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er. 차이트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함께 예술계도 상향평준화를 이룩했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애용하는 서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액정 너머로 보기 편한 스타일이 유행을 탔다. 기존 세리프(삐침) 체 특유의 시각적 피로감 대신, 잘 읽히고 용량도 적은 산-세리프(Sans-serif)가 스크린을 점령했다.
세리프(Serif)는 획마다 있는 ‘삐침(돌기)’을 말한다. 그리고 산(Sans-)은 프랑스어로 ‘~가 없다’라는 뜻이다. 즉 산-세리프(Sans-serif) 서체는 문자 그대로 ‘삐침이 없는’ 서체다. 2020년 대 초반은 그야말로 이 산-세리프의 유행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위와 같이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 변화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늘 그렇듯 산-세리프도 당연히 양가적이다. 산-세리프 로고로 뒤덮인 풍경에 그게 그거 같아보인다는 식의 회의론이 늘었다. 산-세리프 서체에서는 글자마다 직선과 곡선이 맞닿는 곡률 및 폐쇄적 빈 공간(보울(Bowl), 카운터(Counter))이 서로 만나 생기는 부분의 미세한 비율 조절로만 개성을 조각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산-세리프 속에 파묻혀 살아도 시간이 지나고 눈에 익으면 은연 중에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산-세리프 로고가 눈에 익는 데에 걸리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그만큼의 식견과 지식도 쌓아야 한다. 심미안이라는 것은 그래야 만들어진다. 엄청난 비용과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산-세리프가 혼자 압도적인 지분율을 갖는 시대는 생각보다 일찍 갔다. 대신, 산-세리프와 세리프의 사이를 조율한 미니멀-세리프의 시대가 도래했다. 2018년, 버버리는 세리프에서 산-세리프 체로 로고를 과감히 바꿨다. 기존의 클래식하다못해 올드한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럭저럭 성과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5-6년 만에 다시 세리프 체를 다시 데려 온다. 초창기의 로고로 돌아갔다는 말은 아니다. 글자의 세로폭(Point Size)을 잘 보면 초창기 로고는 수직 방향으로 잔뜩 압을 줘 누른 듯한 그래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수직 방향으로 길어진 전반적 세로폭의 변화가 참 경쾌하다. 세리프(돌기)의 모양 자체도 많이 손보았다. 그래서 삐침은 분명히 있지만, 멀리서도 식별 가능한 정도의 크기와 비율로 남겨놓은 것을 빼고는 군더더기를 모두 덜었다. 2023년부터 버버리에 쓰인 이 미니멀-세리프 체는 브랜드 이미지를 아주 성공적으로 뒤바꿔놓았다.
산-세리프의 효율성과 현대적인 느낌, 그리고 세리프의 예스러운 고급미를 두루 갖춘 이 미니멀-세리프 스타일은 유행을 타고 온갖 산업군에 퍼졌다. 순식간에 수많은 의류 및 화장품 브랜드의 로드샵에서 이러한 스타일이 자주 보인 것도 이런 흐름의 일환이다. 요즘에야 성수동에 자주 가면 볼 수 있는 감성이나, 당시로서는 미니멀-세리프의 존재 자체가 갖는 중용적 위치가 높아진 대중의 미적 기준, 이전과 다르게 잘 개발된 미니멀-세리프 서체 파일의 범람 등의 환경과 맞물려 수요가 폭발한 셈이었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는 2021년도 3월 우주소녀(WJSN)의 〈UNNATURAL〉 컴백 티저부터 특정 서체를 유달리 자주 쓰는 모습이다. 위 이미지 속 그룹명 및 문구(Music Preview, Coming Soon 등)도 모두 한 가지 서체로만 이루어져 있다. 미니멀-세리프 안에서도 특유의 형태미로 필자의 시선을 끈 이 글씨체는 이후로도 유달리 이 기획사의 작업물에서 많이 목격되는데, 그 결과물은 바로 아래에서 소개할 작품과 같다.
같은 소속사의 후배 그룹 아이브(ive)가 같은 해 12월 말 데뷔했을 때에도 같은 서체를 쓴 모습이다. 외주 작업이지만, 해당 폰트를 이전부터 쓰던 기획사의 인하우스 디자인 팀이 이 작업을 의뢰했다고 가정해보면 충분히 회사가 자의로 ‘선택했다’고도 볼 만하다.
