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네온
눈 깜짝할 새에 한 해가 지나고,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있다. 2024년의 끝을 달리고 있는 연말, 언제나처럼 진행하는 K-POP 결산이 죽지도 않고 다시 찾아왔다. 이번 결산은 2024년의 F/W, 즉 하반기인 7월부터 12월, 총 여섯 달 사이에 발매된 앨범을 기준으로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2024년 하반기의 케이팝 씬은 약간은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였다. 여러 이슈가 있었고, 전반적으로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운 소식만 들린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은 계속된다. 싸늘할 정도로 추웠던 이번 겨울에, 어떤 보석이 피어났는지 하나씩 확인해보도록 하자. 이번 결산에서는 월별로 발매되었던 앨범 중 가장 좋았던 것을 하나씩 골라, 총 여섯 개의 앨범을 골라보고자 한다. 그런 만큼, 아무리 좋은 앨범이었어도 같은 달에 겹쳐서 발매되었다면 하나는 후보에서 탈락할 것이고 반대로 한 달 내내 발매된 모든 앨범이 다 그저 그랬어도 하나는 무조건 소개하도록 하겠다. K-POP은 종합 예술인 만큼 ‘좋은 앨범’을 고를 때에도 단순히 음악 뿐만 아니라 비주얼적인 부분이나 퍼포머의 헤어-메이크업-코디 삼박자, 프로모션 등 다양한 고려 대상이 존재하기에 음악 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와 같은 영상과 콘셉트 역시 전체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했다. 또한, 곡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앨범을 고르는 만큼, 앨범에 실린 곡 전체의 조화와 자연스러운 흐름 역시 고려 대상에 넣을 예정이다.
참, OST나 특정 TV 프로그램이나 예능을 위한 프로젝트형 앨범, 곡이 하나뿐인 싱글 앨범은 선정에서 제외했다.
7월
ENHYPEN - [ROMANCE : UNTOLD]
7월 12일에 발매된 ENHYPEN의 두 번째 정규앨범, <ROMANCE : UNTOLD> 를 7월의 앨범으로 뽑겠다. 일단, 타이틀 'XO'가 정말로 괜찮은 음악이다. 엔하이픈이라는 그룹이 가지는 몽환적인 이미지와 함께 (아마도 뱀파이어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이들이 가지는 서사를 앨범으로 굉장히 잘 풀어냈다. 엔하이픈의 앨범을 각각의 챕터라고 생각했을 때, 챕터가 거듭할수록 엔하이픈이 성장하고, 앨범의 구성 역시 성장에 맞추어 변화한다. 이번 정규 2집 <ROMANCE : UNTOLD>는 엔하이픈의 서사적 성장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확장되어 더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트랙과 트랙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앨범 구성에서 적절한 통일감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R&B 요소가 짙은 트랙을 다수 구성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멤버 각각의 실력이 제대로 받쳐주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는 곡을 앨범에 다수 반영하면서 강렬한 퍼포먼스에 익숙하던 리스너들에게 엔하이픈의 성장과 함께 더욱 넓어진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강조할 수 있는 노련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추가적으로, <ROMANCE : UNTOLD>의 트레일러 영상 중 콘셉트 시네마 영상은 단편 영화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는데, 엔하이픈의 캐릭터와 같은 이미지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꽤 흥미로운 누아르 코드를 담고 있기에 함께 즐기면 좋을 듯.
추천하는 트랙은 6번, <Paranormal>.
8월
LE SSERAFIM - [CRAZY]
8월의 앨범은 8월 30일에 발매된 LE SSERAFIM의 미니 4집, <CRAZY>로 정하고 싶다. 르세라핌은 언제나 르세라핌이다. 르세라핌이 데뷔 때 가지고 나왔던 날카롭고 서늘한 이미지를 타이틀곡 'CRAZY'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르세라핌의 주 무기처럼 느껴지는 타이틀을 첫 번째 트랙으로 내세운 후, 이어지는 수록곡들은 또 새로운 맛이다. 어딘가 독특하고 이해하기 힘든가 싶다가도 중독적인 트랙 구성은 담백하게 ‘Crazy’ 한 단어로 모든 것을 만들어 놓은 르세라핌의 이번 콘셉트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이번 앨범의 포인트는 르세라핌의 키워드가 ‘남들보다 대단한 나’, 혹은 ‘그 어떤 것에도 패배하지 않는 나’가 아니라,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고, 다 함께 미쳐보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번 앨범을 통해 르세라핌은 단순히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행보를 보인다. 대놓고 ‘미치다’라는 표현을 앨범의 모든 트랙에서 사용하고, 특히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며 웃지'를 샘플링하여 인트로에서 사용한 2번 트랙 'Pierrot'은 ‘미침’의 농도가 가히 도발적이고 색다르다.
