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1 - 여성 공연인 릴레이 인터뷰
Q. <명동로망스> 끝나고 이제 며칠 지났는데
이제 일주일쯤 됐는데, 막공 하자마자 집에서 잠만 잔 것 같아요. 다방 식구들이 출연하는 공연들도 보러 다니고, ‘팝업 콘서트’ 연습 때문에 자주 만나니까 정말 끝났다는, 이별 같은 느낌은 아직 안 나는데 콘서트까지 끝나고 나면 실감 나려나 싶어요. 콘서트를 준비하며 함께 공연했던 멤버들과, 심지어 라이브 밴드의 음악에 맞춰 <명동로망스> 노래를 부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아, <명동로망스> 너무 좋아요.
Q. 창작 초연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창작 초연이 배우에게나 스텝에게나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인데요, 그만큼 의미 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제가 라이선스 작품이었던 <이블데드> 외에는 줄곧 거의 창작 작품만 한 덕분에 여러모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만들어나갈 여지가 크죠. 함께 고군분투하며 의미 있는 논쟁, 토의를 하고 잘 버무리는 것. 물론 아이디어 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걸 정리하고 다듬고 무대화 시키는 게 쉬운 과정은 아니지만 그게 정리가 되고 공연으로 만들어지고 나서보면 너무나 의미 있고, 뿌듯하더라고요.
Q. 선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어땠는지
<명동로망스> 첫 주에 (안)유진 언니가 제 공연을 보러 오셨을 때 정말 덜덜 떨렸어요. 제가 유진 언니가 혜린 하실 때 봤는데 너무 잘하시고 역할이 너무 매력 있었거든요. 그리고 <오! 캐롤>을 같이 했었는데, 제가 전혜린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참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거의 막내 시절에 함께했던 언니, 오빠들이랑 이번에 몇 년 만에 다시 많이 만나게 된 거예요. <빨래> 스윙, 커버할 때 (최)호중 오빠가 ‘솔롱고’를 하셨고, <날아라, 박씨!> 앙상블 할 때 (홍)륜희 언니가 주인공이셨죠. 저는 연습 때 조금 느린 편인데 다 기다려주시고 저를 너무 믿어주시고, 오히려 더 챙겨주시고, 응원해주셨어요. ‘너무 잘 하고 있어’ 그런 말 하나하나가 진짜 큰 힘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작품이 또 감회가 새로웠어요. 저희 분장실이 진짜 비좁은데 가끔 어릴 적 함께 했던 언니 오빠들이랑 같이 그 안에서 함께 분장 받고, 수다 떨고, 무대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신기했어요.
Q. 지금까지 공연했던 작품/배역들 중 정말 좋아했던 한 가지를 꼽는다면
<이블데드>의 린다가 너무 좋았어요. 마지막 무대인사 때 청승맞게 울었죠. (웃음)
대학교 뮤지컬 전공 처음 들어갔을 때 정말 입시곡 몇 곡 밖에 몰랐는데, 신입생 환영 공연 갈라 콘서트에서 <이블데드>의 ‘슈퍼마켓 하모니’를 보게 되었어요. 너무 신선한 충격인 거예요. 노래도 너무 좋고 러브송인데 두 사람만의 진지함 안에 코믹 코드가 있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와 나중에 나도 꼭! 해보고 싶다. 저 뮤지컬 제목이 뭐예요?’라고 물어보고 다녔어요.
그때 <이블데드> 초연 영상들을 다 찾아봤어요. 그 이후로 열심히 작품을 하다가 <이블데드>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도 신인을 뽑는 오디션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디션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어요. 서류, 1차부터 4차 오디션까지 거쳤는데, 하나씩 합격해나갈수록, 이 작품이 점점 더 너무 간절해지더라고요. [그리고 꿈에 그리던 ‘린다’를 하게 되셨죠!]
처음 연습 때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들이 드러나고, 잘 안 풀렸었는데, 연습 과정에서 <이블데드> 식구들과 함께 고민해나가고, 같이 만들어나가면서 마치 점점 ‘알을 깨고 나오듯이’ (웃음) 점차 린다로서 즐기게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공연하는 내내 너무 좋았고 행복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다 있는 작품이거든요. 춤은 잘은 못 추지만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라이브 밴드와 코미디 요소까지. 그리고 ‘린다’라는 역할이 하면 할수록 너무 재밌고 매력적이더라고요. ‘하루하루 공연을 보러 오신 분들께서 즐겁게 보고 돌아가실 수 있게 온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나 역시 즐겁게 공연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했던 것 같아요.
