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 월드컵: 헤르미온느 vs. 루나

당신의 픽은?

by cranky witch

해리포터 덕후로서 마법 주문을 일상생활에서 떠올리는 순간들은 흔하디 흔하다. 약속 때문에 나가기 직전에, 널브러져 있는 책상에서 물건을 찾아야 하는 아주 친숙하고 빈번한 상황. 이때 Accio를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일상이 손쉬워질까 생각한다. 또 몇 년 전에 라섹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Oculus Reparo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엄청 작은 얼룩인데 안경에 묻으면 그렇게 큰 시야방해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금방 닦았는데 다시 더러워지는 아주 짜증나는 상황에 주문 하나로 새것 같은 안경으로 바뀌면 엄청난 삶의 질 상승 아닌가? 자기 전에 침대에서 불 끄러 가야하는 거리는 또 왜 이렇게 멀어 보이는지, Nox만 쓸 수 있다면 이 귀찮음은 1초 만에 해결될 것이다. 마법 주문뿐만 아니라 굿즈들도 내 일상에 즐비해 있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힘을 내고 싶은 날엔, 아침에 해리포터 굿즈를 하나 골라 챙겨가거나 착용한다. 치과에 갈 때 9와 4분의 3 승강장 모양의 손목시계를 차고 가기도 했고(배터리가 없어서 기능적 효과 전무), 부활의 돌 반지를 끼어 보기도, 레번클로 패턴의 양말을 신고 힘을 내어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해리포터에 나오는 캐릭터들. 한 명 한 명 짚고 넘어가자면 할 얘기 많지만, 일단 헤르미온느를 보자. 그녀는 내 최애캐는 아니지만(최애캐의 행운은 루핀 교수님에게!☆-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자), 항상 제일 부러워했던 인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녀의 지성을 언제나 갈망해 왔다. 하지만, 뜯어보면 나와 헤르미온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공통점이 별로 없다. 나는 I의 대표주자로서,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질문하실 때마다 대답하고 싶어서 어깨를 들썩이며 손을 드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 절대 아니다. 물론, 손을 들 순 있다(?!). 진짜, 정말, 굉장히 필요한 순간일 경우에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포터 3인방이 위기에 처한 상황마다 헤르미온느의 지식이 돌파구가 되어주는 여러 순간들과 그녀의 지성을 인정받아 수업을 더 들을 수 있는 타임터너를 받게 되는 순간을 보면서, 정말 헤르미온느처럼 똑똑해지고 싶었다. 지성으로 빛을 뿜어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답하고 싶어서 안달인 헤르미온느(출처: SCREENRANT)

대학원 첫 학기를 겪으며 그 열망은 더 격렬해졌다. 대학원이야 말로 헤르미온느가 가장 쉽게 빛이날 수 있는 환경 아닌가. 내가 헤르미온느였다면 첫 학기 수업들에서 얼마나 돋보였을까를 이룬 것 하나 없는 현재의 나 자신과 비교하곤 했다. (물론 내가 정말 헤르미온느였다면, 내 적성을 찾아 대학원에 오기까지 먼 길을 삥 둘러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처럼 되길 원하면 원할수록, 마음속의 불안과 걱정은 점점 커져갔다. 특히 나는 언어학 석사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전공도, 직장도 언어학의 ㅇ자와도 관련 없는 과거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런 기.본.기.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몰라"라는 (당연한) 생각이 들 때마다,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스스로를 향한 독촉으로 불안이 가득 차곤 했다. 여기서 (헤르미온느처럼) 잘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압박으로 나 자신을 나도 모르게 가두어갔다.


지나고 나니 분명하게 보이지만, 이건 나를 옥죄도록 내가 만든 덫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든, 난 헤르미온느가 될 수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듯) 난 절대 그녀가 아니니까. 결국 나는 좌절한 채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멀리서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는 지쳐버린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번아웃된 채로 학교를 오고 가던 어느 날, 갑자기 루나가 떠올랐다. 호그와트행 기차에 별난 안경을 끼고 퀴블러 잡지를 든 채로 등장했던 그녀. 타인이 쉽게 이해할 순 없지만, 친절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진, 누구도 모를 수 없는 분명한 존재감의 독특한 루나. 헤르미온느와 다른 느낌으로 나는 그녀도 좋아했었다. 루나는 개성이 빛나는 사람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강렬한 이미지의 루나(출처:TEENVOGUE)

루나가 문득 떠올랐던 그 순간, 나는 내 롤모델을 잘못 골랐다는 걸 알았다. 헤르미온느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헤르미온느는 나와 맞지 않는 이상형이었다. 영화 곳곳에서 보인 루나의 모습들로 추측해 보면, 루나는 타인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바로 그거, 그 곧은 자신감이야 말로 내가 갈망하는 것이었다. 물론 루나는 조금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독특함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루나는 방어적이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참 잘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서두르지 않고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나아간다. 이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길 꿈꿨지만, 현실은 가장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마라톤 경기에서 스프린트를 뛰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롤모델을 루나로 바꾸기로 마음먹었지만, 타고나길 욕심쟁이에 빨리빨리-인간이라서 쉽게 변하기 어렵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이미 타인의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수많은 일들이 내 앞에 놓여있다. 곧 지도교수를 정해야 하는 만큼 잠재력이 있는 학생처럼 보여야 한다. 석사 그리고 박사과정 동안 꾸준하게 줄기차게 내 연구를 평가받아야 한다. 내가 연구자가 된다면, 대부분의 나의 일의 결과는 학계의 평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더 부정적으로 얘기해 보자면(내 전문분야다), 내 앞으로의 모든 미래는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루나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논문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재밌는 연구(?)를 최근에 발견했다. '침묵의 열역학법칙: 왜 조용한 사람들은 차가운 분위기를 만들어낼까?'라는 제목부터 신기한 페이퍼다. 아쉽지만 이건 '진짜' 학술지의 '진짜' 연구논문이 아니다. 페이퍼에 있는 수식은 문송한 내가 전혀 읽을 수 없는 글자이므로 넘어간다 쳐도, 형식만 논문에서 따왔을 뿐 내용을 읽어보면 대놓고 전혀 논문 같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는 통에 계속 픽픽 웃음이 나온다. 심지어 이 페이퍼가 출판(?)된 학술지 이름도 Journal of Immaterial Science(중요하지 않은 과학 저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페이퍼를 읽고 나서 왠지 모를 어떤 이상한 힘을, 위로를 받았다. 내 앞에 높인 무수한 평가의 과정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만약 별난, 어쩌면 괴짜 같은, 루나스러운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든 내 안에 유지할 수 있다면, 그 겁이 나는 단계들을 힘을 내서 지나가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정확히 어떤 논리로? 어떤 방식으로?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는데, '어떻게든' 될 수 있을 거라는 은근한 느낌이 든다.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은, 루나가 쓴 것 같은 저런 재밌는 글을 어쩌다 한 번씩이라도 읽어주는 것이다. 뭐랄까, 시스템에 곧이곧대로 순응하지 않는 약간의 반항적이면서 유쾌한 그런 글. 아, 또 다른 보장된 방법이 있다. 이미 실행 중인데, 내 가방에 루나 안경 모양의 키링을 부적처럼 달아 두었다. 루나를 시도 때도 없이 떠올려서 내 안에 담아두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너무 영롱하고 예쁘다(도쿄 해리포터 스튜디오에서 득템)

(원글: Hermione vs. Luna - Who Do You Want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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