이번 <CRAZY>는 여전히 르세라핌다운 색깔을 가져가면서도 앞으로의 변화구를 확실하게 대중들에게 어필한 앨범이라고 보고 싶다.
추천하는 트랙은 3번, <1-800-hot-n-fun>.
9월
BOYNEXTDOOR - [19.99]
9월 9일에 발매된 BOYNEXTDOOR의 세 번째 EP, <19.99>가 9월의 앨범 자리를 차지했다. 2024년은 보이넥스트도어의 막내 멤버인 운학이 19세, 즉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 해를 보내는 연도였다. 그런 운학에게 초점을 맞춰 스무 살을 코앞에 둔 19.99세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이번 <19.99>의 콘셉트다. 보이넥스트도어가 표현하는 세계는 언제나 그 해상도가 높은 편이다. 멤버들은 그들 자신과 굉장히 가까운 거리의 소재를 앨범의 콘셉트로 다룬다. 그 과정에서 멤버들의 작사를 통해 더욱 콘셉트의 대한 이해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그들의 서사를 설득할 수 있도록 한다. <19.99> 역시 보이넥스트도어의 멤버들이 각각 스무 살이 되는 언저리의 나이에서 느낀 것들을 위트 있고 솔직한 가사로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트랙이자 선공개 곡이었던 <부모님 관람불가>는 특히 디테일한 보이넥스트도어의 ‘장난 혹은 방황’이 인상적이다. 방황이라면 방황이지만, 그 선을 절대 넘지 않는-청소년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봤을 법한 경험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설정한다거나, 밤에 들키지 않고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도어락 건전지를 빼 놓거나, 혼날 때 잔소리를 듣는 대신 방바닥 무늬를 세어본다거나 하는 가사는 마치 내 얘기, 혹은 내 친구 얘기처럼 들린다. 그 현실감을 통해 여전히 보이넥스트도어는 ‘옆집에 있을 법한 소년’이다.
스킷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3번 트랙인 은 특히 힙합 문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스킷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앨범 내에서 곡과 곡 사이를 지루하지 않게 연결해주는 효과와 함께 스킷의 본래 의미인 짧은 연극을 제대로 보여준다. 물론 아이돌 앨범에서 스킷의 존재가 처음이었던 것은 아니고, 특히 힙합 씬에서는 여전히 종종 앨범 사이에 스킷을 집어넣는다. 하지만 그보다 흥미로웠던 지점은 스킷의 내용이 완전히 ’19.99살’인 운학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부분이다. 하나의 앨범을 단순히 콘셉트 이상으로 멤버의 마지막 미성년의 지점을 의미 있게 기념할 수 있는 구성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이넥스트도어의 끈끈한 유대와 그들 사이의 신뢰를 엿볼 수 있기에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19.99> 속 스킷의 존재가 떠오르게 만드는 보이넥스트도어의 확실한 장르적 색깔은, 정통적인 힙합 장르 팬으로써 그 행보가 무척 반갑기만 하다.
추천하는 트랙은 1번, <부모님 관람불가>.
10월
82MAJOR - [X-82]
10월 15일에 발매된 82MAJOR 의 미니 2집, <X-82>를 소개하겠다. 요즘 가장 눈여겨보게 되는 신인이 바로 82MAJOR 가 아닐까. 82MAJOR의 음악은 언제나 프로모션에서부터 뮤직비디오, 퍼포먼스와 물론 음악까지도 전부 정교하고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82메이저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음악과 퍼포먼스에서 가려지는 멤버가 없다는 점이다. 이번 <X-82>의 타이틀곡인 ‘혀끝’만 봐도, 여섯 멤버 모두가 자신감 있고 테크니컬한 래핑을 통해 곡을 구성하고 있다. 기존에 보컬적인 매력을 보여 줬던 멤버들 역시 이번 타이틀곡에서 랩 장르에 도전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면서 ‘82MAJOR 힙합’ 이라는 장르를 통해 리스너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 위에, 다채로운 패턴 퍼커션을 통해 ‘혀끝’을 들었을 때 느껴질 화려함을 더했다. 또한,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구성의 흥미로운 뮤직비디오와 함께 여섯 멤버 모두가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이 풍성하게 퍼포먼스를 채워낸다는 점까지 이번 앨범을 채우고 있는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지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82메이저는 굉장히 ‘근본’에 가깝게 서 있는 5세대 아이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복고적인 이미지나 올드스쿨 힙합의 느낌,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가사는 ‘아는 맛이라’ 더욱 맛있다. 실력이 제대로 받쳐주는 신인 답게, 이번 미니 2집은 82메이저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자신감을 제대로 선보이고 있는 앨범이다. 앨범에 수록된 모든 음악이 전부 믿음과 자신감, 그리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앨범 전반에서 보여 주는 제대로 된 실력은 대중들이 이들의 자신감에 충분한 근거와 신뢰를 갖도록 한다. 다음 앨범, 다음 행보가 기대되고 그 포텐셜이 눈에 보이는 신인, 귀하다.