Q.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힘들거나 어려웠던 역할이 있었다면
<명동로망스>의 혜린 역도 어려웠지만 저는 가장 어려웠던 배역을 꼽자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형사 역일 것 같아요. 제가 한 공연의 가장 첫 시작, 오프닝을 열어보는 게 처음이었거든요. 다른 공연을 보러 갈 때도 오프닝이 좋아야, 첫 단추가 잘 꿰어져야 그다음도 흥미가 생기고 집중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데 제가 초반에 그걸 잘 못 해낼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노래가 아니라 긴 대사로 열기 때문에, 딕션도 연기도 정말 중요했고요. 다른 배우분들은 공연 회차가 더해갈수록 공연 전에 조금씩 여유가 생겼지만… 저와 첫 노래를 부르는 ‘노리오’ 역을 맡은 오빠와는 공연 직전, 매일 긴장한 채로 대기하고 있었어요. (웃음)
Q.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형사 역을 하며 에피소드가 있다면
원래는 형사가 아무것도 없이 사건을 브리핑하는 거라, 수첩이라도 하나 들고나가야겠다 싶어서 그 디테일을 만들었고요. 브리핑이다 보니, 제가 전에 모델 하우스 알바를 했을 때 워낙 모델 룸 브리핑을 많이 해서 (웃음) 연습할 때 자꾸 그 톤이 나오더라고요. 친절하게 끝을 올리는 그 말투 아시죠. (웃음) 연출님께서 무조건 어미를 떨어뜨리고 ‘시크하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녹음을 하고 들으면서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연습을 해서 점차 만들어 나갔던 것 같아요.
Q. 형사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던 게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는데
사실 첫 리딩 때만 해도 형사가 남자 역할이었어요. 연출님께서 앙상블들의 배역이 정하기에 앞서 각자 리딩 하는 걸 들어보시고 결정하신다고 하셔서 순서대로 해봤는데 당연히 형사 역할은 남자배우들이 읽었죠. 소설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남자였기도 하고 제가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형사 역할이라면 당연히 남자가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을까 싶어요. 이런 선입견이라는 게 참 무섭죠.
같은 여자이기에 참 기구한 삶을 살았던 마츠코에 대한 수사를 하면 할수록 그녀의 삶에 깊숙이 닿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저 활자만 읽는 것뿐인데도 이입하게 되더라고요. 감정을 절제하고 어느 정도 중립을 지켜야 하는 역할이지만 마냥 딱딱하게만 진행하는 게 아니라 브리핑을 마치고 한숨을 쉬고 나간다거나 하는 디테일도 자연스럽게 생겼고요.
Q. 노래에 대한 열정도 정말 대단한 것 같은데
제가 노래하는 걸 너무 좋아해요. 잘하든 못하든 너무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 자체가 너무 즐겁고 행복해요.
예전에 <판타스틱 듀오>를 통해 노래하는 친구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는데, 좋아하는 게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니 노래하는 것 자체가 더더욱 좋아지더라고요. 그때 한창 그 친구들이랑 홍대나 한강에서 버스킹도 많이 했어요. 정말 누가 돈 주고 시켜도 내가 하기 싫으면 진짜 못하는데, 진짜 다들 노래, 음악에 대한 열정, 갈증이 많고 또 우리가 너무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즐겁게 함께 노래했던 것 같아요.
Q.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 알게 되셨다고요.
저는 원래 책을 정말 안 읽는 편이었거든요. 근데 <명동로망스> 오디션에 합격하고 나서,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면 따로 시간을 내서 책을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연습 전에 미리 책들을 읽었어요. 일단 혜린이 쓴 일기들을 모아 만든 유고집을 보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삶, 영원, 죽음 이런 걸 얘기하고 있어서 도통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데다가, 제가 책을 안 읽어버릇하다 보니 너무 재미도 없고 안 읽히는 거예요. 그래도 제가 이 역할을 해야 하니까 읽고 또 읽고 계속 읽고… 그러다 보니 그 텍스트 이면에 있는 것들에 대해 서예림으로서도 생각의 가지를 뻗어 나가게 되고, 글자를 글자 그대로만 보지 않게 되는 순간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쓰신 일기가 들어있었는데 제 나이와 같은, 또래 시기의 일기도 있었거든요. ‘이 분도 이런 고민, 생각을 하셨구나’ 하며 푹 빠져서 읽었어요. 제가 4개월 만에 책을 진짜 좋아하게 된 거예요!
[좋은 취미를 얻으셨네요!]
