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er. 차이트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그대로 베끼면 편하다. 힘들이지 않고 괜찮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 AI가 발전한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그려달라고 한 마디 부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창작자의 고유성과 이에 대한 존중 및 보호를 우선시하는 예술계에서 이는 큰 골칫거리다. 더욱이 최근에는 기계와 사람 할 것 없이 더욱 다른 이들의 것을 ‘교묘하게 베끼’고 있다. 이에 예술계는 작가의 이미지 재구성 방법을 기준으로 표절을 판가름해왔다. 이미지 과잉이 두드러지는 시대인만큼 이미지 자체가 새롭지 않아도 기성 이미지를 어떻게 짜깁기하고 재구성해내는지 역시 표절을 가를 수 있는 믿을 만한 지표로 본 것이다. 둘 이상의 스타일을 재량껏 재구성하면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며, 엮어내고 편집하는 방법에도 작가의 개성이 묻는다. 결국 같은 레퍼런스를 써도 결과물은 판이한 경우 역시 많아지니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의 것이 겹치기란 오히려 더욱 어렵다.
오늘날의 표절 논란 역시 대개 이런 부분이 문제된 경우다. 르세라핌(LE SSERAFIM)도 한 차례 홍역을 앓았다. 본격적으로 일이 불거진 계기는 〈ANTIFRAGILE〉의 프리코러스. 어쩌면 같은 장르의 신성ㅡ로잘리아ㅡ을 향한 오마주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으레 오마주(hommage)로 받아들여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본딴 대상이 유명해야 한다. 그래야 흉내내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모사함으로써 그 대상을 향한 리스펙(respect)을 함의하게 된다는 점이다. 르세라핌은 이 두 번째 조건에 어긋난다. 가창 및 장르 선택에 그치지 고양이 안무, 남미 골목인 배경, 온색 위주의 컬러 팔레트, 빨간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고양이 헬멧과 오토바이, 레이싱 수트 등 로잘리아의 이미지를 이루는 주요 특징이 모두 한 자리에 집중된 것은 의심을 사기 충분했다.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서만 본뜬 집착적 레퍼런싱이 존경(respect)으로 비치기란, 글쎄. 어렵지 않을까.
특히나 르세라핌은 멤버 개개인의 서사를 기획과 엮어 고유성을 내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매우 치명적이다. 이후에도 그저 레퍼런싱 대상으로 로잘리아를 피했을 뿐 〈Smart〉, 〈Swan Song〉 등 꾸준히 또다른 팝송 유행만 가벼이 답습하는 모습으로 여전한 의존도를 보인다. 초창기 의도보다 레퍼런스를 우선시하며 우선순위가 흩뜨러진 주객전도. 말 그대로 레퍼런스는 시각적 보조자료일 뿐임을 잊으면 안 된다.
아이브(IVE)의 〈Baddie〉도 그렇다. 그저 ‘힙해지고 싶다’ 이상의 아무런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Kitsch〉는 같은 힙합계열이라도 반복적이고 단순한 리듬꼴과 멜로디가 눈에 띈다. 결과적으로 이전 타이틀 곡이 공유하던 특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멋지지만 고압적이지 않고 친근하다. 여전히 따라 부르기 쉽다. 하지만 〈Baddie〉는 변칙적이고 어려운 접근이 매력이다. 아이브에게서 한 번에 착착 감기는 맛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너무 급작스런 변화에 조금씩 거리감을 느낀다. 피프티피프티의 〈Cupid〉도 한국 아이돌의 타이틀 곡으로는 신선하다. 하지만 정작 안성일 프로듀서가 소개한 것만큼 해외에서 먹힌 이유까지 ‘신선해서’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스캣이나 허밍에 리버브를 먹인 아득함은 프렌치 팝 인트로로 상당히 흔하기 때문이다. 아일릿(ILLIT) 역시 〈Magnetic〉이 성공하자 노래의 구성을 강박적으로 의식한다. 〈Cherish(My Love) 〉에서도 빠지지 않는 원희의 도입부 나레이션과, 보컬 찹(Vocal chop) 질감 음률의 후렴 등이 그것이다. 다른 작품이나 유행에 꽂혀 이 흐름에 오르려고만 하니 ‘자기화’라고 할 만한 변주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
어떤 창작이던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가 또렷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구심점이 흐려지면 제작자는 급한대로 평소 뇌리에 박힌 익숙한 이미지를 무지성으로 끌고 오며 무리수를 두고, 여기서 빈틈이 생긴다. 이 틈새로부터 표절성은 몸집을 불린다. 나도 모르게 표절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에서 ‘진짜 자기 것’을 만들기란 가능한 일일까?