추천 트랙은 4번 트랙인 <Gossip>.
11월
IRENE - [Like A Flower]
역시 케이팝 씬에서 SM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번 하반기에도 다양한 SM 소속 아티스트들의 센세이션한 음악이 발매되었으나, 그 중 레드벨벳 아이린의 첫 미니앨범인 <Like A Flower>을 11월의 앨범으로 소개하고 싶다. SM 소속 아티스트의 솔로 앨범은 정말 발매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11월 26일에 발매된 아이린의 <Like A Flower> 역시 첫 솔로 앨범이다. 레드벨벳의 음악에서 아이린이 보여 줬던 색깔 뿐만 아니라, 레드벨벳-아이린&슬기 유닛 활동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이린의 보컬적인 매력과 제대로 된 퍼포먼스 실력을 확인했다. 그렇기에 첫 솔로는 어떤 방식으로 아이린의 이미지를 전개해나갈까, 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Like A Flower>은 아이린의 몽환적이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 줬다. 아이린의 미니 1집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미지를 가지고 갔으면서도 팝을 기반으로 한 댄스 음악이나 밴드 음악, 어쿠스틱, 발라드까지 다양한 하위 장르를 통해 앨범을 들을 때 지루하지 않도록 했다. 보컬 뿐만 아니라 가벼운 래핑까지. 아이린의 다채로운 매력이 꾹꾹 눌러 담긴 앨범이다. 스페셜 트랙까지, 정말 다채롭고 풍성한 음악으로 앨범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꼭 한번 아이린의 다양한 색깔을 감상해보길 추천한다.
추천 트랙은 4번, <Strawberry Silhouette>.
12월
TWICE - [STRATEGE]
트와이스가 정말 연말다운 앨범으로 돌아왔다. 12월 6일에 발매된 트와이스의 미니 14집, <STRATEGE>를 12월의 앨범으로 정하고 싶다. 불꽃이 터지는 것 같은 트와이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그 곡 구성은 정말 연말-내지는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린다. 마치 연말 선물꾸러미처럼 따뜻하고 에너지 넘치는 트랙으로 앨범을 채운 트와이스의 14집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반가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가사와 중독되는 퍼포먼스, 그리고 캐치한 훅까지 트와이스는 타이틀곡 'Stratege' 를 앞세워 리스너들에게 익숙하고 또 반가운 ‘트와이스의 컴백’을 제대로 알리고 있다.
이번 14집 <STRATEGE>에는 영어로만 이루어진 곡이 절반쯤 되고, 그렇지 않은 곡에도 영어 가사의 비중이 꽤 높은 편이다. 한국 팬으로써 약간은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트와이스가 겨울에 맞추어 따스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파워풀한 보컬과 함께 ‘마음껏 사랑하고, 느끼고, 즐기자’라는 표현처럼 이번 14집에 수록된 모든 곡이 시원스럽고 속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위로를 받고, 어떤 부분에서는 따뜻해지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힘이 나는 그야말로 ‘TWICE-TRAGY’의 결정체 같은 앨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트와이스가 가장 잘하는 장르가 된다. 특히 나연과 지효의 보컬이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
추천 트랙은 2번 트랙인 <Kiss My Troubles Away>.
이렇게 2024년 하반기 발매된 K-POP 앨범들을 다시금 들어 보고 나름의 좋았던 앨범을 골라 봤다. 작년에도 디지털 싱글의 범람에 아쉬움을 느꼈었는데, 이번 년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너무 좋은 음악을 찾아내서, 이 아티스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은데 앨범에 수록된 곡이 하나 내지는 두 개 뿐일 때의 허탈함이란. 하반기 K-POP을 정리하면서 최대한 다양한 장르를 담고자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종종 느끼는 것이라고 하면, 왜 좋은 앨범은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는 걸까. 같은 달에 발매되어 소개하지 못하고 넘긴 아까운 앨범도 꽤 존재했다. 반면, 특별하게 꽂히는 앨범이 없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달도 있었다.
2024년, 특히 하반기는 참으로 다사다난했고 쉽지 않은 소식들이 마구 범람한 시기였던 것 같다. K-POP 역시도 이렇다 할 눈에 띄는, 센세이션한 무언가를 많이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이를 발판으로 삼아 2025년에는 더욱 다채롭고 풍성한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한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싶을 뿐이니까.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 소유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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