독서를 좋아하시는 분들에 비해서는 적은 권수겠지만, 제가 사 개월 만에 열다섯 권인가 읽었더라고요. 그 어떤 취미생활보다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웃음) ‘내가 왜 그동안 멍청하게 왜 이렇게 책을 안 보고 살았을까.’ 싶었어요. 비단 공부가 되는 책이 아닐지언정 책을 읽으면 집중해서 생각하게 되잖아요. 생각을 재정비하게 되고 나의 생각이 생기고 더 넓어지고 간접 체험을 하고요. 제가 갓 데뷔했을 때, 추민주 연출님께서 ‘예림아 배우로서 가장 많이 해야 하는 게 뭐게?’라고 물어보셨는데 스물둘, 스물세 살의 저는 ‘노래 연습, 연기 레슨, 춤 실력 늘리기, 영화 많이 보기 등등,’ 하필 책 읽는 것만 빼고 다 얘기한 거예요. (웃음) 연출님께서는 그때 당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당연하긴 한데 정확한 이유가 궁금해져서 여쭤봤더니 배우는 어쨌든 대본에 있는 활자를 세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글을 잘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배우는 활자를 세우는 사람이다,’ 그 말이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일 년에 서너 권, 그마저도 거의 대본만 읽는 편이었는데 말씀하신 대로 책을 많이 읽고 대본을 다시 보면 이게 어떤 상황인지, 그 그림이 제 머릿속에서 더 잘 그려지는 것 같아요.
가끔 독서 모임에 가면 책을 나누는 게 있는데, 좋은 책을 추천받고 주실 때 그 마음이, 그분들도 이 책을 읽고 좋아서 주신 거니까. 참 감사하더라고요. 옛날에 그냥 책 선물을 받았을 때는 너무나 감사하지만 어느 순간 잘 안 읽게 되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책 욕심이 많아졌어요.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Q. 재밌게 읽으신 책 이야기 좀 해주세요.
가볍게, 쉽기 읽을 수 있는 독립출판 책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저도 추천받아서 알게된 서점인데, 부천에 ‘오키로북스’라는 독립출판서점이 있어요. 사장님께서 인스타에 아내분과의 일화를 짧게 짧게 올린 걸 <제가 이 여자랑 결혼을 한 번 해봤는데요>라는 책으로 엮으셨는데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너무 재밌더라고요. 인기가 많아서 그 부인분도 글을 쓰셔서 <제가 이 남자랑 결혼을 한 번 해봤는데요>도 나왔어요. 짧은 책인데 알콩달콩 지내시는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한 시간 만에 다 읽은 것 같아요. 그리고 요새 제 마음과 감정을 좀 긍정적으로 다스려보려고 <감정은 습관이다>를 읽었는데 좋더라고요. 너무 재밌게 읽었고요. 그리고 <아흔 일곱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이옥남 할머니께서 쓰신 일기들을 엮은 책인데, 매일 밤 자연 속에서 평온하게 있는 것처럼 힐링이 되었어요.
혜린을 준비하며 읽은 것 중에 진짜 좋았던 건 <데미안>. 1위로 꼽겠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이 말이 <데미안>에 등장하기도 하고, 전혜린 님이 번역하기도 했고 좋아해서 즐겨 읽었던 작품이라 해서 읽게 됐거든요. 처음에는 왠지 진지하게 인생철학을 얘기할 것만 같고, 어렵고 재미없는 책일 것 같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읽었는데 이틀 만에 다 끝냈어요. 그렇게 에피소드들로 엮여있는지 몰랐는데, 한 사람이 어떻게 어떤 사람을 잘못 만나서 무너질 수 있는지,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범죄가 범죄를 낳게 되는 첫 일화가 너무 충격이었어요. 사람의 내면 심리를, 일화를 통해서 스토리로 보여주니까 너무 재밌는 거예요. 헤르만 헤세 님 정말 대단해요. 독자분들께 <데미안>은 정말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이미 다 읽으셨겠지만, 책이 두껍지 않으니 한 번 더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요즘 영상들의 퀄리티도 워낙 좋지만 책은 진짜 내가 상상하는 대로 펼쳐지는 거니까요. 책 얘길 많이 하게 되네요. 혜린 하면서 좋았던 거는,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 (박수)
Q. 저한테, 혹은 관객들에게 궁금한 거 있으신가요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인터뷰어 선생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혜린 역을 하면서 제 꿈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그런 세상’도 궁금해졌어요. 다들 ‘그런 세상’ 없이, 그저 바쁘게 사는 것 같아도, 혹은 각박한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도 정말 각자의 ‘그런 세상’이 있더라고요. 스스로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은근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희망적인 이상향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꿈이더라도, 우리가 현실에 파묻힌 채 살면서 그런 세상을 너무 묻어두고 묵혀둔 게 아닌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세상이 있을 것 같아요.