비슷한 때 BPM엔터테인먼트에서 결성 후 데뷔한 ‘비비지(ViViZ)’의 로고도 마침 같은 서체로 제작되었다. 팬덤인 ‘나비(Na.V)’의 로고(비비지 로고 우측 사진)도 이 서체가 갖는 V의 끝자락에 안으로 다시 말려들어간 곡선(보울; Bowl)의 모양을 아이덴티티 삼아 리디자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국내외 케이팝 팬덤 간에는 둘 사이 표절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물론 두 디자인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었으므로 기획 시기 역시 유사할 것이라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주목을 한몸에 받은 이 글씨체의 이름은 ‘Saint Monica(Regular)’다. 엇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미니멀-세리프 사이에서도 M, A, V 등에서 그래픽적 조형미가 단연 두드러진다. 카운터(Counter; 획과 획이 만나 막힌 부분; 위 사진의 ‘p’ 속 빨갛게 칠한 부분)의 모양이 특히 눈에 띈다.
이 서체가 특히나 매력적인 이유는 ‘합자’에도 있다. UNNATURAL의 로고 속 ‘AT’ 부분은 T의 가로 획 중 절반이 앞의 A와 이어져 있다. 이렇게 특정 문자 두셋 정도를 나란히 쓸 때 별도의 그래픽 처리가 적용되는 것을 ‘합자(Ligatures)’다. 그리고 서체 소개 페이지(왼쪽)를 통해 우리는 ‘AT’ 디자인처리가 서체 파일에 기본 탑재된 옵션이었음을 알아낼 수 있다.(*Saint Monica는 유료 버전에서만 합자 제공. 사용할 분들은 유의 바란다.) ‘f’나 ‘ff’, ‘fi’ 정도에만 합자를 만들어두는 다른 서체와 달리 ‘AT’, ‘OV’ 등 옵션의 수가 많은 것도 큰 매력이다.
합자가 이렇게 디자인된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세리프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필기체’, ‘손글씨체’ 등은 역사적으로 최대한 많은 철자를 끊기지 않고 한 번에 속기하는 것이 목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로 위 사진 속 강조 표시한 ‘commence’에서도 철자를 하나하나 끊어 쓰지 않은 모습이다.
실제로 적용된 예를 보자면 이렇다. ‘OV’의 ‘링크(link; 두 문자를 연결해주는 획)’는 O의 첫 획이 출발했을 가장 윗꼭짓점으로 다시 돌아온 상태에서 펜을 떼지 않고 그대로 V의 일부를 이루는 획이 된다.
또 이렇게 모든 글자를 한 획에 속기하는 것에는 같은 단어에 속하는 철자끼리 묶어주고, 아닌 단어끼리는 서로 확실하게 떨어뜨려 시각적 분리도를 높인다는 장점이 있었다.
디지털 파일로도 이는 마찬가지다. 합자를 따로 디자인해주지 않으면 철자 사이마다 생기는 비효율적 공백은 여전히 골칫거리다. 그 사이에 생기는 자간만 해도 다 얼마인가. 그렇다 보니 디자이너가 결국 이를 일일이 수동조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문제가 계속되자 점점 서체 파일도 자체적으로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합자를 만들어주는 경우가 늘었다.
요즘에는 정말 비슷한 류의 서체가 넘실댄다. ‘Qomarun’ 폰트를 적용한 트리플에스(tripleS)의 첫 단독콘서트 투어 발표 포스터(2026; 상단 좌측), 우주소녀의 〈Last Sequence〉(2022) 커버 아트는 이 때 쏟아져 나온 작품 중 하나다. 산-세리프 체에 가까운 에일리의 〈I’M LOVIN’ AMY〉(2022; 상단 우측)도 서체는 많이 달라졌으나 의도한 디자인적 뉘앙스는 보다 이 미니멀-세리프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서체 자체가 타 서체에 비해서도 굉장히 공들여 디자인된 흔적에 비해, 제작자가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방식은 너무 안일한 편이다. 당장 비비지의 로고 역시 서체 하나로만 떼운 식이고, 특별히 손 본 구석이란 없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도 한 가지 서체나 비슷한 폰트 안에서만 돌려가며 쓸 뿐이다. 이는 디자이너가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해 주관적으로 꽂힌 서체 하나만 계속해서 돌려막기 식으로 쓴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더구나 마땅한 변형이 없거나, 변형을 가해도 그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행보는 아무래도 아쉽다. 이어지는 후속편에서는 아이브의 로고를 중심으로 타이포그래피 및 로고 제작에 얼마나 감각이 아쉬운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후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아이돌레 웹진 소유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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