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었던, 『여름』
요즘 여름 실화소니..!? ☀️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는 내내 날씨는 숨 막히는 찜질방처럼 덥고, 마음속은 뜨겁게 흔들렸어. 내 마음이 왜 그랬을까.. 돌아보니 주인공 채리티 로열의 마음이 내 마음에 깊게 와닿았던 것 같아. 채리티도, 이 소설도, 둘 다 순수하면서도 섹시했거든. 순수와 섹시가 동시에 느껴지는 계절, 그게 바로 『여름』이었어.
이 소설은 외딴 산골에서 자라난 채리티가 도시 청년 하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세상과 자신을 향한 갈망을 꿈꾸지만, 결국 현실 앞에서 사랑도 꿈도 깨져버리는 이야기야. 진부한 로맨스가 아니라,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결국 현실에 순응해 버리는 주인공의 선택들이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지.
“문득 도망치는 것. 그것도 당장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p.146)
이 독백의 문장을 봐.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이 마음, 우리도 느껴본 적 있잖아. 근데 채리티는 어쩌면 삶의 거의 모든 순간 이런 감정을 안고 살아온 걸 거야. 그러다 운명처럼 하니를 만나면서 그 욕망에 불이 붙은 거지. 그전까지는 막연했던 도망의 욕구가 하니를 만나고 나서 구체적인 ‘결단’으로 바뀌게 되었어.
그런데 생각해 보면, 채리티의 이런 마음은 그녀가 자라온 환경에서 이미 시작된 거야. 외딴 산골 마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로열에게 ‘거둬진 아이’로 살아온 삶. 부모가 아닌 낯선 이의 보호 속에서 자라며 느꼈을 막막한 고립감, 정체성에 대한 갈등, 묘한 굴종과 벗어나고 싶은 욕망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니 누군가 나타나서 기적처럼 자신의 인생을 구해주길 바랐던 거야.
그래서 이 장면에서 채리티가 느꼈던 건 일회적 충동이 아니었을 거야. “이제 더는 그 집에서, 그 사람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 이건 그녀가 자신의 삶에 책임지기 위해 내린, 냉철하고도 단단한 결심이었을 거야.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채리티가 처음으로 진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라고 마음먹은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 장면은 시작에 불과해. 계속되는 채리티의 결단과 변화무쌍한 감정들, 성인이 되어가는 몸까지, 이 모든 것이 『여름』이라는 계절처럼 본능적이면서도 순수했어. 푸른 풀, 뜨거운 공기, 숨어 있는 새소리, 산속의 바람… 풀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채리티의 마음도 조금씩 자라나고 무르익는 게 느껴졌거든. 그리고 그녀의 성적 자각은 단순한 육체의 경험이 아니라, 정신의 성숙과 이어져서, 이 『여름』은 채리티에게 말 그대로 ‘영혼이 눈뜨는 계절’이었던 거야.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치욕을 직면하고 또 다른 결단을 내리며 삶을 이어가야 하는 현실로 이어지게 돼. 워튼이 당시 전통적인 틀을 깨고 ‘여자 주인공도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지만,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결말로 느껴지기도 해.
(미국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얻은 게 1920년이고, 이 작품이 1917년에 쓰였다는 걸 감안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채리티는 결국 하니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갖게 되지만, 그와 함께 떠날 수 없게 돼. 대신, 자신에게 남겨진 현실과 책임을 껴안기로 결심하면서 마을로 돌아오지. (최악의 스포는 남겨둘게)
읽는 내내 채리티의 사랑을 빙자한 도망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랐기에 많이 아쉬웠어. 어쩌면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뻔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 소설이 명작으로 남았겠지, 하고 스스로 위로하긴 했지만.
이제는 한층 더 성숙해진 어른이 되어, 삶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 채리티의 앞날을 그저 응원할 뿐이야. 그리고 믿어. 채리티는 자신이 새롭게 얻은 것들을 끝까지 소중히 여기며, 끝까지 행복한 계절들을 살아갔을 거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