Q. 이제 삼십 대를 맞이했네요. 돌이켜보니 서예림의 이십 대는 어땠던 것 같은지
작년 11월부터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요. 제 스물아홉 마지막 12월에, 딱 삼십 살을 맞이하면서 자꾸 제 이십 대 청춘을 돌아보게 되는 거예요. 12월에 일기도 많이 쓰고 2018년의 마지막 날엔 강화도에 일몰도 보러 가고, 별 난리를 다 쳤어요. (웃음) 이제는 제가 진짜 마냥 어리게만 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철이 없고 아이 같은 면도 있기는 한데, 그래도 너무 때묻고 찌들어있는 것보다는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게 차라리 낫지 싶어서 그런 부분들이 제 장점이라고도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제 좀 알아야 할 것 같고요. (웃음)
제 이십 대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산 것 같아요. 공연 없을 때도 알바를 안 쉬고 했고요. <판타스틱 듀오>에 출연했을 때 작가님께서 ‘부평 알바 여신’이라는 타이틀을 지어준 것도, 사전 인터뷰를 하면서 과거 알바 경력들을 물어보셔서 했던 것들을 다 읊었더니 붙여주신 거거든요. 어릴 때부터 저희 집이 그렇게 유복한 편은 아니었는데, 집안에 대한 자격지심도 별로 없고 이상한 긍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신체 건강하게 낳아주셨고, 두 분 다 강원도 산골에서 상경하셔서 이만큼 키워주신 게 그저 감사했어요. 어쩌면 이게 제가 더 열심히 살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인 것 같았어요. 만약 처음부터 모든 게 주어져 있었다면, 뭐가 됐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뮤지컬 배우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물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힘들수록, 이상한 희열이 있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구나’하는 성취감이 있었어요.
Q. 인생에서 큰 성취감을 느낀 일은 있었다면
학자금 대출이 저에게는 정말 큰 짐이었어요. 예대를 쭉 다니다 보니 교내 장학금도 받고 알바하면서 갚았는데도 제가 다니던 3학년 시절까지는 국가장학금 제도가 없어서, 졸업할 때쯤 빚이 눈덩이처럼 생겨있는 거예요.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몇 억 원, 이렇게 큰 빚은 아니지만 다른 동기들 중에는 학자금 대출이 아예 없는 친구들도 있고, 졸업 당시 스물다섯, 스물여섯 살이었던 저에게는 정말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는 정말 뮤지컬이 하고 싶어서 대학교에 왔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겨우 졸업만 했을 뿐인데 벌써 발목 잡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목표가 서른 살 되기 전에 학자금 빚을 다 갚는 거였어요.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고, 공연 페이나 알바 월급을 받으면 아무리 적어도 그때그때 쪼개서 중도 상환을 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와, 작년 6월에, 제 나이 29.5살에 2600만 원 빚을 다 갚은 거예요. 그게 제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일이고 가장 잘 한 일 같아요.
Q. 배우라는 직업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는 거 자체가 너무 감사하잖아요. 정말 겸손이 아니라 저는 제가 항상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게 그런 게 있어요. 주변 사람들은 가끔 제가 자존감,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게 문제라고도 해요. 제가 제 자신에게 기준이 높은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힘들게 발걸음 해주시고 티켓값을 지불하고 오시잖아요. 그날의 공연에서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이 든 날은 혼자 자괴감이 정말 많이 들어요. 라이브 공연이다 보니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발걸음 해주신 분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배우의 몫이자 일인 것 같아요.
Q. [연]과의 인터뷰가 어떠셨는지
어찌 보면 공식적인 인터뷰로는 이게 처음이거든요. 제가 뭐라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에 참 감사했고요. <명동로망스>가 끝나고 작품에 대해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하고, 너무 좋은 취지인 것 같아요. 이건 제 아이디어인데, 잡지처럼 인쇄하시면 저도 한 부 살게요. (웃음) 저의 첫 인터뷰.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웃음)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정말 운이 좋게도 약 2년 동안 공연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되었어요. 저는 공연을 해서 후회했던 작품은 하나도 없었어요. 어떤 걸 해도 정말 항상 배우는 게 있었고, 제가 큰 배역은 아니더라도 언니, 오빠들 선배님들 하시는 거 보면서 비단 연기나 실력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많이 배웠어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은 생활에서부터 너무 다르고. 공연을 쉬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것과 공연을 하는 것을 비교하면 언제나 ‘아! 공연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다!’가 되는 거예요. 다만 항상 많은 사람들 속에, 시끌벅적한 곳에 있다 보니까 쉬는 날에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쉬는 게 너무 좋아요. 집순이가 되더라구요. (웃음) 책 읽는 재미도 알게 됐고요.