에스파(aespa)는 이를 해낸다. 기존의 이미지를 누가 얼마나 신선하게 재조립했는지 씨름하는 대부분과, 이 움직임에서 껍데기만 읽어낸 몇몇 스타일의 열화판으로 넘치는 케이팝에서 과감하게 ‘재구성’하는 일 자체를 포기한다. 대신 적재적소에 원본 그대로를 불러온다. 그렇다면 오히려 에스파야말로 표절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좀 쉽게 말하자면 앞서 말한 오마주에 차라리 가깝달까. 적어도 에스파는 유행에 꽂힌 나머지 마땅한 이유도 없이 이를 기존 브랜딩에 억지로 욱여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상기한 비교군과의 차이다. 표절성은 단순히 레퍼런스와의 시각적 유사도만 따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에스파의 이미지 차용을 문제 없도록 만들었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이들의 이야기를 요약한다. 《MY World》는 블랙맘바를 쓰러뜨렸으나 환각 퀘스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에스파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부 기억과 능력을 잃고 현실세계로 복귀한 무방비 상태의 에스파는, 트랙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작금의 상황에 위화감을 느낀다. 보다 세계관 용어가 직접적이던 가사도 줄었다. ‘MY’, ‘into the REAL WORLD’ 정도로 최소화된 데에다 이 역시 고유명사라고는 눈치채기 힘든 맥락으로만 들어가 있다. 전반적으로 은유성이 깔린 단어 선택이 환각이 덧씌워진 세상만 보는 상황과 맞물려 효과적인 표현이 된다.
블랙맘바를 무찌르느라 차원의 경계는 무너지고, 리얼월드도 불안정해졌다. 하지만 그 무너진 장벽을 타고 넘어온 다중우주의 또다른 무수한 ‘나’가 환각 속에 갇힌 ‘나’와 접촉을 시도하면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비로소 〈Drama〉에서 이들은 상호 접촉에 성공, 도움을 받아 환각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의심만 해 온 서로의 존재를 직접 마주하게 된다.
‘나’의 수많은 파편은 곧 자신의 무수하고도 다양한 가능성이다. 다중우주 속 다른 모습이지만 분명히 현재 이곳에서 사는 ‘나’에 완벽히 대응하는 존재인 것이다. 누가 '원초'인지, 각각의 아바타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힘을 합치면 더 무한한 가능성으로 팽창한 끝에 강력한 초신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를 곧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곧 이 거대한 핵융합은 하나의 대폭발(Supernova)로 나타나고, 한 세대의 끝이자 다음 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아마겟돈(Armageddon; 대종말)으로 불어닥친다. 이후 초토화된 땅 위 에스파는 ‘새로운 나’를 기준으로 다시 질서를 재편한다. 이렇게 외계존재의 침공과 이로 인해 일어나는 거대한 혼란 및 융합을 그린 것이 에스파의 1집 《Armageddon》이다.
SM엔터테인먼트가 이 발매를 기념해 뿌린 홍보물은 찌라시다. 이 프로모션은 광적인 인기를 끌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헌데 이 홍보가 인기를 끈 비결은 그저 ‘밈잘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설명한 플롯의 핵심을 함축할 수단으로서 이 밈과 전단지가 갖는 사회적 상징성이 절묘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계존재의 접근’, ‘다가오는 종말’ 등의 내용적 뼈대는 인터넷 발 Y2K의 음모론과 기막히게 닮아있다. 그래서 ‘찌라시’의 차용은 더없이 훌륭한 메타포가 된다. 무엇이 진짜 ‘나’일지 가려내며 위협과 불안감에 떠는 에스파의 실루엣 위, 믿을 구석을 맹목적으로 갈구하는 현대인의 잔상이 강하게 겹친다. 합법적인 ‘네 것 내 것’ 전략에는 이렇게 닮은 구조의 다른 소재를 겹쳐 놓았다는 비결이 숨어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사람들에게 원본을 들킬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표절일 수가 없다. ‘외계인 침공 시 Armageddon 안 듣는 사람이 먼저 잡아먹힌다’, ‘어쩜! 나일 수수수수퍼노바’ 등의 문구는 에스파를 특정하는 단어나 구절 단위의 표현만 빼면 나머지는 원본 그대로다. 외계인 캐릭터나 기본 기하도형을 활용한 투박한 그래픽, 노랑과 검정 및 빨강 등 이목을 끌기 위한 자극적 배색, 텍스트 별 색상과 내용까지도 모두 원본 그대로다. 그래서 ‘어, 이거 그건데?’ 하는 기시감을 확실하게 부른다. 대중이 에스파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표절논란 없이 오히려 뜨거운 호응을 얻을 것임은 아마도 원 프로덕션이 너무나 가뿐하게 예상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상단 좌측에서 하단 우측으로.
