착장, 개인보다 전체의 합일을 내세우도록 조정된 튠의 보컬. 절제미가 돋보이는 흑백톤의 시각 연출과 미니멀한 악기 구성은 이들을 좀 더 어른스럽고 의젓하게 보이도록 포장한다. 각종 잔가지와 겉치레는 쏙 뺐다. 종합적으로 데뷔 무렵 이들이 내세우던 이미지는 놀랍도록 담백함 그 자체였다. 이 이미지가 르세라핌 고유의 세련됨을 만들었다.
그에 반해 <ANTIFRAGILE>은 통통 튀는 키치함을 뽐낸다. 혀를 내미는 안무와 함께 윙크하는 표정연기, 중독적인 훅은 얄미울 만큼의 주목도를 자랑한다. 스트릿 스타일과 과한 액세서리를 섞어 난해해진 착장, 독특한 톤의 래핑 역시 남다른 분위기를 구축한다. 더불어 이전보다 동세 있는 요소가 영상물과 안무에 많이 추가되었다. 색채도 다르다. 무채색에 쿨톤의 필터를 씌우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붉은색, 노란색 등 웜톤 위주의 색상으로 물든다. 흙먼지 날리는 남미 골목의 아포칼립스적 분위기를 연출했고, 이런 긴박한 뮤직비디오 속 분위기와 함께 한껏 주목을 끄는 하이톤의 관악기 소리가 노래를 끝까지 리드하며 치기어린 흥분감을 고양시킨다. 이로 인해 차분하지만 분명히 야망서린 속성을 표현하던 독보성은, 그저 "공격적"이기만 한 뻔함으로 전락한다. <FEARLESS>가 여러 기획요소를 잘 세공해 만든 캐릭터의 입체감을 <ANTIFRAGILE>은 손쉽게도 납작이 눌러버린다. 너무 큰 변화의 단차에 당황스럽다. 보컬 역시 각자의 음색을 뽐내며 서로에게 맞추지 않고 제멋대로 날뛴다. 특히 멤버 허윤진은 특유의 자모를 뭉개는 발음 흘리기나 끝음처리의 비성 등 솔로 때의 창법을 딱히 죽이지 않은 모습이기도. 전반적인 디렉팅 방향이 <FEARLESS>와 그 기조가 사뭇 다르다고 느끼기는 충분하다. 그렇게 '이지리스닝'과 '야심차고 당당한 태도'라는, 뼈대 중의 뼈대만 남긴 채 기획의 지향점은 과할 정도로 급격히 바뀌었다. 그래서 <ANTIFRAGILE>은 종합적으로 납득하기 쉬운 지점과 어려운 지점, 그 사이에 애매하게 위치한 작품이 되었다.
제작진들이 <FEARLESS>를 잊지는 않았는가? 아리송한 사이 발매된 <UNFORGIVEN>은 <ANTIFRAGILE>에서의 방향전환이 일시적 우회가 아닌명백한 선로이탈이었음을 드러낸다. 깔끔한 직선보다 와일드한 스크래치의 미감이 더 자주 목격되고, 시니컬한 여유로움보다 호전적임을 입었다고 보인다. 분명 데뷔 초기 그들이 가졌던 미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브랜딩의 초심을 잃었다는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뀐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마무리 트랙 <Fire in the belly>를 삼바 리듬으로 닫음으로써 <ANTIFRAGILE>을 승계한 라틴 요소를 놓을 생각이 없음도 내비쳤다. 하이브 방시혁 의장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K팝의 최대 경쟁자로 라틴 시장을 꼽은 적 있음을 생각해보면, 현재 그가 르세라핌에 얼마나 관여하고 있는지 몰라도 분명히 입김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건 <FEARLESS>에서 보여주던 도시적 얼터너티브 팝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졌다는 사실이다.
초창기의 브랜딩과는 이미 엇박을 넘어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특기할 만한 점은 르세라핌의 굿즈, 공식 행사의 각종 포스터 디자인은 여전히 무채색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왼쪽은 르세라핌의 첫 단독콘서트의 포스터, 오른쪽은 첫 팝업스토어에서 판매하는 굿즈의 카탈로그다. 모두<UNFORGIVEN> 전후로 선보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내놓는 부수적 콘텐츠의 디자인만 무채색을 지향한다고 해서 이가 르세라핌이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키는 중이라는 근거가 되는가? 중심축이 크게 엇나간 상황에서 곁가지만 혼자 초창기의 디자인적 뉘앙스를 고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필자는 잘 모르겠다. 더군다나 르세라핌이 비상감과 치열함을 내세우기 위해 쭉 사용한 온색 계열은 사람의 주목을 잘 끌고 흥분감을 쉽게 일으키는 색상이다. 보는 사람의 온도감을 한껏 올려놓고 재차 백스텝을 밟아 돌아온 무채색이 과연 처음만한 무게감과 설득력을 다시 낼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단순히 흑백톤의 연출을 주입식으로만 선보이면서 아직도 음악적 활동과 시각화 사이에 연결성이 있다고 믿거나, 그들의 브랜드적 정체성(BI; Brand Identity)과 브랜드 경험(BX; Brand Experience)이 잘 지켜지고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큰 착각이기 때문이다.
브랜딩이 잘 되어있는지에 대한 척도는 장기적으로 그 브랜드의 생명력에 영향을 미친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결국 일어난다. 과연 스스로가 짠 기획에 대한 디자인적 이해도는 얼마나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의문스러울 뿐이다. 로잘리아와 관련된 표절 여하나 <UNFORGIVEN>의 퀄리티가 야기하는 자잘한 논란을 떠나, 기획에서도 독자적으로 문제를 만들고 있다면 상황은 그들이 보는 것보다 많이 나쁠지도 모른다. 지금 선보이는 방향성이 르세라핌에게 맞는 것인지 제작진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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