전혜린을 준비하며 읽었던 글이나 <데미안> 등의 책이 자꾸,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내 내면에서 진짜 원하는 게 뭐지?’ 이렇게 제 자신을 자꾸 파고드는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삼십 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저 안 깊숙이 들여다보고 나 자신과 만났던 적이 없는 거예요.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어떨 때 우울해지고 어떨 때 행복한지. 상처받거나 치여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고 묵혀놨던 것 같아요. 공연 마치고 제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수록 쌓인 게 많은 것 같았어요. 나 자신을 안다는 것,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사실 나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고, 눈물도 많고 상처도 되게 잘 받고.
서른 살인데 마치 사춘기 같아요. 좋은 사춘기인 것 같아요. 뭐라고 해야 하나, 삼십춘기? (웃음) 서른 살이 된 올해, 제 자신에게 안식년을 주려고요. 공연을 하더라도 하반기에 하고, 잠깐 휴식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배우를 계속 계속 하고 싶고 (웃음)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필요한 시간인 것 같아요.
Q. 그렇다면 휴식기에는 뭘 하고 싶으신가요.
그동안 제 자신에게 투자 아닌 투자를 했는데, 어느 순간 옷이나 물건을 사거나 등등 이런 것들이 너무나 유한한 거라고 느껴졌어요. 제 자신의 내면을 위해서 정서적인 투자를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등산이나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합니다. 제가 자연을 너무 좋아해요. “나는 자연인입니다!” (웃음) 산이 주는 평온함, 숲 향기, 나무냄새 가득한 공기를 맡는 게 너무 좋아요. 제가 제주도를 너무 좋아해서 작년에만 세 번 갔는데, 여건만 된다면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이런 거라도 한 번 해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공연 쪽이 아닌 새로운 취미를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민정 연출님께서 ‘쉬면서 배터리 충전 잘 해서 또 보자’고 하셨거든요. 낯선 것들을 하고 새로운 자극들 받으면 제가 나중에 배우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Q. 인터뷰를 마치며, 배우 서예림의 미래가 더 궁금해지는데
마지막으로 제 미래를 말씀드리자면, 말도 안 되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저도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배우를 하려고 하겠지만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요. 변화무쌍하게, 그리고 그런 여러 가지 경험들로 배우를 했을 때에도, 어떤 역할을 맡든 그 배역을 완전히 입어서 그 배역으로만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만의 색깔과 매력을 더하겠지만요. 제 이십 대를 돌아봤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앞만 보고 달린 것 같아요. 참 욕심 많고 조급했고, 조바심도 많았고, 작품 하나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안 쉬고 계속했던 것 같아요. 삼십 대에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제가 하는 일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너무 조급하지 않게 나아가고 싶어요.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하는 건 제가 생각해도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아요. 함께 공연할 때 너무 편하고, 무대에서 같이 호흡하고, 서로 더 살아있게 해주는 것도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저도 나중에 공연했을 때 ‘이 사람이랑 또 같이 공연하고 싶다’ 이런 배우가 되는 게 목표예요. 관객분들에게는 또 다른 작품이나 배역으로 보고 싶은 배우가 되는 게 목표고요. 서예림이 나오면 믿고 볼 수 있게 만드는 게 제 꿈이고, 그렇게 되기엔 아직 너무 멀었죠. 실력도 더 키워야 하고요, 내실을 좀 더 단단하게 채워야 가능할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어색어색)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 생각해요.
다음 인터뷰에서는 <명동로망스>와 같은 날 막공을 했던 어느 여성 주연 뮤지컬 작품에 참여한 여배우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역시나 조금은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펼쳐내보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있어요. 매거진 [연]의 <여성 공연인 릴레이 인터뷰> 프로젝트에 모시고 싶은 여성 공연인이 너무나 많아서 매번 고민이지만, 독자분들께서 희망하시는 다음 인터뷰이 후보를 SNS에 외쳐주실 때마다 은근히 참고하고 있답니다. (찡긋) 조만간 다음 인터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