1. Armageddon MV 속 윈터.
2. 스타크래프트 '사라 케리건(칼날여왕)'.
3. 젠틀몬스터X메종 마르지엘라 2025 캠페인.
4. Savage 카리나 티저.
점점 확실해진 방향성은 날카롭다 못해 서늘하다. 괴수의 이미지나 창백한 청색광, 차갑고 기계적인 피부 표현, 은은히 펄감을 머금은 쉬머 등이 피부 위 서늘하게 빛나는 기계적 광택 표현도 이 원형으로 추측되는 이미지 소스가 명확하다. 모델의 포징과 바닥의 발광 오브제 등에서 오히려 노골적으로 닮음을 지향하고 있어 아니라고 하기가 더 민망한 정도다.
(오른쪽 그림)
상단 좌측부터 하단 우측으로.
1. Armageddon 카리나 티저.
2. Armageddon 지젤 티저.
3. 젠틀몬스터 2024 캠페인.
4. 장 폴 고티에 2020 스프링 콜렉션.
(아래 그림)
상단 좌측부터 하단 우측으로.
1. Drama MV 액션 시퀀스.
2. 영화 매트릭스 액션 시퀀스.
3. Whiplash 티저.
4. 영화 공각기동대 '쿠사나기 모토코'.
〘아키라〙-〘공각기동대〙-〘매트릭스〙등의 사이버펑크 스타일 영화 계보로부터 영향받은 특정 브랜드의 아이템만 고르는 것도 이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Dion Lee(디온 리), MUGLER(뮈글러), GENTLE MONSTER(젠틀몬스터), RUI(루이), WINDOWSEN(윈도우센) 등 저마다 결의 차이는 조금씩 있긴 해도 어쨌든 셀렉하는 풀에 제한을 둔다.(이 중 젠틀몬스터와 뮈글러는 협업 콜렉션도 발매한 적 있다.) 더 나아가 에스파는 이미 해당 영화 속 미장센을 여럿 오마주한 전적이 있어 더더욱 의도만 짙어 보인다. 이들의 원색적인 바디수트, 전투 고글 등에서 ‘쿠사나기 모토코’가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당연히 그래야 했을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처음부터 에스파의 것이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누가 ‘원초’인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성공적인 소화력을 뽐내는 그들은 이미 원본과 한몸이다. 이것이 바로 합법적인 ‘네 것 내 것’ 전략, 그러니까 ‘레퍼런스의 자기화’다.
초창기의 원 프로덕션 역시 실수를 범한 적은 있다. 표절론이 불거진 아트웍을 모아보면 오히려 현재의 작업물만큼이나 오마주하려는 의도가 변함없이 선명하긴 하다. 하지만 이들이 레퍼런싱한 K/DA와 당시의 타임라인 속 에스파가 갖는 교집합은 ‘사이버 아이돌이며 전투 캐릭터’라는 것 외에는 전무한 수준이다. 무질서와 비정형의 것들로 가득 찬 광야에서 굳이 지하철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와, 이 속에서 에스파가 블랙맘바의 외피를 마주하고 싸우는 장면이 연출되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안타까운 점은 상기한 비교군은 이 때의 에스파보다도 레퍼런스 활용의 모범적인 예시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Y2K라는 유행의 모호하고도 폭넓은 범주 아래 목적성을 잃은 이미지 디깅만 반복한 결과는 대개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레퍼런싱으로 엮인 이미지와 아티스트라는 두 개체가 굳이 같이 묶여야 할 이유를 자연스럽게 납득시키지 못한다. 이 갭을 대중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사람의 직관은 원본이 가진 형태, 색상, 음률 등의 수학적 비례를 일일이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니 땐 굴뚝에서 나온 연기일 수 없다. 또 예시로 든 아이돌 중 일부는 표절 시비에 다른 잡음이 얽혀 정도 이상으로 비판받았다고는 하나, 이가 판을 키웠을지언정 발매 당시부터 이미 제작론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는 담론이 뜨거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정도 이상으로 거품이 낀 결과라 단정할 수 없다.
