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대인 나의 모습-두 얼굴의 야누스?

원하는 모습을 꺼내쓸 수 있을까?

by cranky witch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23살의 나와 33살의 나도 똑같았던 것 같은데(ㅠㅠ), 회사에서의 ‘나’와 대학원생인 ‘나’는 정말 달랐다. 다른 환경과 다른 역할에 따라 나 자신이 적응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낯설다.


다. 사. 다. 난. 했던 직장 생활에서 분명한 한 가지는, 나는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에 초기 멤버로 합류한 덕분에 나이에 비해 높은 직급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직장인들은 일반적으로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정도의 승진 루트를 겪는 것에 비해, 내가 다녔던 회사는 초창기엔 아예 직급이 없었다. 이후엔 ‘애널리스트-매니저-디렉터’ 3단계로 조직 체계가 정비되었는데, 디렉터로 직급을 달게 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사실 디렉터가 되기 전에도 내 업무를 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폭이 매우 넓었기 때문에 디렉터 직급을 달기 전 후가 크게 차이 나지 않긴 했다.


조직이 정비되고 채용이 점점 늘어나면서, 내가 하는 일의 영향을 받는 사람도 함께 늘어났다. 회계에 관련된 모든 정책을 담당하면서, 내가 만든 사소한 작은 규정 하나의 여파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걸 점점 체감해갔다. 아주 단순한 예로, 경비 지출 입력 절차 하나를 바꾸면, 곧바로 모든 직원들이 (본인들이 하던 업무에 더해서) 새로운 입력 절차를 익히고 기존과 다르게 입력해야 한다. 내가 잘못 생각해서 꼭 필요하지 않은 데이터를 입력하게 하면, 모든 직원들은 지출을 입력할 때마다 그만큼의 업무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사람이라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고 입력할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실수도 늘어날 테니, 지출 데이터에 실수로 입력한 에러 데이터도 많아지게 되고, 나는 그 데이터의 정정에 또 시간을 쏟게 된다. 연쇄적으로 낭비 퍼레이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규정 하나 정책 하나 다듬거나 만들 때마다 의도는 직원들을 위한 것이었더라도 결과는 그들에게, 회사에 치명적일 수 있다. 회사에 낭비를 초래했다면 그에 따라 내 업무 실적도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규정 개선 전부터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고, 실무자들의 의견을 꼭 듣고, 개선 후에 발생 가능한 불편함을 꼼꼼하게 챙기고, 공표 전에 미리 몇몇 실무자에게 알려 분위기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회계 분야에 속한 것이 아니더라도 직원들이 겪는 불편과 개선되어야 할 영역들은 넘쳐났기 때문에 ‘디렉터’였던 나는 그 이슈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떠안았다. 처음부터 강제로 맡겨진 건지, 내가 자발적으로 나섰던 건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시작은 몰라도 과정의 마음가짐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답답함과, 해결되지 않으면 직원들(특히, 내 동생 같은 사회 초년생 직원들)이 불편해할 게 뻔하니 알면서 방치할 수 없는 울며 겨자 먹기 같은 마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한다'는 마음과 '그래도 내가 해야지’하는 책임감의 동기가 혼합되어 있었다. 이슈에 따라 어떤 일은 큰 열정을 갖고 수행하기도, 또 어떤 건은 진짜 하기 싫어 죽겠는 마음으로 하기도 했다. 그렇게 긴 기간을 일하다 보니 내 안에서 건강하게 해소되지 못한 스트레스가 쌓여갔고, 그 스트레스는 다른 감정들로 둔갑해서 나를 괴롭혔다. 가장 끔찍했던 건 '왜 나만' 괴물이었다. 아직 하던 게 해결되지 않았는데 또 문제가 터지고 또 터지는 상황의 한가운데에 있게 되면, 억울함과 남 탓 감정이 마음속에서 '왜 도대체 나만, 내가 다 해야 되는 건데?'라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조직이 성장하며 디렉터로 승진한 직원들도 생겨났기 때문에 더더욱 '왜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거야? 당신들도 힘들다며, 왜 가만히 있는 건데?'라는 생각에 억울함의 울분이 눈앞을 가리게 된다. (사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힘들다) 그래도 어쩌랴. 그런 마음을 가득 안고 또 일을 해나간다. 하기 싫으면? 퇴사하는 수밖에.


반면 대학원에서의 나는 일개 석사생이다. 조교도 교무처 직원도 교수도 아닌 학생이다. 입학 초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야 할 정보들이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어서 확인하기가 복잡하고 번거롭네. 조교님도 하나하나 응대하기 힘들 텐데… 회사에서 하던 것처럼 구글 사이트에 매뉴얼을 만들면 학생 입장에서도 편하고 조교 입장에서도 관리가 편할 텐데…' 그걸 내가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 0.01초 만에 스스로에게 ' 미쳤네'라고 답해줬다. 왜 사서 고생이야, 여기는 일하러 온 곳이 아니라 공부하러 온 건데. 또 학기가 점점 진행되면서는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학생들을 불편하게 하는 학생이 드러나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영역에서 과연 누군가가 이 문제를 위해 나서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르면서,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불편해한다면 그 ‘누군가’가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만약 회사에 이런 직원이 있었다면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겠지만, 내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권한도 뭣도 없고 새로 들어온 조직에서 괜히 나섰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눈치를 봐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회사의 나와 대학원의 내가 비교되었다. 권한과 책임이 주어진 환경에서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나서서 상황을 파악하던 나는 거의 사라지고, 권한도 책임도 없는 환경에서 문제의 관찰자(나쁜 말로 표현하면.. 방임자일까)가 되어버린 나. 물론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다르니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회사에서는 그런 일을 하라고 월급을 받았던 것이고, 학교는 공부를 위해 간 곳이다. 공부하러 간 곳에서 다른 일을 하기엔 시간도 에너지도 없다. 어쩌면 나대는 것으로 보일 수도? 그리고 지금은 누가 준다고 해도 그런 역할을 맡고 싶지가 않다. 너무 힘들어… 이제는 좀 개인주의를 지향하며 공부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뇐다. ‘누군가 해결해 주겠지. 그래야만 하고. 이건 내 역할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솔직히 편하긴 하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보면 참 답답하다)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모든 걸 다 할 필요는 없으니까. 공부가 끝나고, 또 다른 직업에서 사람들과 일하는 어떤 영역이 생긴다면, 그때는 ‘누군가’가 아닌 ‘내가’ 태도를 다시 꺼내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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