두 집단의 대처 역시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반응은 극을 달렸다. 에스파와 원 프로덕션은 정말 오마주적인 의도였는지, 세트 디자인이나 배경의 3D 그래픽 디자이너와 연락해 의도를 설명하고 오해를 풀었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이후 지속된 후속작의 레퍼런싱이 적어도 처음부터 설계된 의도만큼은 오마주였음을 드러냈고, 실제로도 《MY WORLD》부터는 탁월한 자기화에 성공하면서 발전적인 모습을 증명해냈다. 상기한 비교군 중 일부는 오히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밝혀진 저작권 관련 비용 정산 문제가 불거지거나 원곡으로 추정되는 해외 작곡가와의 트러블이 해결되지 않는 등 연쇄적 잡음이 생겼다. 이러한 차이점은 양측의 제작론이 갖는 근본적 차이를 넘어 제작자들의 사고력과 윤리의식을 여실히 드러내는 단적인 예시가 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에게 ‘진짜’는 중요하다. '진짜'는 실용적이다. '진짜'는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표절 논란으로 가득한 사회를 살고 있다. 사회 전반에 가짜와 복제품이 넘실댄다. 방법론이나 이미지 등 어떤 측면에서라도 고유성을 확보하려면 깊은 사고력과 사유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지금 자동화나 복제의 유혹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드물 것이다. 스스로 자기화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힘을 기르기는커녕 일차적인 발상을 감추기 위해 어김없이 레퍼런스와 AI를 다시 동원하는 악순환만 계속된다. ‘진짜’와 ‘고유함’에 대한 수요는 날이 갈수록 치솟아도 이를 해결해줄 ‘진짜’의 공급원은 없으니, 사람들은 점점 ‘가짜’를 제대로 단죄하는 데에 혈안이 된다.
이런 시대적 혼란에 대한 에스파의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하나된 ‘나’를 ‘새로운 진짜’의 기준으로 정했다. 진짜를 정의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니..., 무슨 말인지 좀 알아듣기가 어렵다. 아니, 애초에 진위여부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것’ 아니었나. 이들의 합법적인 ‘네 것 내 것’ 전략에서 보이듯, 그리고 하나로 합쳐진 ‘나’를 새 기준이라고 선언하는 스토리라인에서 보이듯 이들의 해결책은 우선 정의하는 것이다. 기준점이 없다면 자신이 만들면 된다. 안 될 이유도 딱히 없다.
단,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인 척하거나 이미지를 빌려 써놓고 아닌 척 숨기는 음침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놓고 모사함으로써 그 아래 숨은 의도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들이 전하고픈 메세지라는 뼈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옷으로서 필요한 스타일의 표현만을 가져온 것이다. 결국 표현 그 너머를 메타적으로 바라볼 때 보이는 내러티브, 큰 그림이 무엇일까를 자연스럽게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추구하는 스타일이나 양식은 유동적이다. 형광색의 발랄한 옷을 입은 채 깜찍하면서도 살인적인 힘을 가진 초인일수도, 괴수와 합쳐진 형태의 불쾌한 존재일수도 있다. 대신 어떠한 색깔도 없는 메타적이라는 추상 개념 위 그때그때 필요한 옷을 골라 입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택한다. 이 놀랍도록 가뿐한 해답을 통해, 에스파와 원 프로덕션은 세상 속 지긋지긋한 진짜 논쟁의 무한루프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한다.
모든 종류의 믿음, 판단, 결정은 대상을 가르고 선별할 기준이 있어야 성립되는 행위다. 그러니 이 진품 논쟁을 끝내려면 기준점이 될 대상을 무엇이든 하나 선택해야 한다. 에스파는 이를 정확히 겨냥한 유일한 그룹이다. 이들에게 처음부터 거창하게 ‘진짜’를 찾아내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진짜라고 믿을 대상’을 먼저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기준점이 생기면 이를 기준으로 방향의 구분과 개념은 확실해진다. 그러니 영리한 선택이다. '진짜'를 가장 빠르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수많은 '나'의 진위여부는 상관없으며 하나되기를 받아들인 것은 모두 스스로의 결정이다. 주도권은 명백히 그들에게 있다. 결국 기준점이 꼿꼿하면 좋은 창작은 건재할 수 있다. ‘진짜 자기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시대라도 말이다.
창작자로서 매일을 쥐어짜내고 타인의 작품에 꽂혀 사느라 표절이 걱정된다면 핀터레스트와 Chat GPT에게서 졸업하는 연습을 급선무로 두어야 한다. 참, 소재가 아닌 구조를 보고 메타적으로 접근하는 눈도 길러두는 것을 추천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를 해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파악하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라고 인풋을 활용하거나 선별하는 능력까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닐 테다. 안락함이 보장된 공든 탑에 들어가 사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나. 그러니 표절 시비에 시달리지 않을지 걱정하기보다는, 본인이 만족할 만큼의 정직한 창작을 하는 일에 먼저 집중하면 좋겠다. 자기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은 기댈 수도 없고, 기대서도 안 된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 속 ‘나’에게 믿을 만한 ‘진짜’를 정의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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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아이돌레 웹진 소유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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